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반격 (1)
“떠났네.”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 규한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청월 빌 딩에 입주해 있던 블루블랙 필름 사 무실로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조성현 대표를 만날 수는 없었다.
사무실 내부가 텅 비어 있었기 때 문이다.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가 없지.”
곁에 서 있던 황진호가 꺼낸 말을 들은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성현 대표는 작정하고 함정을 팠 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아직 여기 머물고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할머니 말씀이 맞았네요.”
“무슨 뜻이야?”
“제가 자주 가는 포장마차의 주인 할머니께서 절 호구라고 부르시거든 요. 정확하게 보셨네요.”
이규한이 씁쓸한 표정으로 꺼낸 이 야기를 듣던 황진호가 사과했다.
“미안하다.”
“선배가 왜 미안해하는 겁니까?”
“조성현 대표를 돕기 위해 나서는 것을 내켜 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내가 고집을 피워서 이렇게 된 거니 까.”
“선배 탓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미 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고 지금 와서 후회해 봐야 소 용없습니다. 이 함정에서 빠져나갈 대책을 세워야죠.”
“그래야지.”
“가시죠.” 이규한이 앞장서서 블루문 엔터테 인먼트 사무실로 돌아왔다.
“미주 씨,나와 관련한 기사 뜬 것 없어?”
“대표님 기사가 떴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뻔한 수순이니까.”
“네?”
“영화는 현실을 모방해서 스토리를 만들거든. 날 함정에 빠트리는 데 성공했으니까 다음 수순으로 넘어갈 차례거든.”
“ ‘……?" “기사 제목이 뭐야?” “동업자 정신을 망각한 비정한 영 화계의 현실이요.”
“제목 잘 뽑았네. 기사를 쓴 기자 는 누구야?”
“임덕호 기자요.”
김미주에게서 대답이 돌아온 순간 이규한이 황진호와 시선을 교환했 다.
“김대환 대표가 꾸인 일이네요.”
“내가 봐도 그런 것 같네.”
그 대화를 듣던 김미주가 끼어들었 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김대환 대표 가 판 함정이란 걸 어떻게 아신 건
데요?”
“임덕호 기자가 김대환 대표의 최 측근이거든.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 서 투자와 배급을 맡은 작품들을 물 고 빠는 게 특기야. 아마 김대환 대 표에게서 술깨나 얻어먹었을 거야.”
황진호가 대답을 마쳤을 때 이규한 이 고민에 잠겼다.
“다음 수순은 뭘까요?”
“글쎄.”
“만약 저라면… 명분을 만들 겁니 다.”
“명분?”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를 궁지에 몰
아넣을 수 있는 명분이요.”
이규한이 대답을 마쳤을 때였다. 덜컹.
장준경이 사무실 문을 열고 뛰어들 었다.
“규한아,큰일 났다.”
“무슨 일이야?”
“김훙집 대표가 움직였다.”
“김훙집 대표?”
이규한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김흥집은 한국영화 제작자협회의 협회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 거였구나.’ 그런 그가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전 해 들은 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다.
“김홍집 대표가 뭘 했지?”
“공고를 올렸어.”
“무슨 공고?”
“그게……
“괜찮으니까 빨리 말해 봐.”
이규한의 재촉을 받은 장준경이 결 국 입을 뗐다.
“사기 피해가 발생했다고,조심하 라는 공지를 올렸어.”
“그 사기꾼은… 나겠네. 맞아?”
“그래. 맞아.”
이규한이 쓴웃음을 머금은 채 다시 입을 뗐다.
“평소에는 금뱅이처럼 느려 터졌더 니 이번엔 빨리도 움직였네.”
영화제작자들이 점점 열악한 상황 에 몰리고 있음에도 김흥집 대표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움직이 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게 말이다.”
이규한이 그 부분을 지적하자 장준 경이 맞장구를 쳤다.
“그나저나 이건 진짜 너무한 것 아
니냐? 년 호의를 갖고 도와줬는데 조성현 대표는 악의로 갚았잖아?”
“나도 화가 나. 그렇지만 꾹 참고 있어.”
“왜 참는데?”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라 맞서 싸울 때니까.”
“어떻게 맞서 싸울 건데?”
장준경의 질문을 받은 이규한이 대 답했다.
내 편을 이용해야지.” 내 편을 이용해서 맞서 싸우겠다는 계획을 장준경에게 밝혔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막연한 계획 일 뿐이었다.
“계획을 구체화해야 해.”
반격을 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준비 가 필요했다.
-김흥집 대표.
-증인 확보.
-증거 확보 가능할까?
-슈가 필름 고철민 대표?
이규한이 빈 종이 위에 글을 적으 며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지이엉. 지이잉.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발신자가 남지유인 것을 확인한 이 규한이 전화를 받았다.
“지유야,무슨 일로 전화했어?”
“오빠, 지금 어디세요?”
“지금? 할 일이 좀 남아서 아직 사무실이야.”
“그럼 지금 잠깐 좀 내려와요.”
“너 지금 어딘데?”
“청월 빌딩 앞에 막 도착했어요.”
이규한이 전화를 끊고 서둘러 사무 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남지유는 진짜 청월 빌딩 앞에 서 있었다.
“갑자기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 야?”
“꼭 무슨 일이 있을 때만 찾아와야 하나요?”
“그건 아니지만……
“술 한잔해요.”
“술?”
“제가 살게요.”
남지유의 손에 이끌려 청월 빌딩 근처에 위치한 조용한 바(bar)로 향 했다.
조용한 팝송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남지유는 말없이 맥주만 마셨다.
역시 맥주를 마시던 이규한이 남지 유를 살피고 있자 그 시선을 느낀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게……
“바 조명 아래서 보니까 더 예삐 보여요?”
“그래서가 아니라……
“진짜 아니에요?”
짐짓 미간을 찌푸린 채 화난 표정 을 짓고 있는 남지유로 인해 이규한 이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트렸을 때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느냐,이게 궁금한 거죠?”
“그래.”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지유가 찾아온 데는 이유가 있었 다.
그녀 역시 이규한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찾 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남지유는 이규한에게 아 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맥주만 마실 뿐이었다.
그때 였다.
“파이팅.”
남지유가 오른 주먹을 쥔 채 파이 팅을 외쳤다.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파이팅이에요. 내가 아는 오빠라면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지유야.”
“지금 내가 오빠를 위해 할 수 있 는 게 뭐가 있을까? 계속 고민해 봤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 이었어요.”
" f……?"
“심란한 오빠를 위해서 술을 사 주 는 것이요.” 이규한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배신의 상처가 쓰라려서일까.
술이 생각나긴 했었다.
다만,혼자 마시는 것이 내키지 않 아서 참고 있었는데.
남지유 덕분에 조용히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끝까지 오빠 곁 에 있어 줄게요.”
남지유가 말을 더했다.
“고맙다. 그걸로 충분해.”
이규한이 맥주를 마신 후 덧붙였 다.
“덕분에 다시 힘이 난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는 영화제작사 치고는 사무실이 꽤 넓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사무실 내부가 꽉 찼다.
청월 빌딩에 입주해 있는 영화제작 사들의 대표와 직원들이 모두 집결 했기 때문이다.
“다들 바쁘신데 이렇게 모여 달라 고 부탁드려서 죄송합니다.”
이규한이 운을 떼자 블루문 엔터테
인먼트에 모인 제작자들이 앞다투어 말했다.
“아무리 바빠도 할 일은 해야죠.”
“이 대표가 모함을 받고 있는데 우 리가 모른 척하면 되나?”
“우리가 이 대표한테 받은 도움이 얼마인데. 당연히 도와야지.”
그 이야기들을 듣던 이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제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됐습 니다. 이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서는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 다.”
가 손을 들고 물었다.
“저희가 어떻게 도우면 됩니까?”
“중인이 돼 주십시오.”
“무슨 증언을 하면 됩니까?”
“그날 옥상에서 있었던 일을 본 대 로 증언해 주시면 됩니다.”
그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젊은 여 성이 손을 들었다.
‘누구지?’
여자의 얼굴이 낯설다는 생각을 이 규한이 했을 때였다.
“플랫폼 엔터테인먼트에서 근무하 는 정유리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죠?”
“제가 그날 동영상을 찍었어요.”
“동영상… 이요?”
“그날 옥상에서 벌어졌던 일을 녹 화해 뒀어요.”
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다.
당시 청월 빌딩 옥상에서 벌어졌던 소동이 녹화된 영상이 이번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될 거 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영상을 보내 주실 수 있나요?” “네,보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큰 도움이 될 것 같 습니다.”
이규한이 인사할 때 장준경이 끼어
들었다.
“정흥채 대표님,직원 잘 뽑으셨네 요.”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거든. 우 리 조카가 똑똑해.”
플랫폼 엔터테인먼트 정흥채 대표 가 껄껄 웃은 후 질문했다.
“또 우리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게 없을까?”
그 질문을 받은 이규한이 입을 뗐 다.
“혹시 슈가 필름 고철민 대표님을 아시는 분이 계신가요?”
잠시 후 블러드 필름의 장형식 대 표가 손을 들었다.
“슈가 필름 고철민 대표는 내가 잘 알아요. 그런데 고철민 대표의 이름 이 왜 갑자기 나오는 거예요?”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말씀드리겠 습니다. 혹시 고철민 대표님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실 수 있 습니까?”
“누구 부탁인데 안 들어줄까요.” 장형식 대표가 웃으며 덧붙였다.
“언제 자리를 마련할까요?”
이규한이 대답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서는 김태훈 을 발견한 이규한이 자리에서 일어 났다.
“이 대표.”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NEXT 엔터테인먼트 투자팀장에서 임원으로 승진한 김태훈에게 이규한 이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렇지만 김태훈의 표정은 밝아지 지 않았다.
“지금 내 승진을 축하할 때야? 대
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미 기사까지 나온 상황.
김태훈도 이번 사건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나온 후였다.
“함정에 빠진 것 같습니다.”
“함정? 누가 함정을 팠는데?”
“김대환 대표가 판 함정인 것 같습 니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김대환 대 “네.”
“위험하네.”
김태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김대환 대표가 갖고 있는 힘이 막 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
“오억만 융통해 주십시오.”
“오억? 내가 그런 큰돈이 어딨어?” 김태훈이 난색을 표했다.
“돈을 빌려 달라는 것이 아닙니 다.”
“그럼?”
“투자를 해 달라는 겁니다.”
“무슨 투자?”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억을 투 자하는 것처럼 연기를 해 주십시
“연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김태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으로 질문했다.
“김훙집 대표에 대해서는 알고 계 시죠?”
“당연히 알지.”
“김훙집 대표와 김대환 대표가 절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 손을 잡은 것 같습니다.”
“자세히 말해 봐.”
“김훙집 대표는 한국영화 제작자협 회장 직책을 이용해서 저를 제명하 려 할 겁니다. 그게 김흥집 대표의 권한으로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징 계이니까요.”
“이 대표를 제명한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김대환 대표가 움직일 명분을 만 들 수 있죠.”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