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왼손은 거들 뿐 (2)
우중완 감독이 두 눈을 빛내는 것 을 바라보던 이규한이 쓰게 웃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건 이규한이 떠올 린 생각이 아니었다.
남지유가 먼저 했던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그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우중완 감독이 다시 입을 뗐 다.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무슨 생각?”
“우사인 볼트를 저희 작품에 캐스 팅 하죠.”
“응?”
“우사인 볼트를 캐스팅해서 엄청 빠른 좀비로 출연시키면 진짜 재밌 는 그림이 나올 것 같습니다.”
우중완 감독이 잔뜩 흥이 오른 목 소리로 제안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함께 흥분하는
대신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 감독,제작비 생각도 좀 하자.” “우사인 볼트를 닮은 외국인을 캐 스팅하는 건 안 될까요?”
우중완 감독은 우사인 볼트 캐스팅 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했 다.
“이제 그만 포기하지?”
“포기하기는 너무 아깝다니까요. 우사인 볼트를 닮은 외국인을 캐스 팅하면 제작비도 얼마 안 들 테니
까……
“우 감독,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 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재촬영을 해야 할 수도 있어.”
“재촬영… 이요?”
“그래. 이유는 설명 안 해도 되겠 지?”
“듣고 보니 재촬영을 해야 할 수도 있겠네요.”
“그게 다가 아냐.”
“또 뭐가 남았습니까?”
“촬영을 잠정 중단하고 뒤로 미룰 생각이야.”
“제작비가 엄청 늘어나겠지?”
“네? 네.”
“이제 포기가 돼?”
이규한의 질문을 받은 우중완 감독 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지금 우사인 볼트가 중요한 게 아니었네요.”
우중완 감독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 하게 변했을 때, 선술집 안으로 NEXT 엔터테인먼트 투자팀장인 김 태훈이 들어섰다.
“왜들 표정이 이렇게 심각해?” 김태훈을 발견한 우중완 감독이 당 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김 팀장님은 왜 오신 겁니까?” “내가 불렀어.”
이규한이 대답하자 우중완 감독이 다시 물었다.
“왜 부르신 겁니까?”
“제작비가 상승하는 부분에 대해서 상의해야지.”
이규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태 훈이 물었다.
“제작비가 상승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투자팀장 입장에서 가장 민감한 것 은 제작비였다.
그래서일까.
김태훈은 벌써 표정이 굳어 있었 다.
“재촬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규한이 본론을 꺼내자 김태훈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저희가 놓치고 지나갔던 부분이 있습니다.”
“꼭… 재촬영을 해야 해?”
김태훈은 재촬영을 해야 하는 이유 에 대해서 더 자세히 묻지 않았다. 대신 재촬영이 꼭 필요한가 여부에 대해서 물었다.
“이대로 넘어갈 순 없습니다.”
“그래?”
김태훈이 빈 잔을 앞으로 내밀었 다.
우중완 감독이 소주병을 들어서 채 워 준 잔을 단숨에 비운 후 김태훈 이 팔짱을 낀 채 고민에 잠겼다.
‘수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규한이 긴장한 채 소주잔을 입으 로 가져갔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부지기수였다.
오히려 큰 문제 없이 제작을 마치 고 개봉하는 것이 이상한 케이스일 정도로 이런저런 문제들은 자주 발 생 했다.
그 가운데 최악의 경우는 제작이 중단되는 것.
‘가능성은 충분해.’
‘부산행 열차’의 경우 재촬영을 해 야 하는 데다가 촬영 일정도 새로 조정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제작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높았고,투자를 맡 은 NEXT 엔터테인먼트의 입장에서 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둘 가능 성이 있었다.
그래서 이규한이 잔뜩 긴장하고 있 을 때였다.
“그럼 해야지.”
김태훈은 소주 한 잔을 더 마신 후 말했다.
“네?”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오히려 되물었다.
너무 쉽게 요구를 수용했다는 생각 이 들어서였다.
“재촬영 말이야. 필요하다면 하라 고.”
? 7"
“내가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이 대표는 믿거든. 그리고 이 대표가 재촬영을 하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
가 있겠지.”
‘달라졌구나.’
김태훈과의 대화를 하던 이규한이 문득 느낀 감정이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작품들의 꾸준한 성공은 김태훈에게 믿음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재촬영 요구도 의외로 쉽게 수용된 것이었다.
‘다행이다.’
이규한이 안도했을 때 김태훈이 소 주병을 들었다. 그리고 비어 있던 이규한의 잔을 채워 주며 덧붙였다.
“대신 조건이 있어.” “어떤 조건입니까?”
“전면 재촬영은 곤란해. 내 입장도 있으니까 기존 촬영분 중에서 살릴 수 있는 건 최대한 살려 줘.”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살 릴 수 있는 분량이 많은 편입니다.”
아직 촬영은 초반부였다.
지금까지 촬영한 분량은 좀비들이 본격적으로 출몰하기 전, 주연배우 들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것이 대부 분이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김태훈이 안도한 표정을 지었을 때
“그렇지만 촬영 일정은 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한동안 촬영을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얼마나?”
“아직 기간은 확실치 않습니다. 제 판단에는 최소 한 달 이상은 중단한 후에 촬영을 재개할 수 있을 것 같 습니다.”
이규한의 대답을 들은 김태훈이 다 시 심각하게 변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단 이유부터 듣자. 재촬영에다 가 촬영까지 중단하려는 이유가 뭐 야?”
이규한이 이유에 대해서 간략하게 요약해 설명했다.
그 설명을 모두 들은 김태훈이 수 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정도면 손해가 크긴 하겠지 만 어떻게 감당할 수는 있을 것 같 다. 배우들과 스태프들 스케줄 조정 만 된다면……
“그건 제가 책임지고 해결하겠습니 다.”
이규한이 재빨리 대답한 순간 우중 완 감독이 끼어들었다.
“우 감독, 그게 무슨 뜻이야?”
“제 판단에는 최소 두 달 이상은 걸릴 것 같거든요.”
우중완 감독이 피력한 의견을 들은 김태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현장의 책임자인 우중완 감독과 제 작자인 이규한의 의견이 엇갈린 상 황.
김태훈이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지 사였다.
게다가 촬영 일정이 한 달 중단되
는 것과 최소 두 달 이상 중단되는 것은 말 그대로 천지차이였다.
“누구 말이 맞는 거야?”
김태훈이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단 의견을 통일하는 것이 급선무 라고 판단한 이규한이 우중완 감독 을 응시하며 물었다.
“도경호의 연기 어땠어?”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 까?”
이규한이 질문을 던지는 의도를 파 악하지 못한 우중완 감독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답부터 해.” “촬영장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좋았 습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해 봐.”
이규한의 재촉을 들은 우중완 감독 이 다시 입을 뗐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도경호가 출연 한 작품들에서 펼친 연기를 보고 조 금 걱정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 았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김태훈이 흥미를 드러냈다.
“도경호가 연기를 그렇게 잘해? 이 대표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도경호
를 캐스팅했던 거야?”
“물론 예상했습니다.”
“역시.”
“그런데 제 예상보다 연기가 더 좋 습니다.”
“그래?”
김태훈이 재차 흥미를 드러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연기가 늘었 지?”
이규한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자,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아 까 최소 두 달 이상 촬영이 중단될
거라고 생각한 이유가 대체 뭐야?”
“배우들을 새로 뽑아야 하니까요.”
우중완 감독에게서 대답이 돌아온 순간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우 감독 생각처럼 배우들을 교체한다면 최소 두 달 이상이 걸리 는 게 맞아.”
“그럼 역시 제 의견이……
“그런데 난 배우를 교체할 생각이 없어.”
이규한이 딱 잘라 말하자 우중완 감독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세요?”
“물론 진심이야.”
“그럼 촬영을 중단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배우 교체가 없다면 배우들의 연기 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 촬영을 중단할 필요도 없이 계속 이대로 촬영하면 되는 것 아니 냐?
우중완 감독이 의문을 품은 이유였 다.
“아니. 촬영을 중단해야 해.”
“왜요?”
“시간이 필요하거든.”
“무슨 시간이요?”
“연기 수업을 받을 시간.” 이규한이 설명했지만 우중완 감독 은 여전히 제대로 이해한 기색이 아 니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아까 내가 도경호의 연기에 대해 물었었지? 도경호의 연기가 갑자기 좋아진 데는 이유가 있어.”
“어떤 이유요?”
“특별 과외를 받았거든.”
“도경호가 누구한테 특별 과외를 받았는데요?”
“교수님.”
두 눈을 낌벅이던 우중완 감독이
잠시 후 무릎을 탁 쳤다.
“아. 도경호가 야구 배트를 들고 좀비를 물리쳤던 게 교수님의 생각 이라고 말했던 게 기억났습니다. 그 럼 그 교수님 덕분에 도경호의 연기 가 는 겁니까?”
“맞아.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해법 은 그 교수님을 초빙해서 배우들에 게 연기 수업을 받게 하는 거야.”
비로소 말뜻을 이해한 우중완 감독 이 두 눈을 빛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은데
요?”
“내가 판단하기에는 제작비 상승을 최소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이규한이 말을 마치며 김태훈을 바 라보았다.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지.” 김태훈은 제작비 상승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입장.
예상대로 그는 이규한의 계획에 쌍 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런데 교수님이 대체 누구야?” 이규한이 대답했다.
“조달호 교수님입니다.”
“옛말이 맞네요.”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회의실에 도 착하자마자 안유천이 한숨을 내쉬었 다.
“어떤 옛말이 맞다는 거야?”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요.”
“ …?"
“어쩐지 오천만 원을 너무 쉽게 벌 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애프터서비스를 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네요.”
안유천과 김단비 작가가 ‘부산행 열차’의 윤색 작업을 한 기간은 단 사흘간 일하고 오천만 원의 윤색료 를 받았었다.
그런데 다시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로 불려 오자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다시 페이를 지급할 거야.”
그렇지만 안유천은 착각하고 있었 다.
이규한은 공짜로 작업을 시킬 생각 이 아니었다.
다시 정당한 페이를 주고 작업을 시킬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규한이 페이를 지급할 거 라고 말하자 안유천이 손사래를 쳤 다.
“페이는 됐습니다.”
“왜 됐다는 거야?”
“무상 보증 기간이 안 끝났거든 요.”
“무상 보증 기간?”
“자동차나 가전제품을 새로 사면 구입 후 몇 년까지는 고장이 났을 때 무상으로 수리해 주잖습니까? 그 거랑 비슷한 겁니다.”
“하지만……
“그리고 사정을 들어서 빤히 아는 데 어떻게 페이를 또 받습니까? 저
희도 양심이 있습니다. 안 그래?”
“당연하죠.”
안유천에 이어 김단비 작가도 무상 으로 일하는 것을 수락했다.
“이러면 내가 너무 미안한데.”
“축의금 1등 했으니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