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우리끼리 한잔하자.”
이규한이 최호인과 건배를 하고 술 잔을 비웠을 때였다.
“근데 지유 양은 요새 왜 활동이 뜸해?”
“아버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지유 양이 어디 남인가? 그래서 지유 양이 신곡을 발표했는지 꾸준
히 확인하고 있거든.”
“어머.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 니다. 요새 활동이 뜸하긴 했어요.”
“무슨 이유가 있어?”
“그게……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신곡 작업은 꾸준히 하고 있는 데… 결과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 아서요.”
남지유가 신곡 발표를 미루고 있는 이유에 대해 알게 된 아버지의 표정 이 심각하게 변했다.
“왜 마음에 안 들까?”
“제 생각에는 감정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요.” “감정?”
“네. 가수는 본인의 감성을 노래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 줘 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부 분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아 요.”
“지유 양 생각에는 왜 그런 것 같 아?”
“음. 모르겠어요.”
“내가 알려 줄까?”
“아버님이요?”
“내가 보기엔 지유 양에게 어떤 변 화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아.” “지유 양의 데뷔곡이 ‘손편지’ 맞 지?”
아버지의 질문을 들은 남지유가 깜 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아까 내가 지유 양 팬이라고 했잖 아. 그리고 팬이 이 정도도 몰라서 쓸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냐. 내가 아까 지유 양에게 어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고 말 했지?”
“네,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노래
때문이야. 비슷하거든.”
“뭐가 비슷하단 말씀이세요?”
“가수로 데뷔를 한 이후 지유 양이 부른 노래는 다 분위기가 엇비슷해. 내가 음악에 대해서 잘 모르긴 하지 만… 대충 이유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 …?"
“남지유에게는 이런 노래가 어울린 다,그리고 이런 류의 노래를 부르 면 성공한다,이런 고정관념이 생겼 기 때문에 지유 양에게 비슷한 분위 기의 곡들만 요구하는 거야.”
“아버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거든
남지유가 재차 놀란 표정을 지었 다. 그리고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은 이규한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 지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이규한 이 감탄했을 때였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어 요.”
“새로운 도전?”
“연기요.”
“아,연기. 아주 좋았지.”
“혹시 ‘나를 사랑한 아저씨’란 작
품을 보셨어요?”
“당연히 봤지.”
아버지가 당연하다는 둣 대답한 순 간 남지유가 물었다.
“이규한 대표… 아니,오빠가 시사 회에 초대했겠네요.”
“아냐. 영화관에 찾아가서 내 돈 주고 티켓 사서 봤어.”
“그게 정말이세요?”
“그럼. 팬이 그 정도는 해야지. 그 런데 왜 다른 작품에는 출연을 안 해?”
“저도 출연하고 싶은데……
“그런데?” “출연 제안을 안 해 주시네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남지유의 시선 으
아버지가 아니라 이규한에게 향해 있었다.
그리고 남지유의 시선이 향해 있는 방향을 확인한 아버지가 이규한에게 물었다.
“요새 준비하는 작품이 뭐냐?”
“‘부산행 열차’라는 작품을 준비하 고 있습니다.”
“어떤 영화야?”
“좀비 소재의 영화입니다.”
“좀… 비?” 아버지가 좀비에 대해 모를 거라 판단한 이규한이 설명을 더했다.
“좀비는 정체 불명의 바이러스 등 에 의해서……
“나도 안다.”
“네?”
“이렇게 움직이는 것들 말하는 것 아니냐?”
어깨를 흔들면서 좀비 흉내를 내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이규리가 나섰 다.
“에이,그게 뭐야? 좀비 흉내를 내 려면 이 정도는 내야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이규리가 얼굴 표정을 뒤틀면서 좀비 흉내를 냈다.
후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호인이 한숨 과 함께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내 딸이지만 너도 참……
“너도 참 뭔데?”
“연기 못한다.”
아버지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응을 확인하고 발끈한 이규리 가 남지유에게 말했다.
“지유야,네가 해 봐.”
“내가?” “그래,빨리.”
이규리의 재촉을 받은 남지유가 벌 떡 일어났다.
“자,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마치 오디션이라도 보는 것처럼 좀 비 연기를 펼칠 준비를 하는 남지유 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꾸엑. 꾸에액.”
잠시 후 남지유가 좀비 연기를 펼 쳤다.
“뭐야? 나랑 별반 다른 것도 없 네.”
이규리가 보인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남지유의 연기를 함께 본 이규한의 의견은 달랐다.
‘특이하네.’
이규한이 퍼뜩 떠올린 생각이었다. 남지유가 방금 표현한 좀비.
일반적으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자 주 등장하던 좀비와는 조금 달랐다. 보폭도 작았고,몸동작도 큰 편이 아니었다.
또 표정도 완전히 일그러트리지 않 았다.
‘부끄러워서인가?’
남지유는 오디션을 본 것이 아니 다.
준비 없이 즉석에서 좀비 연기를
펼친 것이었다.
게다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 앞에 서 연기를 하는 것과 지인들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은 또 달랐다.
배우들이 가족과 함께 자신이 출연 한 작품을 시청하지 않는 이유는 쑥 스럽고 멋쩍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지유 역시 쑥스러워서 좀 비 연기를 펼치는 동작이나 표정이 작았을 수도 있다고 이규한이 막 판 단했을 때였다.
“확실히 연기자는 어디가 달라도 다르네.”
그 평가를 들은 이규리가 재차 발 끈했다.
“뭐가 다르다는 거야? 내가 보기엔 별반 다른 것도 없는데.”
“아냐. 달라.”
“대체 뭐가 다른데?”
이규리의 추궁에 아버지의 말문이 막혔을 때였다.
“옛말 하나 틀린 게 없네.”
이규리가 혀를 차며 덧붙였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더니.”
“며느리?”
“앗,나의 실수.”
남지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 을 확인한 이규리가 재빨리 사과했 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기꺼운 표정으로 술잔을 들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어? 살다 보면 말실수도 하고 그런 거 지. 자,전부 같이 한잔하자.” “저 혼자 갈 수 있는데.”
모범택시 뒷좌석에 함께 타고 있던 남지유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고개를 흔들었다.
“혼자 보냈다가는 아버지께 불벼락 이 떨어질 겁니다.” “아,혼자 보냈다가는 아버지께 혼 날 거야.”
이규한이 실수를 깨닫고 하대하자 남지유가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물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불 편하셨죠?”
“아냐. 오히려 반대야.”
" <……?"
“지유가 자주 찾아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왜요?”
“아버지가 저렇게 즐거워하시는 모 습 오래간만에 봤거든.”
“다행이네요.”
“꼭 아버지 때문이 아냐.”
“그럼요?”
“나도 즐거웠어.”
이규한이 대답하자 남지유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변화를 확인한 이규한이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
“대표님이… 아니,오빠가 많이 변 한 것 같아서요.”
“내가 변했다고? 어떻게 변했는 데?”
“음. 힘이 좀 빠진 것 같아요.”
남지유가 잠시 망설인 끝에 꺼낸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고개를 갸웃 했다.
제대로 말뜻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였다.
“그동안의 오빠는 저와 같은 극성 을 지닌 자석 같았어요. 제가 다가 가려고 할 때마다 오빠는 강하게 절 밀어냈죠. 그런데 이제는 밀어내는 힘이 약해진 것 같아요.”
남지유가 더한 설명을 듣고서 비로 소 말뜻을 이해한 이규한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창작자는 다르네.’
천편일률적이지 않은 비유라는 생 각이 들어서 내심 감탄하던 이규한 이 입을 뗐다.
“요즘 들어서 생각이 좀 바뀌었 어.”
“어떻게 생각이 바뀌었어요?”
“내가 가정을 꾸리게 되면 상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꽤 오랫동
안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
“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이미 한 차례 경험해 봤거든.’
이게 방금 남지유가 던진 질문에 대한 정답이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정답 대신 다른 대답을 꺼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과 확신이 없 었어. 그런데 요즘은 좀 바뀌었어.”
“어떻게 바뀌었는데요?”
“미리 겁먹고 도망치지 않기로.”
이규한의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영화제작자로서 꾸준히
성공을 거두며 확실히 자리를 잡았 다는 점이었고,두 번째는 차혜선과 의 대화였다.
“오히려 감정의 진폭을 키우세요. 준경이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나쁜 일이 있으면 화를 내세요. 그래야 감정이 무뎌지지 않 습니다. 그리고 순간을 즐기세요. 언 젠가 좋은 순간이 찾아올 거다,그 때까지 참고 기다리지 말고 마음껏 기뻐하세요.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 라 웃다 보면 행복해지거든요.” 당시 이규한이 건넸던 충고였다.
차혜선을 위해서 던진 충고였지만, 스스로를 위한 충고이기도 했다.
이규한 역시 그동안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까.
“다행이다.”
“왜 다행이라는 거야?”
“희망을 엿봤으니까요.”
“무슨 희망?”
이규한이 질문했지만 남지유는 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생긋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제 연기에 대한 평가를 해 주세 “어떤 연기?”
“좀비 연기요.”
“아,그거.”
“혹시 평가를 할 가치도 없어서 일 부러 말씀을 안 하셨던 건가요?”
“그런 것 아냐. 아버지 말씀이 너 무 많으셔서 평가를 할 기회가 없었 던 거지.”
“그럼 지금 해 주세요.”
“음.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어.”
이규한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남지 유가 두 눈을 빛냈다.
“왜 특이하다고 생각하셨어요?” “일반적인 좀비 연기와는 달랐거 든. 그렇게 표현했던 이유가 있어?”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그냥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슨 뜻이야?”
“갑자기 좀비 연기를 해야 하는 상 황이 닥치고 난 후 문득 생각했어 요. 만약 내가 좀비가 된다면 어멸 까라고.”
남지유의 이야기를 듣던 이규한이 지적했다.
“좀비는 이성이 없어.”
“저도 알아요.”
“그런데?” “이성은 사라지더라도 본능은 남아 있지 않을까요?”
“본능은 남아 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될까요?”
잠시 고민하던 남지유가 다시 입을 뗐다.
“우사인 볼트는 알죠?”
우사인 볼트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였다.
100m를 9초 58에 주파해서 세계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최고의 단 거리 육상 선수인 우사인 볼트에 대 해서는 이규한도 알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어. 그런데 우사인
볼트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낸 거
야?”
“만약 우사인 볼트가 좀비가 되면 어떨까요?”
“글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질 문이었다. 그래서 이규한이 바로 대 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남지유가 덧붙였다.
“엄청 빨리 달리는 좀비가 됐을 거 란 생각을 했어요.”
“빨리 달리는 좀비가 될 거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이성은 없지만 본능은 남아 있을
테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서 아까 좀비 연기를 할 때 일부러 동작을 작게 했던 거였어요. 제가 목소리를 아끼기 위해서 평소 에 작게 말하는 편이라 소리도 작게 냈고요.”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