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함정 (2)
“왜 저러는지 속사정을 아십니까?”
“얼마 전에 저녁 먹으러 식당에 찾 아갔다가 우연히 만나서 같이 소주 를 한잔했어. 그때 들어 보니 사정 이 딱하더라고. 월세가 밀려서 집에 서 쫒겨 날 판국이고,와이프도 허 리디스크 때문에 일을 관뒀다고 해. 수입이 없으니 매일 싸우는 게 일상이고,그 생활에 지친 와이프가
이혼 서류를 갖고 왔대.”
황진호의 설명을 듣던 이규한이 슬 쩍 눈살을 찌푸렸다.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 이다.
‘예전의 나와 비슷하네.’
사채업자들의 빚 독촉,서로를 탓 하고 원망하며 매일 싸우다가 결국 이혼 서류를 갖고 온 아내 그리고 딱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현 실까지.
당시의 이규한은 막막한 심정이었 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심정이었달까.
아마 지금 조성현 대표도 당시의 이규한과 비슷한 심정일 것이리라.
그래서 안타까운 시선을 던지던 이 규한이 나섰다.
“조 대표님.”
“누구야?”
“이규한입니다.”
“아,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이규한 대표님!”
“일단 내려오시죠. 너무 위험하니 내려오셔서 얘기하시죠. 지금 많이 힘드시다는 것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행동을 하시는 것은 아 무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대화를
하다 보면 해결책을 찾을 수……
“몰라요.”
“네?”
“이규한 대표님은 지금 내가 얼마 나 힘들지 모른다고요. 승승장구하 는 대한민국 최고의 제작자가 밑바 닥 인생을 사는 내 심정을 어떻게 알아요?”
조성현 대표가 악다구니를 쓰듯 소 리 쳤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고개를 흔들었 다.
“압니다.”
“모른……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 으니까요.”
“일단 버티다 보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 다. 그러니 일단 내려와서 얘기하시
죠
조성현 대표가 소매를 들어 눈물을 홈쳤다.
꿀꺽꿀꺽.
소주병을 입에 대고 들이부은 그가 결심을 굳힌 둣 물었다.
“정말 약속할 수 있소? 날 도와주 겠다고 약속한 거요.”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여기 중인이 많지 않습니까? 그리 고 저는 빈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알겠소. 그럼 이 대표의 약속을 믿고 내려가겠소.”
조성현 대표가 옥상 난관에서 마침 내 내려온 순간 이규한이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십니까?”
이규한이 그의 앞으로 다가가 물었 다.
자신이 벌인 일이 부끄러워서일까. 조성현 대표가 고개를 모로 돌려
이규한의 시선을 피한 채 대답했다. “진짜 약속한 겁니다.”
블루블랙 필름.
잠금장치를 해제한 조성현 대표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안으로 들어선 이규한의 시 선이 가장 먼저 창가 쪽에 놓인 간 이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옷걸이 위 에 아무렇게나 놓인 옷가지들을 바 라보던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며 물 었다.
“집에는 안 들어가십니까?”
“가 봐야 싸움이니 그냥 여기서 지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다가는 몸이 축난다고 조언하 려던 이규한이 도중에 입을 다물었 다.
조성현 대표는 죽을 각오로 건물 옥상 난간에 올라섰던 사람이다.
지금 본인의 몸이 상하는 건 안중 에도 없으리라.
결국 이규한이 지갑에서 오만 원권 지폐 몇 장을 꺼내서 조성현 대표에 게 내밀었다.
“사우나에서 목욕부터 하시고 오늘 은 호텔에서 주무세요.”
그렇지만 조성현 대표는 돈을 받는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이 대표님께 바란 도움은 이 런 게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다시 만나서 얘기하시죠.”
“아니요. 지금 얘기하고 싶습니다.”
조성현 대표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 았다.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이규한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사무 실 중앙에 위치한 원형 탁자에 앉으 며 물었다.
“제가 뭘 어떻게 도우면 되겠습니
까?”
조성현 대표는 대답 대신 책상 서 람에서 시나리오 책을 꺼낸 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불야성’.
시나리오 책 위에 적힌 제목을 이 규한이 살피고 있을 때,조성현 대 표가 입을 뗐다.
“제 인생에서 7년의 시간을 이 작 품에 쏟았습니다. 피와 땀, 눈물 그
리고 불운했던 인생까지도 모두 ‘불 야성’에 담겨 있죠. 제게는 자식보 다 더 소중한 작품입니다.”
이야기를 꺼내는 조성현 대표의 눈 시울은 붉게 변해 있었다.
“제게는 자식보다 더 소중한 작품 입니다.” 이 한마디에 조성현 대표 가 ‘불야성’이란 작품을 얼마나 소 중히 여기는지가 담겨 있었다.
이규한 역시 제작자였기 때문에 조 성현 대표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있 었다.
난산 끝에 얻은 자식,말이 통하지 않는 자식과 씨름을 하고,걸음마를 시작한 자식을 대견하게 바라보고, 이제는 어엿이 대화가 가능해진 자 식의 모습.
무려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희로 애락을 함께 하며 애정을 쏟아부었 기에 ‘불야성’이란 작품이 자식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손가락질합니 다. 못났다고,부족하다고 수군거립 니다. 그리고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서 내 자식이 형편없다고 욕합니다. 저는 그게 너무 미안합니다. 못난 부모라서 미안해 죽겠습니다.”
‘투자사 직원들.’
‘불야성’이란 작품에 손가락질하고 형편없다고 욕한 것은 투자사 직원
들이리라.
그들의 일은 평가를 하는 것.
‘불야성’이란 작품을 어느 누구보 다 냉정하게 평가했으리라.
그들에게는 누군가의 자식처럼 소 중한 작품이 아니라 검토를 해야 할 수많은 작품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 까.
그러나 그들이 무심코 내뱉는 말은 비수나 다름없다.
그 비수는 작품의 부모나 다름없는 제작자에게 아픈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부탁은 제 자식을 살려 달라는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픔니다. 많이 아파서 힘들어합 니다. 제 힘으로는 이 녀석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명의의 도움 이 필요합니다.”
“그 명의가… 저란 뜻입니까?”
“네. 이 대표님 외에는 다른 사람 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조성현 대표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을 들은 이규한이 한숨 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키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성현 대표의 붉어진 눈 시울을 보니 안타까웠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거절한다면 조 성현 대표가 또다시 극단적인 선택 을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컸다.
‘일단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 결심을 굳힌 이규한이 입을 뗐다.
“최대한 빨리 검토해 보고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회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블루블랙 필름 역시 청월 빌딩에 입주해 있는 제작사 가운데 하나.
이규한을 비롯한 블루문 엔터테인 먼트 직원들도 블루블랙 대표인 조 성현 대표와 서로 안면을 트고 인사 를 건네는 사이였다.
또 넓게 보면 같은 업종에 종사하 는 동반자였다.
그런 조성현 대표가 간밤에 극단적 인 선택을 할 각오로 옥상 난간에 올라갔다는 사실에 모두 충격을 받 은 것이다.
“어제 일로 인해 대표님이 새삼 대 단하게 느껴졌어요.”
김미주가 침묵을 깨며 꺼낸 말을 들은 이규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 다.
“무슨 뜻이야?”
“작품 하나를 세상에 내놓는 게 또 그 작품이 잘되게 만드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데,대표님은 그 어려운 일을 매년 해내시잖아요.”
“운이 따랐을 뿐이야.”
이규한이 공을 운으로 돌렸지만, 이번에는 백진엽이 나섰다.
“운도 실력이죠. 그래서 애사심이 더 생겼습니다.”
“그만하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힘든 순간을 보내는 사람에게는 시 간이 더디게 가는 법이었다.
지금도 조성현 대표는 초조한 마음 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이규한이 농담을 이어 가는 대신 서둘러 회의로 돌입했다.
“진호 형부터 하죠. ‘불야성’ 어떻 게 보셨어요?”
“나쁘지 않았어.”
“나쁘지 않았다?”
“조성현 대표가 7년 동안 매달려서 공을 들였다는 게 책을 읽는 내내 느껴졌어. 군더더기도 없는 편이라 책도 잘 읽혔고. 그런데 좋지도 않 았어.”
황진호의 평가.
애매하다는 뜻이었다.
“어떤 부분이 애매했습니까?”
“구성도 잘 짜여 있고,캐릭터들도 나쁘지 않아. 그런데 막상 내가 투 자자라면 선뜻 투자를 결정하지 못 할 것 같아.”
“매력이 없다는 뜻이죠?”
“비슷해. 뭐랄까. 확 끌어당기는 느 낌이 없어.”
이규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있어.’
황진호가 직접 제작했던 ‘지옥도’ 는 흥행에 참패했다.
그렇지만 본인의 작품이 아닌 남의 작품을 보는 황진호의 눈은 정확했 다.
장기판에 직접 앉아서 장기를 둘 때보다 훈수를 둘 때 더 잘 보이는 것과 비슷한 케이스였다.
이규한 역시 ‘불야성’을 읽고 난 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잘 쓴 시나리오인데,매력 이 느껴지지 않았다.
“글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투 자는 못 하겠습니다.”
“조금만 더 수정해 보세요. 수정고 를 보고 난 후에 투자 결정을 하겠 습니다.”
“잘 모르겠네요. 그냥 좀 애매해 요.”
투자사 직원들도 아마 ‘불야성’을 읽고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테고, 조성현 대표에게 이런 평가를 남겼 으리라.
그리고 이런 애매모호한 평가가 제 작자를 미치게 만드는 법이다.
명확한 문제점을 알려 주지 않기 때문에 어느 부분을 수정해야 할지 조차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에도 시간은 흐른다.
그렇게 7년이란 시간이 쌓인 후 조성현 대표는 벼랑 끝에 선 것이었 다.
‘난 감정이란 능력이 있었기 때문 에 문제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이규 한이 슬그미니 손을 뻗어 ‘불야성’ 의 시나리오 책을 집어 들어 보았 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지만 역시 나였다.
앞에 감정 결과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쉽네.’
만약 감정이란 특수한 능력을 여전 히 사용할 수 있었다면?
좀 더 쉽게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을 거란 아쉬움이 깃들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이규한은 이내 미련을 떨쳤 다.
더 이상 감정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 적응해야 했다.
“태열 선배 생각은 어때요?”
“내 의견도 비슷해.”
“그래요?” “내가 걱정하는 부분은 다른 지점 이야.”
“어떤 부분이 걱정이죠?”
하태열이 대답했다.
“시간.”
현재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준 비하는 작품은 ‘신과 같이’ 한 편뿐 이었다.
그렇지만 ‘신과 같이’라는 작품에 는 특수성이 있었다.
바로 시리즈로 제작된다는 점이었 다.
당장 1편과 2편을 동시에 촬영해 야 하는 만큼 두 편을 제작하는 것
이나 마찬가지였다.
‘길어야 한 달 남짓.’
이규한이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 했다.
주연배우로 합류할 주태훈과의 계 약이 미뤄진 탓에 아직 ‘신과 같이’ 는 본격적인 투자 심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주태훈의 전속 계약이 끝나 고 계약서를 작성할 때까지는 약 한 달 남짓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즉,이규한이 ‘불야성’이란 작품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한 달이란 뜻이었다.
하태열 역시 이런 상황에 대해 알 고 있었기 때문에 우려를 드러 낸 것이었다.
“조성현 대표가 7년 동안 매달렸어 도 투자를 못 받았어. 그런데 고작 한 달 안에 투자 유치라는 성과를 낼 수 있을까?”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