265화
최후의 방법 (2)
“외롭다.”
문득 지독히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이규한은 예전 생각이 났다.
영화 ‘만월’이 흥행 참패를 기록한 후 이규한은 외로웠다.
지금 느끼는 외로움이 당시에 느꼈 던 외로움과 흡사하단 생각을 하며 이규한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감사합니다.”
신용카드로 택시비를 결제하고 택 시에서 내린 이규한이 서둘러 커피 전문점 블루문으로 들어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카페 안은 손 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하 정후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인과 사진 촬영을 요청하기 위해 서 사람들이 하정후의 주변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정후에게 사진 촬영을 요청하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남 아 있는 것을 확인한 이규한이 카운 터로 다가갔다.
“규리야,커피 한 잔 부탁해.”
“우리 오빠 멋있다.”
“갑자기 왜 멋있다는 거야?”
“하정후를 기다리게 만드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라서 멋있다 고 한 거야.”
이규리가 농담을 건넸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최근 들어 하정후가 커피 전문점 블루문을 찾아오는 횟수가 늘면서 덩달아 매출도 뛰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이규한의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하정후가 커피 전문점 블 루문을 찾아오는 것은 오늘이 마지 막일 확률이 높았다.
‘규리야,좋은 시절 다 끝났다.’
그래서 이규한이 속으로 한마디를 던진 후 하정후가 혼자 앉아 있는 탁자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 대표님,서운합니다.”
하정후는 인사도 건너뛰고 서운하 단 말부터 꺼냈다.
그런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확인한 이규한이 맞은편 자리에 앉 으며 입을 뗐다.
“미리 말씀을 드리지 못한 건 죄송 합니다. 일단 상황을 수습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연락을 못 했습니다.”
지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꺼낸 변명이 아니었다.
이규한은 진짜 바빴고, 그래서 하 정후에게 연락을 할 겨를조차 없었 다.
그렇지만 이규한의 잘못이란 것은 변함이 없었다.
한 편의 영화제작을 총괄하는 영화 제작자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 다.
그중 한 가지가 작품에 출연할 배 우와 자주 연락을 취하면서 작품의 진행 상황을 브리핑하는 것이었다.
또 제작 과정에서 어떤 변동이 생 기면 배우에게 사실을 고지하고,스 케줄에 대해서 논의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규한은 영화제작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 셈이 었다.
해서 이규한이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그래도 연락을 하셨어야죠.”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아까 하정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 을 때,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던 목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이규한은 그가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전화를 걸었던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그런 이규한의 예상대로였다.
“계약 해지를 요청하기 위해서 만 나자고 하신 거죠?”
잠시 후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겪고 있는 상황.
아니,투자 유치가 거의 힘들어진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됐으니 ‘신과 같 이’에 출연하기로 약속한 배우들도 계약 해지를 요구하는 게 당연한 수 순이었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 니까.
특히 하정후는 여전히 충무로 캐스 팅 후보 1순위인 배우였다.
수많은 제작사 대표들이 하정후가 자신들의 작품에 출연해 주길 목을 빼고 기다리는 상황.
그래서 하정후가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가 계약 해지를 요청하기 위함 이라고 이규한은 판단한 것이다.
“이 대표님.”
“말씀하시죠.”
“제가 만나자고 한 건 그 이유 때 문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네.”
“그럼 왜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 “이 대표님이 저와 했던 약속을 지 키지 않아서입니다.”
하정후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 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무슨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는 거지?’
이규한의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때 였다.
“제가 ‘신과 같이’에 출연하는 대 가로 이규한 대표님만이 갖고 있는 영화제작의 노하우를 전수해 주시기 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겁니까?”
하정후가 따지듯이 물었고,이규한 이 억울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그동안 수시로 제 노하우를 전수 해 드렸지 않습니까?”
“부족합니다.”
“부족하다고요?”
“저는 인간의 능력이 위기에 처했 을 때 가장 크게 발현된다고 믿습니 다. 그래서 이규한 대표님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능력을 드러내실지 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이규 한 대표님은 제게 연락을 하지 않았 죠
“그건……
“그래서 제가 더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찾아온 겁니다.”
하정후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 진지한 눈빛을 확인한 이규한이 한숨을 내쉰 후 물었다.
“무엇이 그렇게 궁금하신 겁니까?”
“‘신과 같이’의 투자 유치가 어려 움에 처한 상황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메이저 투자 배급사 에서 투자를 받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니,불가능할 것 같습니 다.”
이규한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하정 후가 두 눈을 빛내며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떤 대책을 갖고 있습니 까?”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신과 같이’의 제작을 포기하시는 겁니까?”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신과 같이’의 투자를 받을 방법 은 없다,그렇지만 아직 ‘신과 같이’ 의 제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 아닙니까?”
“마지막 한 가지 방법이 남았습니 다.”
“어떤 방법입니까?”
“그건 아직 밝히기 어렵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진행이 되고 난 후에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뭡니까?”
“이 최후의 방법은 어쩌면 시도조 차 해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 방법이 있는데 시도조차 못 한 다는 겁니까?”
이규한이 대답했다.
“시간 때문이죠.”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김대환 대표 의 영향력과 입김이 강하다는 것.
막연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 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이 예상했던 것보 다 김대환 대표의 영향력과 입김은 더 강했다.
마지막 보루라고 여겼던 케이 컴퍼 니에서도 투자를 거절당한 순간,이 규한은 국내에서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 후 이규한이 고심 끝에 찾아낸 최후의 방법은… 해외에서 투자를 받는 것이었다.
“‘부산행 열차’가 해외에서도 흥행 하고 나서 한국 영화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했어. 외국 투자자들도 흥미 를 드러내더라고.” ‘부산행 열차’의 흥행을 기념해서 마련된 술자리에서 김태훈이 꺼냈던 말이었다.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 에 이규한은 해외에서 투자를 받아 보자는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그렇지만 해외에서 투자를 받는 것 은 지금껏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 시도하는 터라 여러 시행착오 를 거치다 보면 과정이 무척 지난할 가능성이 높았고,성사 여부조차 확 실치 않았다.
‘문제는 시간이야.’ 이규한이 가장 우려하는 것.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도 시 간은 계속 흐른다는 점이었다.
“시간 때문이라니요?”
제대로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하정 후의 질문을 받고 이규한이 상념에 서 깨어났다.
“제가 최후의 방법을 동원하는 사 이에도 시간은 흐릅니다. 그리고 저 도 처음 시도해 보는 방식이라 이 최후의 방법이 과연 성공할지 또 성 공한다 하더라도 그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미 출연 계약을 맺은 배우들에게 계 속 기다려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제가 찾 아낸 최후의 방법을 시도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던 겁니 다.”
“결국… 스케줄이 문제라는 뜻이군 요.”
“맞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대화 도중에 하정후가 일어섰다.
“왜 일어서십니까?”
“제가 해야 할 일을 찾은 것 같아 서요.”
“네?”
이규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을 짓고 있을 때 하정후가 덧붙였 다.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뭘 해결한단 겁니까?”
“시간이라는 문제요.”
“그 말씀은… 정후 씨의 스케줄을 조정하겠다는 뜻입니까?”
“회사와 얘기해 보겠습니다.”
하정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 다.
그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려는 겁니 까?”
“궁금해졌습니다.”
“뭐가 궁금한 겁니까?”
하정후가 대답했다.
“천하의 이규한 대표님이 찾아낸 최후의 방법이 무엇인지. 또 그 최 후의 방법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어서 오세요.”
청월 빌딩 인근의 단골 선술집으로 이규한이 들어서자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했다.
항상 일행과 함께 찾아왔던 이규한 이 혼자 찾아왔다는 것을 뒤늦게 알 아챈 주인아주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네,혼자입니다. 소주 한 병이랑 어묵탕 하나 주세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먼저 도착한 소주병을 든 이규한이 잔을 채웠다.
첫 잔을 비운 후 이규한이 휴대전 화를 꺼냈다.
김태훈의 연락처를 검색한 이규한 이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가 다시 손
을 거두어들였다.
“헛수고일 수도 있어.”
최후의 방법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 해서는 김태훈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이 통화 버튼을 누 르지 못하고 망설이는 이유는 아직 최후의 방법을 시도할지 여부에 대 한 확신이 없어서였다.
결국 휴대전화를 다시 주머니에 넣 고 소주잔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주머니 속에 넣어 둔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누구지?”
이규한이 휴대전화를 꺼내서 발신 자를 확인했다.
“주태훈?”
주태훈에게서 걸려 온 전화임을 확 인한 이규한이 잠시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태훈 씨?”
“이 대표님,너무 늦게 연락드렸나 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지금 어디세요?”
“밖에 나와 있습니다.” “마침 잘됐네요. 잠깐 만날 수 있 을까요?”
“네,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럼 그렇게 하시죠. 어디서 만날 까요?”
“이 대표님이 계신 곳으로 제가 찾 아가겠습니다.
“여기로 찾아오시겠다고요?”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이 어 디 냐면
선술집의 위치를 주태훈에게 알려 준 후 이규한은 통화를 마쳤다.
다시 소주잔을 채우고 막 들어 올 렸을 때,주인아주머니가 아까 주문
했던 안주인 어묵탕을 갖고 다가왔 다.
“누가 오기로 했나 보네요?”
‘통화하는 것을 들었구나.’
이규한이 속으로 생각하며 대답했 다.
“오늘은 혼자 마시려고 했는데 누 가 찾아오겠다고 하네요.”
“그럴 줄 알았어요.”
“네?”
“혼자서 청승맞게 술을 마시는 것 과 사장님은 어울리지 않거든요.”
주인아주머니가 웃으며 대답한 후 물었다.
‘손님도 없는데 잠깐 앉아도 될까
“네?”
“일행분이 오실 때까지 잠깐 술친 구 해 드려도 괜찮을까 해서요.”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