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내게 남은 건? (1)
서둘러 다른 시나리오 책을 집어 들어 보았지만,결과는 마찬가지였 다.
“더 이상 감정 결과가 떠오르지 않 아.”
이규한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를 세우고 난 후,지금까지 제작했던 영화들이 흥 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이규한
이 가진 감정이란 능력의 역할이 컸 다.
감정 능력을 통해서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작품과 흥행에 실패할 작품 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다.
또, 제작을 진행하던 도중에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이규 한이 가진 감정 능력은 큰 도움이 됐다.
지금 내리는 선택이 과연 옳은 선 택인가 여부를 예상 관객 수 변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감정 능력이 사라져 버렸다.
예고 없이 닥친 상황이었기에 충격
이 더욱 컸다.
“왜 갑자기 감정 능력이 사라진 거 지?”
잠시 시간이 지난 후,이규한은 감 정 능력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고 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길게 내쉬던 이규한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여 있 는 작은 달력에서 멈췄다.
- 2017년 7월 14일.
눈을 가늘게 좁혔다.
“벌써 십 년이 흘렀구나.”
이규한은 사고와 함께 과거로 돌아 갔다.
정확히 십 년 전,2007년 7월 14 일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오늘 날짜가 2017년 7월 14일이었다.
“이것… 때문인가?”
‘10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더 이상 감정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제작자로 다시 한번 살 수 있 도록 주어졌던 기회.
감정 능력은 한 차례 더 주어진 기회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이규한 에게 부여된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제 10년의 시간이 흘렀 고,그 선물을 신이 회수해 간 것이 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미래도 알 수 없어.”
이규한이 영화제작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
한 차례 경험했기에 미래를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홍행 작을 미리 알 수 있었고.
그런데 이제 10년의 세월이 흐르 면서 더 이상 어떤 작품이 흥행할지 에 대한 정보도 사라진 상태였다.
“눈이 멀어 버린 느낌이네.”
감정과 미래의 흥행작을 알고 있는
것.
영화제작자 이규한이 가진 두 가지 강력한 무기였다.
그런데 그 강력한 무기 두 가지가 한꺼번에 사라져 버린 순간,이규한 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느낌을 받았 다.
이제… 어쩌지?” 앞이 막막했다.
후우.
한숨을 연신 내쉬던 이규한이 블루 문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을 빠져나갔 다.
잠시 후,이규한의 발걸음이 청월 빌딩에 입주해 있는 영화제작사 중 한 곳인 빅스빅 픽처스 앞으로 향했 다.
늦은 시간임에도 빅스빅 픽처스 사 무실은 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빅스빅 픽처의 대표인 장준경이 정 자세로 시나리오 책을 읽고 있는 것 이 보였다.
그런 그의 책상 위에는 십여 권의 두터운 시나리오 책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미간을 찌푸렸다가 펴기를 반복하 면서 시나리오 책을 검토하고 있는 장준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규한이 노크했다.
“어? 이 시간에 웬일이야?
이규한을 발견한 장준경이 깜짝 놀 라며 반겼다.
“커피 한 잔 얻어먹을까 해서.”
“믹스 커피밖에 없는데 괜찮아?” “천만 영화제작자도 됐는데,커피 머신 하나 사지 그래?”
빅스빅 픽처스와 블루문 엔터테인 먼트가 공동 제작 했던 ‘베테랑들’ 의 최종 관객 수는 1,324만 명이었 다.
작품의 흥행 성공에는 달콤한 보상 이 따르는 법.
장준경은 자금난을 일거에 해소했 을 뿐만 아니라,여유 자금도 꽤 생 겼다.
그래서 이규한이 핀잔을 건넸지만, 장준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껴야 잘 산다. 커피 머신은 천 만 영화 한 편 더 제작하면 구입을 고려해 볼게.”
“알았다. 그럼 믹스 커피라도 한 잔 줘.”
“잠깐만 기다려.”
잠시 후 장준경이 믹스 커피 두 잔을 타서 돌아왔다.
사무실 한가운데에 놓인 원형 탁자 에 마주앉고 난 후,이규한이 물었 다.
“아까 뭘 보고 있었던 거야?”
“투고로 들어온 작품들이랑 시나리 오 마켓에 추천작으로 뽑힌 작품들
출력해서 읽어 보고 있었어.”
“괜찮은 작품이 있어?”
“딱히 눈에 띄는 작품은 없어. 그 래도 계속 읽어 봐야지. 우리 일이 원래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과 비슷하잖아.”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제작자가 하는 일은 수많은 작 품 후보 중에 흥행에 성공할 수 있 는 좋은 작품을 고르는 일.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비 숫하다는 장준경의 비유가 딱 어울 렸다.
고.’
감정이란 능력과 미래를 알 수 있 었던 덕분에 이규한은 다른 영화제 작자들보다 훨씬 쉽게 모래사장에서 녹슬지 않은 바늘을 찾을 수 있었 다.
백 미터 경주로 비유하자면 동일한 출발선상에 서 있는 다른 제작자들 에 비해서 약 50미터가량 더 앞에 서 출발했던 셈이다.
그런데 이제는 특권이 사라졌고, 다른 영화제작자들과 동일한 출발선 상에 서서 경쟁을 해 나가야 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넌 좋겠다.” 그때,장준경이 말했다.
“뭐가 좋겠다는 거야?”
“좋은 시나리오들이 많이 들어오니 까.”
“내게?”
“그래.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내 영화를 제작해 줬으면 하는 감독 들이랑 작가들이 수두룩하잖아. 다 른 영화제작자들은 제발 좋은 작품 보여 달라고 굽신거리면서 부탁하고 돌아다니는데,넌 가만히 앉아 있어 도 A급 감독들과 작가들이 시나리 오 들고 줄줄이 찾아오는 상황이니 얼마나 좋아?” 장준경의 이야기를 듣던 이규한이 믹스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멈칫했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 했는데.
잘못된 생각이란 사실을 방금 깨달 았다.
이규한이 최선을 다해 살았던 지난 십 년의 시간.
그사이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는 대 한민국 최고의 영화제작사로 성장했 다.
또,이규한은 최고의 영화제작자로 자리를 잡았고.
덕분에 투자자들은 물론이고,감독 들과 작가들도 이규한과 블루문 엔 터테인먼트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 다.
그 신뢰는 다른 영화제작자들이 갖 지 못한 것이었다.
‘다시 시작하면 돼. 그리고 이제부 터가 진짜 시험대야.’
이규한이 각오를 다지며 믹스 커피 를 마셨다.
달콤한 믹스 커피의 맛을 음미하면 서 이규한이 장준경을 바라보았다.
“고맙다.”
“뭐가 고맙다는 거야?”
“커피 맛있네.”
“내가 커피는 좀 타지?”
이규한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진짜 맛있었어. 그리고 네 덕분에 두려움이 좀 가셨다.” 리얼리 픽처스 인근에 위치한 포장 마차.
이규한이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 서자 주인 할머니가 인사를 건넸다.
‘또 왔네.'
“절 기억하세요?”
딱 한 번 이곳을 찾은 게 다였다.
그래서 주인 할머니가 기억하지 못 할 거란 이규한의 예상은 빗나갔다.
“당연히 기억하지. 호구잖아.”
“호구요?”
“백수 물주 노릇을 하니 호구지.”
주인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이규 한이 쓰게 웃었다.
이야기 도중에 등장한 백수가 리얼 리 픽처스 양동현 대표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호구짓 하지 말까요?” 이규한이 입가에 웃음을 매단 채 묻자 주인 할머니가 눈을 크게 떴 다.
“능도 할 줄 아네.”
“네?”
“지난번보다 표정도 밝아졌고. 무 슨 좋은 일 있어?”
“좋은 일 있습니다.”
“다행이네.”
주인 할머니는 이규한에게 생긴 좋 은 일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호구짓 계속해.”
“백수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하니 까.”
이규한이 재차 실소를 터트렸을 때,마침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온 양동현이 인상을 구긴 채 말했다.
“백수 아니라니까요.”
“알았어. 백수 아니라고 치자.”
“백수 아니라고 치는 게 아니 라……
“시끄러우니까 술이나 마셔.”
양동현과 더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 주인 할머니는 안주를 만들기 위 해서 돌아섰다.
“계란말이 해 주면 되지?”
“네,곰장어랑 골뱅이 소면도 주세 요.”
이규한이 주문을 마치고 양동현이 앉아 있는 탁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왜 안주를 그렇게 많이 시켜?”
“어려운 부탁을 드렸는데 이 정도 는 대접해야죠.”
“네가 성공한 이유를 알겠네.”
“뭔가요?”
“양심이 있네.”
껄껄 웃던 양동현이 ‘신과 같이’의 시나리오 책을 꺼내서 탁자 위에 올 려놓았다.
이규한이 조심스럽게 질문했지만, 양동현은 대답 대신 되레 질문을 던 졌다.
“캐스팅은 얼마나 진행됐어?”
“주연급 배우 세 명은 결정됐습니 다.”
“누구?”
“하정후와 남지유 그리고 강도빈입 니다.”
“정후를 탐내더니 결국 잡았네.” 양동현이 새삼스러운 시선을 던지 며 물었다.
“어떻게 잡았어?”
“아니다. 남의 영업 비밀을 묻는 건 상도가 아니지. 그리고 어떻게 잡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잡았 다는 게 중요하지.”
소주를 마신 후,양동현이 다시 입 을 뗐다.
“남지유와 강도빈은 그때 네가 말 했던 투 플러스 투로구나.”
“맞습니다. 그런데 강도빈을 아십 니까?”
“당연히 알지.”
양동현에게서 대답이 돌아온 순간 이규한이 깜짝 놀랐다.
아이돌 그룹 KTS의 멤버인 강도빈 을 양동현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신 기해서였다.
“어떻게 아십니까?”
“겸사겸사 공부를 좀 했지. 요새 아이돌 그룹의 티켓 파워가 만만치 않아. 연기력도 많이 괜찮아진 편이 고. 그래서 투자자들도 연기가 되는 아이돌 멤버가 작품에 출연하면 좋 아하기 때문에 쓸 만한 아이돌들이 있는지 공부를 했어. 그리고 하나 더. 네가 투 플러스 원을 받고 투 플러스 투를 제안하기에 누구를 선 택할지가 궁금해서 따로 공부를 한 것도 없지 않아 있지.” 이규한이 소주병을 들어 양동현의 빈 잔을 채워 주었다.
‘고마운 분.’
양동현은 아까 겸사겸사라고 말했 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규한이 제작하는 ‘신과 같이’라 는 작품에 출연할 적임자를 찾기 위 해서 일부러 공부를 했다는 사실을.
‘내가 가진 게… 생각보다 많구나.’
이규한이 소주잔을 매만지며 생각 했다.
투자사와 제작사의 수익 배분 비율 이 영화제작자들에게 불리하게 바뀌 는 것을 간파한 후,이규한은 발 벗 고 나서서 영화제작자들의 편에 서 서 싸웠다
또,형편이 어려운 영화제작자 동 료들을 위해서 거의 공짜나 다름없 는 저렴한 임대료만 받고 사무실을 임대해 주었다.
“영화 제작만 잘하시는 게 아니라 오지람도 참 넓으시네요.”
당시 김미주는 이렇게 핀잔을 건넸 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쓸데없 는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이규한이 했던 노력을 뒤늦 게 알게 된 양동현이 든든한 지지자 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걸 바라고 한 건 아니지만,내 입장에서는 최고의 조력자를 얻은 셈이야.’
양동현은 이규한과 함께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제작자로 손꼽히는 인 물.
그는 흥행할 작품을 알아보는 본능 적인 직감이 있었다.
특히 그는 작품의 시나리오와 캐스 팅된 배우의 면면 그리고 연출을 맡 을 감독 등의 작품 정보를 통해서 정확한 예상 관객 수를 알아맞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이규한이 갖 고 있던 감정이란 능력과 무척 흡사 한 면이 존재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