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마음이 건네는 속삭임 “예전부터 인연이 있었느냐는 말씀 이시죠?”
“네.”
“전혀 없었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어떤 인연도 없었는데 김대환 대표 가 다짜고짜 찾아가서 주태훈에게 캐스팅 제안을 했다는 것.
이규한이 ‘신과 같이’에 주태훈을 캐스팅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를 가로채기 위해서 움직였을 가능 성이 높다는 증거였다.
“김대환 대표가 어떤 제안을 했습 니까?”
“날개를 달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날개요?”
“다시 비상할 수 있는 날개를 달아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 제안을 듣고 마음이 동한 것이 사실입니다.”
주태훈의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대환이 누군가?
메이저 투자 배급사인 씨제스 엔터 테인먼트를 이끌고 있는 수장이었 다.
비록 최근 들어 씨제스 엔터테인먼 트에서 투자한 작품들이 잇따라 홍 행에 실패했다 하나,부자가 망해도 삼 년은 간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는 여전히 영 화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의 수장 인 김대환 대표가 직접 찾아와서 재 기를 돕겠다고 약속한 상황.
주태훈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내 실수야.’
이규한이 자책했다.
이건 주태훈을 탓할 것이 아니었 다.
‘어차피 잡은 물고기.’
이렇게 생각한 탓에 주태훈과의 계 약을 좀 더 서두르지 않았던 자신의 실수였다.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김대환 대표는 액터스 길드에 소속된 신인 배우들을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하는 작품에 중용하겠다는 약속 도 했습니다.” 액터스 길드는 주태훈의 소속사.
김대환 대표에게는 그 약속을 지킬 힘이 있었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이규한이 김대환 대표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는 생각을 했을 때 였다.
“조진석 대표 입장에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죠.”
주태훈이 덧붙인 이야기가 옳았다.
액터스 길드에 속한 배우인 주태훈 은 꽤 오랫동안 개점휴업 상태였다.
회사를 운영해야 하는 액터스 길드 조진석 대표 입장에서는 주태훈에게 일거리가 없는 것이 무척 속상했으 리라.
그런데 주태훈이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코앞에 찾아와 있 었다.
게다가 액터스 길드에 속한 다른 배우들도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 투 자하는 작품에 중용할 것이라는 김 대환 대표의 약속까지 받아 낸 상 황.
조진석 대표 입장에서는 이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었으리라.
‘후우.’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며 의자 위에 올려 둔 백팩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은 채 계약 서를 가져왔다.
그렇지만 백팩에 넣어 온 계약서는 꺼내 볼 기회조차 없을 듯 보였다.
“태훈 씨.”
“말씀하시죠.”
“좋은 배우를 만나서 기뻤습니다. 비록 이번에는 좋은 인연으로 이어 지지 않았지만, 다음에는 꼭 함께 작품을 했으면 합니다.”
이규한이 애써 아쉬움을 감춘 채 덧붙였다.
“꼭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라겠습 니다.”
“죄송합니다. 부족한 제게 좋은 기 회를 주셨는데… 실망만 안겨 드린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네요.”
“괜찮……
“두 달만 기다려 주십시오.”
무심코 알겠다고 대답하려 했던 이 규한이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주태훈의 이야기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만약 주태훈이 ‘어메이징 히어로 즈’에 주연으로 합류한다면?
최소 1년 이상은 그 작품에 매달 려야 할 터였다.
다려 달라고 말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두 달만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 다.”
“왜 두 달만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지금 당장은 계약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 ……?"
“아직 전속 계약 기간이 남았거든
요.”
주태훈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씀은……?”
“김대환 대표를 만나고 난 후 제 마음이 잠깐 흔들렸던 것은 사실입 니다. 워낙 좋은 기회인 데다가 제 가 속해 있는 액터스 길드 조진석 대표가 워낙 열정적으로 밀어붙였었 거든요. 그래서 잠시 고민한 끝에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액터스 길드와 전속 계약 기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부터 확인했습니 다.”
“이유는요?”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 는 ‘신과 같이’에 출연하기 위해서 입니다. 조진석 대표는 절대 허락하
지 않을 게 뻔하거든요.”
이건 주태훈의 말이 맞았다.
액터스 길드 조진석 대표 입장에서 는 주태훈이 ‘신과 같이’에 출연하 는 것보다 ‘어메이징 히어로즈’에 출연하길 원하는 게 당연했다.
주태훈에게도 좋은 기회일 뿐만 아 니라 액터스 길드에 속한 다른 배우 들도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 하는 작품에 중용될 수 있는 기회였 기 때문이다.
‘나라도 반대했을 거야.’
자신이 조진석 대표 입장이라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규 한이 물었다.
“혹시 전속 계약 만료 기간이 두 달 남은 겁니까?”
“정확히 58일 남았습니다.”
주태훈이 ‘어메이징 히어로즈’가 아닌 ‘신과 같이’에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밝혀도 조진석 대표는 승낙 하지 않을 터.
그래서 주태훈은 작전을 바꾼 것이 었다.
전속 계약이 만료되고 난 후 계약 서를 작성하고 ‘신과 같이’에 출연 하기로.
‘주태훈은 ‘신과 같이’에 출연하기 로 결심을 굳혔어.’
‘주태훈이 낙마한다면 어떤 배우를 캐스팅해야 할까?’
김미주 덕분에 주태훈이 ‘어메이징 히어로즈’에 합류할 거라는 보도 기 사를 확인하고 난 후 이규한이 한 고민이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상태였는데.
주태훈이 ‘어메이징 히어로즈’가 아니라 ‘신과 같이’에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커다란 고민거리를 던 셈이었다.
잠시 후 이규한이 의문을 느꼈다.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어메이징 히어로즈’가 아니라 ‘신과 같이’에 출연하려는 겁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제가 조진석 대표를 좋아하지 않습 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스타 일이거든요.”
이규한은 액터스 길드를 이끄는 조 진석 대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 다.
그렇지만 주태훈에 대해서 조사하 면서 성추행과 관련된 법정 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진석 대표에게 서운함을 느꼈을 것은 짐작할 수 있 었다.
액터스 길드가 도움을 주지 않아서 주태훈은 사비로 변호사를 선임하면 서 법정 소송에 임했으니까.
그 과정에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 는 스타일인 조진석 대표에게 주태 훈은 많이 실망했으리라.
“나머지 하나의 이유는 무엇입니 까?”
“귀를 기울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배우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선택을 내려야 할 순간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법원에서 무죄 판결 을 받았을 때입니다. 당시 제 주변
의 사람들은 성추행 사건에 억울하 게 연루되면서 입은 피해가 막심하 니 무고죄로 상대 여성을 고소하라 고 부추겼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결 국 무고에 대한 고소를 하지 않았습 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 면서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을 때,문득 깨달았습니다. 이런 사건에 연루된 것은 조심하지 않았던 내 잘 못도 크다는 것을. 상대를 탓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봐라,이렇게 속 삭이더군요.”
조금 전에 주태훈은 혼자 술을 마 셨다고 했다.
그런데 누가 상대를 탓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조언을 했다는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그런 이규한의 의문을 알아챈 걸 까.
주태훈이 다시 입을 뗐다.
“제 마음이 속삭였습니다.”
“마음… 이요?”
“미등만 켜 놓은 적막이 내려앉은 집 안에서 혼자 술을 마시다 보면 그동안 놓치고 지나갔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건네는 속삭임 이죠.”
‘마음이 건네는 속삭임이라.’
난해한 이야기.
그렇지만 이규한은 지금 주태훈이 꺼낸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 도망칠 건데? 너 때문에 상처받기에는 너무 좋은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진짜 이대로 떠나보 낼 거야?’
남지유를 계속 밀어냈던 이규한의 태도가 바뀐 계기도 마음이 건네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 덕분이었다.
그때 주태훈이 덧붙였다.
“이번에도 마음이 속삭였습니다. ‘어메이징 히어로즈’가 아니라 ‘신과 같이’에 출연하는 게 네가 진짜 원 하는 게 아니냐고. 저는 그 마음의 속삭임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이규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 그럼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로군요. 태훈 씨 의 전속 계약이 끝날 때까지 걸리는 두 달의 시간은 기꺼이, 아니 즐거 운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이제… 결정을 내렸나? 그렇군. 재고의 여지는 없는가? 지금의 선택 을 후회할 수도 있네. 아쉽지만 일 단 알겠네.”
통화를 마친 김대환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덕원이 조심 스럽게 물었다.
“무슨 전화인데 그러십니까?”
“주태훈이… ‘어메이징 히어로즈’ 출연을 최종 고사했네.”
‘주태훈이 출연을 고사했다?’
굳혔다.
“그렇지만 난 주태훈이 결국 내 제 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네. 액 터스 길드의 조진석 대표를 잘 알고 있네. 내가 아는 그라면… 무슨 수 를 써서라도 주태훈을 설득할 걸 세.”
얼마 전 김대환이 했던 이야기였 다.
그 이야기를 하던 김대환의 목소리 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 지만 그의 계산은 빗나갔다.
“어렵군.”
답답한 음성을 토해 내는 김대환의 얼굴을 김덕원이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고뇌가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 다.
“대안을 찾으면 됩니다.”
김대환을 위로하기 위해서 김덕원 이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김대환은 고개를 흔들었 다.
“대안은… 없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덕원이 당황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이 넘쳤던 김대환이 었다.
설령 투자한 작품이 흥행에 참패를 했을 때도 김대환은 실망하거나 의 기소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이 아니면 다음이 있다.
내게는 항상 대안이 준비되어 있 다.
이렇게 항상 자신감을 내비쳤던 김 대환을 존경했다. 그래서 지금 김대 환이 드러내고 있는 지친 모습이 김 덕원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잠시 후,김덕원이 조심스럽게 물 었다.
“이제 일선에서 물러날 때가 된 둣 하네.” 김덕원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대 답이었다. 그래서 제발 그 대답이 아니길 빌고 있을 때 김대환이 말했 다.
“세상이 변했군.”
‘세상이 변했다? 무슨 뜻일까?’ 김대환이 입 밖으로 내뱉은 이야기 의 속뜻을 파악하기 위해 김덕원이 애쓸 때였다.
“예전과는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의 위상이 많이 달라졌단 뜻일세.” 김대환이 설명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김덕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