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함정 (1)
김대환이 포장마차로 막 들어서려 고 할 때 김흥집이 물었다.
“여기서… 드실 겁니까?”
고개를 돌린 김대환의 눈에 살짝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김홍집이 보 였다.
“왜? 여기서 마시면 안 되나?”
“그건 아니지만……
“난 여기가 마음에 드네.”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곰장어 냄새가 아주 구수하니 좋네요.”
김흥집이 금세 표정에서 실망한 기 색을 지우고 포장마차로 따라 들어 갔다.
“주문은……?”
“자네가 알아서 주문하게.”
“여기 곰장어랑 계란말이 그리고 소주 한 병.”
메뉴판을 살피며 주문을 하는 김홍 집에게 김대환이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다.
한 인간,’
자신의 앞에서 김흥집은 제대로 눈 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당장 포장마차에서 주문을 할 때 주인에 게 하대를 했다.
김흥집의 직책은 한국영화 제작자 협회장.
포장마차에서도 이러한데 그간 힘 없는 영화제작자들에게는 어떻게 대 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렇지만 김대환은 김흥집을 탓하 지 않았다.
그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잔 받으십시오.” 김흥집이 따르는 술을 받으며 김대 환이 말했다.
“이억 정도면 되겠나?”
예상보다 빠르게 본론으로 진입해 서일까.
살짝 당황한 기색의 김흥집이 자신 의 앞에 놓인 잔을 채우며 대답했 다.
“조금 더 투자를 해 주실 수 없습 니까?”
“제가 큰소리를 쳐 둔 상태라서 말 입니다.”
‘뒷돈을 꽤 받았나 보군.’ 김대환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한국영화 제작자협회장인 김홍집은 영화제작자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서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가진 쥐꼬리만 한 권력을 이용해 사익을 채웠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슈가 필름이란 영화제작사.
김대환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 었다.
신생 영화제작사이거나 영세한 영 화제작사일 터.
그리고 김흥집은 슈가 필름에서 제 작을 준비 중인 ‘파란만장’이란 작
품의 부분 투자를 요청했다.
단순한 호의로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아니었다.
김흥집이 슈가 필름 대표에게서 뒷 돈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부탁을 하 는 것이었다.
“오억을 투자하지.”
“방금… 얼마라고 하셨습니까?”
“오억이라고 했네.”
이억 오천 혹은 삼억 정도를 예상 했기 때문일까.
김대환이 ‘파란만장’이란 작품에 오억을 투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김흥집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후,김흥집의 눈동자가 빠르 게 굴러갔다.
‘돈을 더 뜯어낼 궁리를 하는군.’
내가 나선 덕분에 무려 오억이나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그러니 내 게 성의 표시를 더 해야 하지 않겠 느냐?
아마 김홍집은 지금 머릿속으로 이 런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네.”
김대환이 술잔을 비운 후 입을 뗐 다.
“어떤 조건입니까?”
“자네가 할 일이 있네.”
“제가 할 일이요? 무엇입니까?” “이규한을 견제해야겠네.”
“이규한이라면… 블루문 엔터테인 먼트의 이규한 대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네.”
“갑자기 왜……?”
“지금 모른 척하는 건가?”
“ 9”
“소문을 듣지 않았나?”
‘어메이징 히어로즈’에 관한 소문 은 이미 널리 퍼진 상황.
일수록 소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법이었다.
그러니 김흥집이 ‘어메이징 히어로 즈’에 관한 소문을 들어 보지 못했 을 리 없을 거란 김대환의 예상은 적중했다.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제작이 중 단되면서 씨제스 엔터테인먼트가 큰 손해를 봤다는 소문은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게 다인가?”
“처음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제작 에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의 이규한 대표가 관여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 니다.”
“관여 정도가 아니었네. 주도적으 로 제작을 진행했지. 그리고 날 엿 먹였던 것도 이규한의 작품이지.”
자신의 입에서 이런 표현이 튀어나 올 것을 예상치 못했을까.
김흥집이 홈칫 놀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네. 이규한이 의도적으 로 날 엿 먹였네. 그래서 막대한 손 해를 감수하고,‘어메이징 히어로즈’ 를 원점에서부터 새로 제작할 수밖 에 없었지.”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들렸다.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는지 의도를 파악하려는 김흥집의 의도가 눈에 훤히 보였기에 김대환이 덧붙 였다.
“난 받은 걸 돌려주고 싶네. 그래 서 영화계에서 이규한이 설 자리가 없도록 만들 걸세.”
“어떻게 말입니까?”
호기심을 드러내는 김흥집에게 김 대환이 말했다.
“방법은 내가 준비해 뒀네. 자넨 내가 지시하는 대로만 움직이면 되 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 다.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엘리베이터 에서 나오던 조성현이 자신을 발견 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대표님!”
“오랜만일세.”
“왜 나와 계십니까?”
“자넬 기다리고 있었지.”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성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후 김대환 이 말했다.
“자,방에 들어가서 얘기하세.”
“이렇게 따뜻하게 맞아 주셔서 감 사합니다.”
조성현과 함께 방으로 돌아간 김대 환이 소파 상석에 앉으며 자리를 권 했다.
“앉게.”
“네.”
“이게 얼마 만이지?”
“7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그새 그렇게 시간이 흘렀나?” 김대환이 희끗하게 변한 머리카락 을 쓸어 올리며 물었다.
“자네 회사의 이름이 뭐였지?”
“블루블랙 필름입니다.”
“맞아. 듣고 나니 기억이 나는군. 그때 우리 회사에서 투자를 받았던 작품의 제목이 ‘소환’이었던가?”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감사씩이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소환’을 개봉 한 후에 대표님을 다시는 못 될 줄 알았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나?”
“‘소환’의 흥행 성적이 워낙 신통
치 않아서……
조성현이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 한 채 대답했다.
“그때 관객이 얼마나 들었지?”
“오십만 조금 못 미쳤습니다.”
‘47만 명.’
김대환은 ‘소환’의 최종 스코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성현에게 물 은 데는 이유가 존재했다.
김대환의 입장에서 ‘소환’이란 작 품은 그동안 투자했던 수많은 작품 가운데 흥행 성적이 신통치 않았던 한 작품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조성현의 입장은 달랐다.
그에게 ‘소환’은 영화제작자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작했던 작품 이었다.
그만큼 애증이 많을 수밖에 없는 작품.
김대환이 조성현이 제작했던 ‘소 환’이란 작품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 실은,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 은 그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갈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군.”
김대환이 말하자 조성현이 쓴웃음 을 지은 채 대답했다.
“언젠가는 다시 기회가 찾아올 거 란 믿음을 가진 채 작품 준비를 했 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다시 기회는 오 는 법이네.”
“감사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꽤 흥미롭더 군.”
“ ……?"
“이번에 자네가 투자 심사를 넣었 던 ‘불야성’이란 작품 말일세.”
김대환이 ‘불야성’이란 작품을 언 급하자 조성현이 두 눈을 빛냈다.
“직접 읽어 보셨습니까?” “물론 읽어 봤네.”
“어땠습니까?”
“자네가 그동안 열심히 했다는 게 느껴지더군.”
김대환의 칭찬을 들은 조성현의 표 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를 유치하는 데 있어서 김대환이 미치 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네.”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말씀해 주 시면 최선을 다해서 보완하겠습니 다.” “보완이 라.”
조성현 대표가 부족한 부분을 보완 하겠다고 말했지만,김대환은 마뜩 잖은 표정을 지었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으로는 힘들 것 같네.”
“투자가 어렵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네.”
조성현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지 는 걸 살피던 김대환이 자리에서 일 어섰다.
책상 서랍에서 한 권의 시나리오 책을 꺼낸 후 김대환이 다시 소파 상석으로 돌아왔다.
“김덕원 팀장과 친한 사이인가?”
“대학교 1년 선배입니다.”
“김 팀장에게 요새 자네가 처한 상 황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조금 곤란한 상황에 처하긴 했습 니다.”
‘조금이 아니지.’
조성현은 ‘소환’ 이후 더 이상 작 품을 제작하지 못했다.
당연히 경제적으로 쪼들릴 수밖에 없었고,그로 인해 이혼을 당할 위 기에 처했다는 것을 김대환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김대환이 조성현을 부른 이 유도 이런 사정에 대해서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일단 이걸 한번 보게.”
“무슨 책입니까?”
“윤정빈 감독에 대해서 들어 봤 나?”
“물론 들어 봤습니다. 재작년에 상 업 영화 데뷔작인 ‘피스톨’로 오백 만 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 모은 감 독이지 않습니까?”
“잘 알고 있으니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 이건 윤정빈 감독이 차기작 으로 쓴 시나리오일세. 이 작품을 블루블랙 필름에서 제작해 보는 게 어떤가?” “윤정빈 감독의 차기작을 자네가 제작해 보는 게 어떤지 의향을 물었 네. 투자는 우리가 하도록 하지.”
비로소 말뜻을 이해한 조성현이 시 나리오 책을 받기 위해서 앞으로 손 을 내밀었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불쑥 찾아왔다 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진 것이리라.
그렇지만 조성현의 손은 시나리오 책에 닿지 못했다.
김대환이 슬쩍 뒤로 뺐기 때문이 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네.”
“제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조성현이 간절한 눈빛으로 물은 순 간 김대환이 대답했다.
“쇼를 하게.” “저녁 드시러 같이 가시죠.”
이규한이 제안하자 황진호가 바로 콜을 외쳤다.
‘반주 해도 되지?”
“그럼요.”
“사거리에 중국집 새로 오픈했더 라. 거기서 먹자. 오늘따라 고량주가 당기네.”
“알겠습니다.”
이규한이 흔쾌히 수락하고 막 사무 실을 빠져나갔을 때였다.
“난리 났어!”
“무슨 일인데?”
“옥상에 사람이 있대.”
“누구?”
“나도 모르지. 빨리 올라가서 확인 해 보자.”
“뛰어내리겠다고 지금 난리도 아니 래.”
청월 빌딩에 입주해 있는 제작자들 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일단 올라가 보시죠.”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이규 한이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옥상에 올라가자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장형식 대표를 발견한 이규한이 상 황을 물었다.
“아. 이 대표님,큰일 났습니다.”
하얗게 질린 장형식 대표의 낯빛이 상황의 위중함을 알려 주고 있었다.
“조성현 대표 아시죠?”
“블루블랙 필름의 조성현 대표님이 요?”
“네,그 친구가 지금 저기 서 있습 니다.”
장형식 대표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 향으로 이규한이 고개를 돌리자 옥 상 난간에 위태롭게 올라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조성현 대표님이 왜 저기 계신 겁 니까?”
“죽겠다고 저러고 있습니다.”
“네? 왜요?”
“이유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장형식 대표에게서 대답이 돌아온 순간이었다.
“어,어!”
“안 돼!”
“위험해!”
다급한 경호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 왔다.
서둘러 고개를 돌린 이규한의 눈에 난간 위에 서 있던 조성현 대표가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모습이 보였 다.
다시 균형을 잡은 조성현 대표를 확 인하고 이규한이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저 양반도 속이 문드러졌나 보 네.”
황진호가 안타까운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