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순발력이 좋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이규한이 속으로 감탄했다.
남지유는 충분히 연습할 시간을 갖 고 오디션에 임했던 것이 아니다.
술자리 도중에 즉석 제안을 받고 좀비 연기를 펼쳤던 것이다.
을 떠올리고 감안해서 특이한 좀비 연기를 펼쳤다는 것이 남지유의 순 발력이 좋다는 증거였다.
“기대되네.”
“뭐가요?”
“배우 남지유의 성장 말이야.”
이규한의 칭찬을 들은 남지유의 표 정이 밝아졌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이규한이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어떤 힌트가 될 수 있지 않 을까?’
짙은 어둠을 힘겹게 밀어내고 있는 가로등을 바라보며 이규한이 두 눈 을 빛냈다.
“또… 오셨습니까?”
이규한이 촬영 현장에 모습을 드러 내자 우중완 감독이 못마땅한 기색 을 드러냈다.
“방금 ‘또’라고 했어?”
“네.”
“내가 촬영 현장을 찾아오는 게 마 음에 안 들어?”
이규한의 질문을 받은 우중완이 한 숨과 함께 대답했다.
“마음에 안 든다기보다… 너무 다 르지 않습니까?”
“뭐가 달라?”
“지난 작품을 할 때는 촬영 현장을 거의 찾지 않으셨잖아요?”
우중완 감독이 말하는 지난 작품은 ‘베테랑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옳았다.
당시 이규한은 ‘베테랑들’의 촬영 현장에 거의 찾아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부산행 열차’의 경우는 달 랐다.
이규한이 시도 때도 없이 ‘부산행 열차’의 촬영 현장을 찾아오자 우중 완 감독은 불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 이다.
“지난 작품과는 다르거든.”
“뭐가 다른데요?”
“‘베테랑들’은 빅스빅 픽처스와 블 루문 엔터테인먼트의 공동 제작이었 지만,‘부산행 열차’는 블루문 엔터 테인먼트 단독 제작이란 점이 다르 지.”
이규한이 꺼낸 대답을 들은 우중완 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베테랑들’은 공동 제 작이었기 때문에 중요성이 덜했지 만,‘부산행 열차’는 블루문 엔터테 인먼트에서 단독으로 제작하는 작품 이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그래서 촬영장에 자주 찾아온다는 뜻입니 까?”
“그건 아냐. ‘베테랑들’과 ‘부산행 열차’ 두 작품 포두 중요해.”
“그렇지만……
“달라진 건 준경이가 없다는 점이 지.”
" ‘……?"
“‘베테랑들’의 경우에는 나 대신 준경이가 촬영장에 상주하다시피 했 었지. 내가 준경이에게 부탁했거든. 그렇지만 이번에는 준경이가 없기 때문에 내가 대신 촬영장을 자주 찾 아오는 거야.”
비로소 말뜻을 이해한 우중완 감독 이 볼멘 표정을 지었다.
“절 못 믿으시는군요?”
“맞아.”
“헐. 너무 대놓고 못 믿는다고 말 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불안해.”
“제가 이래 봬도 천만 감독입니다. 그러니까……
“천만 감독이자 천재 감독이지. 그 래서 불안하다는 거야.”
" …?"
“천재 감독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 니까.”
“알겠습니다. 밀착 감시를 하든 말 든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우중완 감독이 자포자기한 표정으 로 촬영을 재개했다.
“레디,액션!”
우중완 감독이 디렉션을 내린 순 간,좀비 분장을 한 배우들이 일제 히 공태유를 쫒기 시작했다.
팔짱을 낀 채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규한이 얼마 지 나지 않아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안 들어.’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배우들이 펼 치는 좀비 연기가 성에 차지 않았 “컷,다시 갑니다.”
그리고 엑스트라들이 펼치는 좀비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우중 완 감독도 마찬가지인 둣 보였다.
재촬영을 지시하는 우중완 감독은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입을 뗐다.
“우 감독.”
“왜요?”
“이 엉성한 연기를 CG로 극복하 는 게 가능할까?”
우중완 감독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솔직한 대답을 원하세요?”
“그래.”
“저도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CG가 만능은 아냐.”
이규한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뗐 다.
엄밀히 말하면 방금 꺼낸 이야기는 이규한이 한 말이 아니었다.
CG 전문 업체인 베스트 스튜디오
의 김용택 대표가 했던 말이었다.
그렇지만 우중완 감독은 이규한이 방금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제 대로 이해한 기색이 아니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 까?”
“‘슬램덩크’라는 만화는 본 적 있 지?”
“당연하죠. 천재 작가가 그린 만화 잖습니까?”
“천재 작가?”
“그 만화를 그린 작가는 천재가 틀 림없습니다. 원래 천재는 천재를 알 아보는 법이거든요.” 우중완 감독은 ‘슬램덩크’라는 작 품을 그린 작가가 천재라고 주장했 다.
그러나 이규한이 ‘슬램덩크’라는 작품을 입에 올린 이유는 작가를 칭 송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작품 중에 잠시 등장했던 대사 때문이었다.
“왼손은 거들 뿐.”
“ 구”
“농구 생초보나 다름없던 주인공이 슛 연습을 할 때 등장했던 대사야. 기억해?”
“기억합니다.” “CG도 마찬가지라고 하더군.”
“무슨 뜻입니까?”
“CG는 만능이 아니라 거들 뿐이 라고 했어.”
“CG는 거든다?”
우증완 감독이 그 말을 곱씹는 사 이 이규한이 촬영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도경호를 발견한 이규한이 제안했다.
“촬영 순서를 바꾸자.”
“네?”
“61신을 먼저 촬영하자.”
파라라락.
이규한이 시나리오 책을 펼치고 61신을 먼저 촬영하자고 제안하자 우중완 감독이 난색을 표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촬영 스케줄이 꼬이거든요.”
촬영 스케줄이 꼬이며 제작비가 더 발생한다고 주장하며 우중완 감독은 이규한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 그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 다.
현장의 책임자인 자신에게 제작자 인 이규한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 것이리라.
“이번만 촬영 순서를 바꾸도록 하 자.”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자칫 잘못하면 제작 일정에 차질이 생기 면서 제작비가 상승한다는 것을 이 대표님도 모르시지는 않을 텐데.”
“그래. 나도 알아.”
“그런데 왜?”
“반대야.”
“ …?"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서야
돌연 61신 촬영으로 건너뛰는 바 람에 준비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레디,액션!”
우중완 감독의 디렉션이 떨어지고 난 후 좀비에게 물리며 좀비로 변한 도경호가 작품 속 여자 친구에게로 다가갔다.
“진호야.”
여자 친구가 겁에 질린 채 도경호 가 맡은 배역의 이름을 불렀다. 그 러나 좀비로 변해서 이성이 사라져 버린 도경호는 입을 쩍 벌렸다.
여자 친구가 두 눈을 감아 버리고, 도경호가 막 목을 깨물려 했을 때였 다.
“크록
“크르륵”
좀비들이 여자 친구를 향해 다가오 는 것을 알아첸 도경호가 쩍 벌렸던 입을 닫고 돌연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야구 배트를 집어 들었다.
퍽. 퍼억.
야구 배트를 힘껏 휘둘러 좀비들을 쓰러트리는 도경호를 여자 친구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크록. 크르록
좀비들을 모두 쓰러트린 도경호가 다가오자 여자 친구가 다시 겁에 질 렸다.
그렇지만 도경호는 여자 친구를 물 지 않았다.
대신 야구방망이를 든 채 여자 친 구의 곁을 호위 무사처럼 지켰다.
“진호야……
“컷.”
우중완 감독의 디렉션과 함께 61 신 촬영이 끝났다. 그리고 디렉션을 내렸던 우중완 감독이 고개를 갸웃 했다.
“왜 그래?”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묻자
우중완 감독이 대답했다.
“좀 애매해서요.”
“도경호의 연기가 마음에 안 들 어?”
“그건 아닙니다. 연기는 좋았습니 다. 특히 눈빛이 마음에 듭니다. 이 성이 사라진 좀비임에도 불구하고 여자 친구를 지키려는 본능이 남아 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 갈등 하는 듯한 저 눈빛은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될 겁니다. 특히 여성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야?”
“대본이랑 다르거든요.” 우중완 감독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 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비들과 필사적으로 육탄전을 벌 여서 여자 친구를 지킨다.) 이게 기존 대본상의 지문이었다. 그렇지만 도경호는 육탄전을 벌이지 않고 야구 배트를 들어 좀비들과 맞 서 싸웠다.
우중완 감독은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그게 마음에 걸리면 직접 물어 봐.”
이규한이 제안하자 우중완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야.”
“네,감독님.”
“얘기 좀 하자.”
도경호를 직접 부른 우증완 감독이 물었다.
“아까 왜 대본과 다르게 연기했 어?”
“야구 배트를 들고 좀비들과 싸운 부분을 말씀하시는 거죠?”
도경호도 자신이 대본상 지문과 다 르게 연기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이런 질문을 받을 것을 예상한
것처럼 바로 대답을 꺼냈다.
“이번 작품에서 제가 맡은 임진호 는 야구 선수입니다. 대학 야구 최 고의 타자 중 한 명이죠. 만약 그런 임진호가 여자 친구를 지키기 위해 서 싸워야 한다면 가장 익숙한 물건 인 야구 배트를 이용할 것이라고 생 각했습니다.”
?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제가 아 니라 교수님의 생각이셨습니다.”
도경호가 말을 마쳤지만 우중완 감 독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혼자서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었 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것은 이규한도 마찬가지였다.
‘전면 재촬영을 해야 하나? 그럼 제작비가 얼마나 상승할까? NEXT 엔터테인먼트에서 순순히 재촬영 요 구를 수용해 줄까?’
머릿속으로 이규한이 바쁘게 계산 하고 있을 때였다.
“반납하겠습니다.”
우중완 감독이 불쑥 말했다.
“갑자기 뭘 반납하겠다는 거야?”
“제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천재 감 독이란 수식어 말입니다. 이렇게 중 요한 부분도 놓치고 지나갔는데 천 재 감독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중완 감독이 자기반성을 하는 것 을 들은 이규한이 말했다.
“우 감독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 어.”
“제가 뭘 착각하고 있습니까?”
“우 감독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가 바뀌었거든. 더 이상 천재 감독이라 고 불리지 않고 로또 감독이라고 불 리고 있어.”
“로또 감독… 이요?”
“무슨 의미인지는 설명해 주지 않 아도 되겠지?”
우중완 감독이 연출했던 작품들의 흥행 성적은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우중완 감독은 멋쩍은 표정으로 고 개를 끄덕였다.
“말 나온 김에 나도 같이 반납할 게.”
“뭘 반납한다는 겁니까?”
“우 감독이 내게 붙여 줬던 천재 제작자란 수식어 말이야. 나 역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지나갔던 것은 마찬가지 였으니 까.”
이규한 역시 자기반성을 했지만 우
중완 감독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저보다는 낫습니다. 61신 촬영을 먼저 하자고 제안하셨던 건 이미 그 부분을 간파했기 때문이잖 습니까?”
“그렇긴 하지.”
“어떻게 깨달으셨습니까?”
우증완 감독의 질문을 받은 이규한 이 웃으며 대답했다.
“우사인 볼트.”
“네?”
“만약 우사인 볼트가 좀비로 변하 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해 봤더니 기존의 좀비와는 다른 좀비
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우사인 볼트가 좀비로 변한다? 이 거 대박 신선한데요.”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