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함정 (3) ‘가능할까?’
이규한 역시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 다.
만약 이규한이 ‘불야성’을 위해 나 선다고 하면 조성현 대표는 희망을 가질 것이다.
성’이 투자를 유치하는 데 실패한다 면?
조성현 대표의 상실감은 더욱 클 터였다.
간신히 품었던 희망이 물거품이 되 는 셈이었으니까.
‘어느 쪽이 옳을까?’
선택을 내리는 것이 결코 쉽지 않 았다.
그래서 이규한이 장고에 잠겼을 때 였다.
“난 이 대표가 조성현 대표를 도와 줬으면 좋겠어.”
황진호가 침묵을 깼다.
“하지만……
이규한이 난색을 표한 순간 황진호 가 덧붙였다.
“예전의 날 도와줬던 것처럼.”
“제가 나선다고 해서 ‘불야성’의 투자가 성사된다는 보장은 없습니
다. 그리고 그때는 조성현 대표가 ?????? ”
“더 실망할까 봐 무섭다는 거지?”
“네.”
“그건 홋날의 일이야.”
황진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입을 뗐다.
“‘지옥도’가 흥행에 참패했을 때
난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어. 과연 내게 다음이 있을까? 재기할 수 있 을까? 전혀 희망이 안 보였거든. 만 약 그때 이 대표가 내 앞에 불쑥 나타나서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면 난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어.”
예전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회상하 는 황진호에게 이규한이 멋쩍은 표 정으로 말했다.
“저는 빚을 갚은 거라니까요.”
“모르겠어.”
“뭘 모르겠단 뜻이세요?”
“이 대표가 내게 진짜 빚을 졌나? 그 후로 계속 고민해 봤는데,이 대 표가 나한테 갚을 빚은 없는 것 같 더라고.”
황진호의 입장에서는 모를 수밖에 없다.
이규한이 그에게 빚을 진 것은 기 적이 일어나며 과거로 돌아오기 전 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황진호가 당시의 이야기를 꺼낸 탓에 이규한은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또 빛이 나네요.”
“무슨 빛?”
“성인군자에게서만 나는 후광이 “미주 씨,오버다.”
“오버 아닌데요. 미담 제조기가 따 로 없네요.”
김미주가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 다. 그리고 백진엽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애사심 풀 충전입니다.”
이규한의 얼굴이 달아올랐을 때 황 진호가 덧붙였다.
“중요한 건 ‘불야성’의 투자 유치 를 성사시키느냐 여부가 아냐.”
“그럼 뭐가 중요한 건데요?”
“일단 조성현 대표에게 희망을 심 어 주는 게 중요해. 내일이 없는 사
람이 니까.”
“내일이… 없는 사람이라.”
그 표현이 무척 와 닿는다는 생각 을 하고 있을 때,황진호가 다시 말 했다.
“이 대표가 손을 내밀어 주는 것만 으로도 조성현 대표는 희망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규한이 말하자 조성현 대표의 표
정이 밝아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하지만 제가 나선다고 해서 ‘불야성’이 투자를 받는 데 성공한 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저는 이 대표님을 믿습니다.”
‘저를 너무 믿지 마세요.’
이규한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
그렇지만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조성현 대표가 다시 찾은 희망의 불씨를 꺼트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공동 제작 방식으로 진행하시죠.” 잠시 후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공동 제작을 하다가 한 차례 배신 을 당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공동 제작을 하는 것 이 내키지 않았지만,현실적으로 달 리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수익 배분 비율은……
“9 대 1로 하시죠.”
이미 이런 전개를 예측한 듯 조성 현 대표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블루블랙 필름이 9,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1로 합의하 시죠.” 애초에 ‘불야성’을 흥행작으로 만 들어서 수익을 거두고 싶다는 욕심 이 없었다.
그래서 이규한이 흔쾌히 수락했을 때였다.
“반대입니다.”
조성현 대표가 틀렸다고 지적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수익 배분 비율에서 블루문 엔터 테인먼트가 9, 블루블랙 필름이 1을 갖는 게 맞다는 뜻입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깜짝 놀랐다.
“일전에 조 대표님도 말씀하셨다시 피 ‘불야성’이란 작품은 조 대표님 께서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준비해 오셨던 작품입니다. 그리고 자식 못 지않게,아니 자식보다 더 소중한 작품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 니 그런 수익 배분 비율은 말도 안 됩니다.”
이규한이 만류했지만 조성현 대표 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도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이요?”
“작품이 제작돼서 개봉하느냐 여부 를 가르는 것은 그 작품에 들인 노 력과 시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들인 7년의 시간보다 이규한 대표님께서 투자하 시는 한 달의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그래서 드리 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까 이 대표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불야성’이란 작품은 제게 자식보다 더 소중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능력 없는 부모를 만나서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죠.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는 떠나보내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규한 대표님 이라면 믿고 제 자식을 보낼 수 있 습니다. 저는 제 작품이,아니 이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는 것만으로 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그럼… 8 대 2로 하시죠.”
“아니요. 9 대 1로 하는 게 맞습니 다. 그리고 수익 배분 비율을 이렇 게 해야 제가 이 작품에서 정을 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성현 대표의 뜻은 완강했다.
그로 인해 이규한이 더 버티지 못 하고 수락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렇 게 하겠습니다.”
공동 제작 시 수익 배분 비율에 대한 의견 조율을 마치고 난 후 이
규한이 다음 수순으로 넘어갔다.
“제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 서 시나리오 수정 작업을 하면서 동 시에 투자사와 접촉하려고 합니다. 혹시 원하시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 해 주시죠.”
“없습니다.”
“네?”
“특별한 의견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니, 제 의견 따위는 중요치 않습 니다. 이 대표님에게 입양을 보낸 셈이니 뜻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이 일어섰다.
그 모습을 확인한 조성현 대표가 당황하며 물었다.
“왜 벌써 일어나십니까?”
이규한이 대답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NEXT 엔터테인먼트 투자팀 사무 실.
이규한이 들어서자 김태훈이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이 대표가 연락도 없이 어찐 일이 야?”
“연락을 안 주셔서 왔습니다.”
“응?”
“시나리오 보낸 지 한참 됐는데도 연락을 안 주시더라고요.”
이규한이 설명하자 김태훈이 억울 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되긴 뭐가 한참 됐다는 거 야. 내가 정확히 시나리오 보낸 날 짜도 기억한다. 아직 사흘밖에 안 됐거든.”
“읽긴 하셨죠?”
“제가 보내는 작품은 최우선으로 읽고 검토하겠다고 지난번에 말씀하 셨잖습니까?”
“기억력도 좋네.”
“읽긴 하셨다고 하니까 들어가서 얘기 좀 하시죠.”
“그건 문제가 없는데… 왜 이렇게 서둘러?”
“제가 서두르는 것 같나요?”
“그래. 유난히 서두르는 것 같아.”
“시간이 없거든요.”
“왜 시간이 없어?”
“그럴 말한 사정이 있습니다.” 자세한 사정까지 밝히기는 곤란했 다.
그래서 대충 얼버무리자 김태훈도 더 캐묻지 않고 팔을 끌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회의 실 비었으니까 들어가서 얘기하자.”
“네.”
“아니다. 아직 할 일이 남았구나.”
“무슨 할 일이요?”
“소개.”
씩 웃으며 대답한 김태훈이 언성을 높였다.
“자,모두 주목.” 투자팀 직원들의 이목이 쏠린 순간 김태훈이 물었다.
“내가 투자팀 직원에게 가장 중요 한 게 뭐라고 했지?”
“작품의 흥행이요.”
“정답. 그럼 흥행할 작품을 알아보 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 다.”
‘교육 잘 시켰네.’
한목소리로 대답하는 투자팀 직원 들을 확인한 이규한의 입가로 희미 한 미소가 떠올랐을 때,김태훈이 말을 이었다.
“그래. 대표님의 아들이 투자 심사 를 넣어도,내 지인이 투자 심사를 넣어도 무시하고,시나리오의 완성 도,캐스팅된 배우,연출할 감독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라고 했어. 그런데 딱 한 사람 예외가 있 어. 누군지 알아?”
지난 두 차례 질문했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투자팀 직원들에게서 대답 이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지?’
이규한 역시 호기심을 품었을 때였 다.
뒤늦게 김태훈의 의도를 간파한 이 규한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을 때 였다.
“팀장님 옆에 계신 분이 누구신데 요?”
투자팀 직원 가운데 한 명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이규한 대표 야.”
김태훈이 이규한을 소개하자 투자 팀 직원들이 탄성을 토했다.
“아,저분이 이규한 대표님이시구 나.”
“영광입니다.”
“영화 잘 봤어요.”
그때 김태훈이 덧붙였다.
“더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겠지?” “네. 필요 없습니다.”
“그럼요.”
“얼굴 잘 기억했다가 VIP, 아니 VVIP로 대접해.”
직원들에게 이규한의 소개를 마친 김태훈이 그제야 회의실로 들어갔 다.
회의실로 따라 들어간 이규한이 탓 했다.
“사람 민망하게 갑자기 왜 소개를 하고 그러세요?” “내가 없을 때를 대비해서 그랬 어.”
“네?”
“사람 인생 모르는 거잖아. 내가 투자팀장 직책에서 물러나면 저들 중 한 명이 내 자릴 맡을 거야. 그 때를 대비해야지.”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그 이유가 대체 뭔데요?”
“곧 인사 발령이 날 것 같아.”
“ <……?"
김태훈이 씨익 웃으며 덧붙인 이야 기를 듣고서야 상황을 파악한 이규 한이 뒤늦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오히려 내가 고맙다.”
“왜요?”
“네 덕에 승진하는 거니까.” 김태훈은 빈말을 한 게 아니었다. NEXT 엔터테인먼트 투자팀장에 오른 후 김태훈이 보인 성과는 무척 훌륭했다. 그리고 그가 올린 성과에 는 이규한의 기여도도 컸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고
NEXT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와 배 급을 맡았던 작품들이 모두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특히 ‘부산행 열차’의 흥행이 김태 훈의 승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 리라.
국내시장은 물론이고 해외시장에서 도 흥행에 성공한 덕분에 NEXT 엔터테인먼트도 투자 대비 엄청난 수익을 거뒀으니까.
‘그래서 얼굴이 편해 보였구나.’
이규한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메이저 투자 배급사 투자팀장은 막 강한 권력을 손에 쥔다.
그렇지만 덩달아 책임도 커진다.
투자한 작품이 흥행에 실패했을 경 우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고,가 장 먼저 희생양으로 지목되는 것은 투자팀장이다.
괜히 투자팀장이 파리 목숨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그러나 임원으로 올라서면 상황이 다르다.
권력은 줄지만 책임도 동시에 준 다.
쉽게 말해 파리 목숨에서 벗어나 철밥통이 되는 셈이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