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절충안
“축의금 많이 하길 잘했네.”
픽 웃은 이규한이 정색한 채 물었 다.
“그런데 아까 말한 건 무슨 뜻이 야?”
“어떤 것이요?”
“사정을 들어서 빤히 안다고 했잖 아. ‘부산행 열차’가 촬영을 잠정 중
단하고 재촬영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누구한테 들었어?”
이런 소식이 알려지는 것.
‘부산행 열차’ 입장에서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규한은 입단속을 시키기 위해서 애썼다.
그런데 안유천과 김단비 작가는 이 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구한테 들었다고 말하기 애매하 네요.”
“왜 애매해?”
“벌써 소문이 쫙 퍼졌거든요. 이 바닥 좁은 것 대표님도 잘 아시잖아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 덕였다.
나름대로 입단속을 시키기 위해서 애썼지만 전혀 무소용이었다.
소문의 출처를 파악하는 것 역시 시간 낭비라고 이규한이 판단했을 때였다.
“시나리오 수정 작업에서 중점을 둘 부분은 뭡니까?”
안유천이 수정 방향에 대해 질문했 다.
“개성을 부여해 줘.” 이규한이 대답을 꺼냈을 때 우중완 감독도 거의 동시에 입을 뗐다. 그 리고 안유천은 우중완 감독이 꺼낸 대답에 흥미를 드러냈다.
“우사인 볼트가 거기서 왜 나오는 겁니까?”
“안 작가,우사인 볼트가 겁나 빠 르다는 건 알지?”
“당연히 알죠. 제가 이래 봬도 우 사인 볼트 광팬입니다.”
“만약 우사인 볼트가 좀비로 변하 면 겁나 빠를 것 아냐? 그럼 진짜 재밌는 그림이 나올 것 같지 않아?”
‘광팬… 이라고?’
두 눈을 빛내며 그 말을 되뇌는 안유천을 바라보던 이규한이 문득 불안감을 느꼈을 때였다.
“기가 막히네요.”
“안 작가 생각도 그렇지?”
죽이 척척 맞는 안유천과 우중완 감독을 확인한 이규한이 구조 요청 을 하듯 김단비 작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김단비 작가가 말 했다.
“우사인 볼트는 뻘게요.”
“김 작가,고마워.”
이규한이 감사 인사를 했을 때 안
유천이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반박 했다.
“우사인 볼트를 왜 뺀다는 거야? 진짜 재밌을 것 같은데. 게다가 우 사인 볼트가 ‘부산행 열차’에 출연 한다고 하면 흥보 효과도 끝내 줄 거야.”
그렇지만 김단비 작가는 단호했다. “안 된다고 했어요.”
“대체 왜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건데?”
“손해니까요.”
“뭐가 손해야?”
는 비용과 우사인 볼트를 출연시켜 서 얻는 흥보 효과를 비교하면 무조 건 손해예요.”
김단비 작가가 똑 부러지게 대답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유천은 쉽 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손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해?”
“딱 보면 견적이 나오죠. 우사인 볼트를 캐스팅하는 데 드는 비용만 해도 엄청날 거예요. 그리고 운좋게 우사인 볼트를 캐스팅한다고 해도 스케줄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아요. 우사인 볼트를 출연시키기 위해서 계속 촬영을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 고. 그 과정에서 제작비가 상승하는
것도 감안하면 무조건 손해예요.”
‘짝짝.’
이규한이 속으로 박수를 쳤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답변이었기 때문이었다.
안유천도 비슷한 생각을 한 걸까.
그는 논리로 반박하는 대신 감성에 호소했다.
“정체성이 모호해.”
“무슨 뜻이에요?”
“내 편이야 아니면 이 대표님 편이 야? 지금 제작비를 걱정하는 게 꼭 작가가 아니라 제작자처럼 느껴져서 하는 말이야.”
안유천이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않 고 드러냈을 때 김단비 작가가 차분 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요급 시나리오 작가의 조건 중 하 나가 제작비에 신경 쓰는 것이란 것 몰라요?”
“물론 알고 있지만……
“그렇게 포기가 어려워요?”
“응.”
우중완 감독과 시선을 교환한 안유 천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확인한 김단비 작가가 말했다.
“그럼 대안을 찾아요.”
“어떤 대안?”
안유천이 흥미를 드러냈을 때 우중 완 감독이 끼어들었다.
“김 작가,대안은 내가 이미 마련 해 뒀어.”
“어떤 대안이죠?”
“우사인 볼트랑 닮은 외국인을 캐 스팅하는 거야. 진짜가 아니라 아쉽 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대안 같지 않아?”
우중완 감독이 자신 있게 끼어들었 지만 김단비 작가는 고개를 흔들었 다.
안입니다.”
“왜 나쁜 대안이라는 거야?”
“요새 관객들 눈높이가 많이 높아 졌거든요. 진짜 우사인 볼트가 아니 라 우사인 볼트를 닮은 외국인을 캐 스팅해서 진짜 행세를 하면 관객들 이 코웃음을 칠 겁니다. 그리고 최 악의 경우에는 그 한 장면으로 인해 작품 전체가 싼티 나게 보일 수도 있어요.”
김단비 작가의 대답은 이번에도 빈 틈을 찾기 힘들 정도로 논리정연했 다.
그래서 우중완 감독이 수긍한 표정 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다른 대안이 있어요.”
김단비 작가가 말했다.
“어떤 대안인데?”
“뭔데?”
안유천과 우중완 감독이 앞다투어 대안에 대해서 물었다.
잠시 후 김단비 작가가 대답했다.
“대주자.” “우사인 볼트 대신 육상부 출신 대 주자를 이용하죠.”
김단비 작가가 찾아낸 대안은 대주 자였다.
발이 빠른 대주자를 우사인 볼트 대신 이용하자는 김단비 작가의 이 야기를 들은 안유천과 우중완 감독 이 잇따라 말했다.
“발이 엄청 빠른 대주자라야 해.”
“그만하면 나쁘지 않은 대안이네.”
그 대답을 꺼내는 안유천과 우중완 감독의 표정을 이규한이 살폈다.
아쉬움이 묻어나고는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어느 정도 납득한 기색이 었다.
완전히 멸쳐 내지는 못했지만 현실 과 타협한 모양새랄까.
‘결혼 잘했네.’
그 표정들을 확인한 순간 이규한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우중완 감독과 마찬가지로 안유천 도 천재성이 번뜩이는 스타일이었 다. 그리고 천재들의 문제는 자기 주장과 고집이 강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옆에서 현실과 이상의 타협 점을 찾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 했는데.
김단비 작가는 그 역할에 최적임자 였다.
‘빨라.,
우사인 볼트를 대신할 육상부 출신 의 대주자 캐릭터를 찾아내는 것.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획 회의를 며칠 동안 거치면서 하나씩 맞춰 가야 하는 퍼즐 중 하 나였는데, 김단비 작가는 금세 그 퍼즐을 맞춘 셈이었다.
해서 이규한이 김단비 작가를 보며 내심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언제까지 작업을 마치면 되나요?”
김단비 작가가 물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내일까지 끝내자.” “내일… 이요?”
이규한의 대답을 들은 김단비 작가 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세요?”
“물론 진심이야.”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처음 이규한이 가늠했던 시간이었 다. 그렇지만 절충안을 금세 찾아내 는 김단비 작가의 모습을 확인하고 생각이 바뀌었다.
‘모두 한데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고 민한다면?’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일단 작업실로 돌아가서 김단비 작가가 작업실로 돌아가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겠다는 의 사를 밝혔지만 이규한은 고개를 흔 들었다.
“여기서 하자.”
“여기서요?”
“그래. 밤을 새워서라도 내일까지 끝내자.”
이규한이 덧붙였다.
“음료 및 식사는 무료로 제공할 게.” - ‘부산행 열차’의 갑작스러운 촬 영 중단. 한국형 좀비 재난 영화에 드리워진 짙은 먹구름.
이규한이 기사를 살피고 있을 때 김태훈이 말했다.
“우리 영화 망하라고 아주 고사를 지내고 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쓴웃음 을 머금었다.
“김대환 대표가 움직인 거죠?” “그런 것 같다. 기사를 낸 게 오센 뉴스 강호규 기자니까.”
오센뉴스 강호규 기자는 씨제스 엔 터테인먼트에 우호적인 기사를 작성 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가 이런 기사를 낸 것에 김대환 대표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솔직히 난 이해가 잘 안 돼. ‘부 산행 열차’의 개봉 예정 시기에 씨 제스 엔터테인먼트가 내놓는 작품은 없어. 그런데 왜 우리 영화를 저격 하기 위해서 이런 기사를 낸 거지?” 저 때문입니다J
“김대환 대표가 저를 싫어합니다.” “왜 김대환 대표가 이 대표를 싫어
해?”
이규한과 김대환 대표 사이의 악 연.
김태훈은 자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규한이 지금까지 의 일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 었다.
그 설명을 모두 들은 김태훈의 표 정이 심각해졌다.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닌데? 김대 환 대표를 적으로 돌렸는데도 불구
하고 이 대표는 겁나지 않아?”
“별로요.”
“왜 안 무서우데?”
“선배님이 있으니까요.”
“나?”
김태훈이 당황한 표정을 지을 때 이규한이 덧붙였다.
“권지영 팀장도 있죠.”
“이 대표.”
“그리고 믿는 구석이 하나 더 있습 니다.”
“그 믿는 구석이 대체 뭔데?”
“좋은 작품은 성공한다는 것이요.”
이규한이 대답했지만 김태훈의 심 각한 표정을 풀리지 않았다.
“원론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야. 좋 은 작품은 성공하지. 그렇지만 더 중요한 건 좋은 작품이 세상에 나올 기회 여부야.”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그동안 만 들어 낸 성과를 믿습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대단하긴 했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뭡니까?”
“좀 걱정이 되네. 이 대표가 상황 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이규한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때 김태훈이 덧붙였다.
“아까 이 대표의 말처럼 나와 권지 영 팀장은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 우호적인 입장이야. 이 대표의 능력 이 뛰어나다는 것도 알고 있고. 하 지만 나와 권지영 팀장에게는 힘이 없어.”
김태훈의 직함은 NEXT 엔터테인 먼트의 투자팀장.
작품의 투자 결정 여부에 그의 입 김이 미치는 영향력은 무척 컸다.
그런데 김태훈은 본인의 입으로 힘 이 없다고 말했다.
“윗선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결국 따를 수밖에 없거든. 그리고 내가 선택한 작품 중 두세 작품만 흥행에 참패하면 언제든지 잘릴 수 있는 파 리 목숨이기도 하고. 이건 권지영 팀장도 마찬가지야.”
김태훈이 덧붙인 이야기를 들은 이 규한이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현실이란 것을 이규한이 왜 모를까.
그리고 바람직한 현상은 결코 아니 었다.
메이저 투자 배급사에서 선택한 작 품이 흥행에 참패를 기록했을 때, 투자팀장이 홍행 참패에 대한 책임 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일반적이었 다.
그렇지만 꼬리를 자르는 것에 불과 했다.
진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최종 결정권자인 메이저 투자 배급사의 대표이사여야 하는 것이 맞았다.
‘이게 한국 영화가 뻔하다는 비난 을 듣는 진짜 이유지.’
두세 작품만 실패해도 투자팀장은 자리를 보전하기 어렵다.
그래서 흥행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 고,결국 흥행 요소가 모두 포함된 작품 위주로 투자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 는 모험을 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드 는 것이고.
“저희 회사로 오시죠.”
“응?
“‘부산행 열차’가 흥행에 참패해서 NEXT 엔터테인먼트를 나오시게 되 면 저희 회사에 자리를 마련해 두겠 습니다.”
이규한이 웃으며 스카우트 제안을 했지만 김태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됐으니까 제발 ‘부산행 열 차’를 대박 나게 만들어 주라.”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