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화
“작업을 하나 같이하고 싶어서.”
“어떤 작업이요?”
“윤색을 부탁하고 싶어.”
이규한이 윤색 작업을 맡기고 싶다 는 용건을 밝히자 안유천이 표정을 슬쩍 일그러트렸다.
‘내키지 않는 건가?’
그 표정 변화를 확인한 이규한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윤색 작업은 별로 안 내켜?”
“그게……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안유천을 확인한 이규한이 다시 입 을 뗐다.
“조건부터 얘기할게. 일단 윤색료 는 오천만 원을 책정했어.”
이규한이 윤색료로 오천만 원을 책 정했다는 얘기를 마치자마자 안유천 이 탁자 아래로 떨구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방금 얼마라고 했습니까?”
“진짜 오천만 원입니까?”
“그래.”
이규한이 재차 확인시켜 준 후 안 유천을 살폈다.
언제 찡그렸냐는 둣 다시 표정이 밝아진 것을 확인한 이규한이 물었 다.
“혹시 아까 내키지 않아 한 이유가 돈 때문이었어?”
“그게 컸죠. 윤색료는 많지 않으니 까요.”
안유천이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을 들은 이규한이 물었다.
“돈이 급한 건 아닌데,좀 쉬고 싶 어서요.”
“왜? 어디 아파?”
“그건 아닙니다. 실은 각본이나 각 색 작업 하나 해서 목돈을 쟁여 놓 고 신혼을 좀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것 때문이라면 문제는 해결됐 네. 이번에 나랑 작업하고 윤색료 받아서 신혼을 즐기면 되니까.”
“그렇긴 한데……
안유천이 말끝을 흐리는 것을 확인 한 이규한이 다시 물었다.
“또 뭐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왜입니까?”
“왜냐니?”
“윤색료가 너무 많은데요?” 각본과 각색 그리고 윤색.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단계였지만, 작가료는 천차만별이었다.
작가의 명성에 따라서 차이가 존재 하긴 했지만 각본이 가장 작가료가 많았고,각색과 윤색 단계로 작가료 가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이유는 작업의 양과 난이도가 달라서 였다.
윤색은 시나리오의 줄거리와 캐릭 터는 건드리지 않고 작은 오류를 바 로잡거나 기존의 캐릭터들을 좀 더 입체적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따라서 작업의 양도 많지 않은 편 이었고,수정의 난이도도 높지 않았 다.
그래서 윤색의 경우 일반적으로 지 급하는 작가료가 오백만 원 선이었 다.
그런데 이규한은 안유천과 김단비 작가가 ‘부산행 열차’의 윤색을 맡 는 대가로 오천만 원의 작가료를 책
정했다고 밝혔다.
기존 윤색료의 10배 가량인 윤색 료.
그로 인해 두 작가가 놀란 것이었 다. 그리고 안유천은 윤색료가 예상 보다 많다는 것을 알고 나자 일단 의심부터 했다.
“수상한데요.”
“뭐가 수상해?”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배웠거든 요. 윤색료로 오천만 원이나 주시려 는 데는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어떤 이유?” “윤색이 아니라 각색을 시키려는 것 아닙니까?”
“응?”
“기존의 작품이 너무 형편없어서 각색 같은 윤색을 부탁하려는 것 아 닙니까?”
안유천이 두 눈을 가늘게 좁힌 채 질문했다.
“유천아.”
“왜 갑자기 목소리를 깔고 그러세 요? 사람 불안하게시리.”
“우리가 어떤 사이냐?”
“제작자와 작가 사이죠.”
안유천이 퉁명스레 대꾸하는 것을
들은 이규한이 살짝 언성을 높였다.
“야,우리 사이가 고작 그것밖에 안 돼? 지금까지 작업을 얼마나 많 이 했는데,내가 널 속이겠냐?”
“그건… 아니죠.”
“그러니까 좀 믿고 살자. 이번엔 말 그대로 윤색이야.”
이규한이 강조하자 안유천이 비로 소 안심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윤색료를 비싸 게 책정하셨어요?”
“그 정도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 ‘……?"
“업계 톱클래스 작가들이니까 그
정도 받아도 돼.”
“역시… 사람은 성공하고 봐야 해 요. 사방에서 돈을 못 줘서 안달이 네요.”
안유천이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물었 다.
“무슨 소리야?”
“실은 얼마 전에 각색 제안이 들어 왔었거든요. 무슨 작품인지 아세 “어떤 작품인데?”
안유천이 대답했다.
“바로 ‘어메이징 히어로즈’였습니 “어메이징 히어로즈?”
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다.
비록 지금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제작에서 손을 뗐지만,이규한은 불 과 얼마 전까지 ‘어메이징 히어로 즈’의 공동 제작자였다.
그래서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진 행 상황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었 다.
그런데 안유천에게서 ‘어메이징 히 어로즈’의 각색 제안을 받았다는 이 야기를 듣고 나자 흥미가 생긴 것이 다.
“그런 일이 있었어?”
이규한이 관심을 드러내자 안유천 이 더욱 신이 난 목소리로 물었다.
“각색료로 얼마를 제시했는지 아세 요?”
“얼마를 제시했는데?”
“일억이요.”
‘일억을 제시했다고?’
안유천과 김단비.
두 작가가 업계 톱클래스 작가들이 라고 해도 각색료로 일억은 많은 편
게다가 ‘어메이징 히어로즈’는 기 존 촬영분을 폐기하면서 이미 70억 가량의 손실을 본 상태였다.
‘그런데 두 작가에게 각색료로 일 억을 제시했다는 게 의미하는 것 은?’
자신의 예상대로 김대환 대표가 ‘어메이징 히어로즈’에 다시 100억 이상의 제작비를 쏟아붓기로 결심했 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각색을 맡기로 했어?”
이규한이 서둘러 질문하자 안유천 이 고개를 흔들었다.
“단칼에 잘라서 거절했죠.”
“왜 거절했어?”
“제가 또 의리 빼면 시체 아닙니
까?”
“ 이,
“대표님한테 ‘어메이징 히어로즈’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들었는데 저희가 어떻게 그 작업을 맡겠습니까?”
안유천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한 후 덧붙였다
“그런 이유로 거절했더니 금액이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바뀌었다는 거야?”
“일억 오천 준다더라고요.” “일억 오천?”
이규한이 깜짝 놀랐다.
각색료로 작가들에게 일억 오천을 지급하는 케이스.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결심했네.’
이건 김대환 대표가 ‘어메이징 히 어로즈’에 새로 100억이 넘는 제작 비를 쏟아붓기로 결심했다는 증거로 충분했다.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네.’
이규한이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 물 었다.
“또 거절했어?” “당연하죠. 제가 의리 빼면 시체라 니까요.”
“그렇지만
자신과의 의리 때문에 포기하기에 는 좀 아까운 기회라는 생각을 이규 한이 막 했을 때였다.
“김대환 대표도 어지간히 똥줄이 타는 것 같습니다.”
“응?”
“저와 단비가 업계 톱클래스 작가 이긴 하지만 각색료로 일억 오천은 좀 과하거든요. 이게 김대환 대표가 똥줄이 타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안유천의 이야기에는 틀린 부분이
그렇지만 이규한은 슬쩍 눈살을 찌 푸렸다.
“명색이 업계 톱클래스 작가인데 표현이 그게 뭐야?”
“제 표현이 어때서요?”
“똥줄이 탄다는 표현은 너무 저급 하잖아.”
이규한이 지적했지만 안유천은 당 당하게 대꾸했다.
“그거보다 더 어울리는 표현이 없 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무슨 소문?”
“‘어메이징 히어로즈’는 망작이 될 확률이 높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 에 아마 실력 좋은 각색 작가를 구 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시세 보다 훨씬 많은 각색료를 제시하면 서 저희에게 각색 제안을 했을 겁니 다.”
‘내 계산대로 굴러가고 있네.’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흡족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사과할게. 똥줄이 탄다는 표현보 다 지금 상황에 더 어울리는 표현은 없네.” “자,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일 얘 기를 좀 하자. ‘부산행 열차’의 윤색 작업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 하는 부분은……
이규한이 본격적으로 ‘부산행 열 차’의 윤색 방향에 대해서 운을 됐 을 때 마치 기다렸다는 둣이 회의실 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회의실 안 으로 들어온 것은 백진엽이었다.
“왜? 사무실에 무슨 일 있어?”
“별일 없습니다.”
“그런데 왜 들어왔어?”
“저도… 회의에 참석하고 싶어서 요.”
백진엽이 쭈햇거리며 대답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내가 부른다는 걸 깜빡했다. 여기 앉아.”
이규한이 비어 있던 옆자리에 앉으 라고 권했다.
거절하지 않고 바로 옆자리에 앉는 백진엽을 살피던 안유천이 물었다.
“누굽니까?”
“백진엽 피디. 인사해.” 이규한이 백진엽을 소개하자 안유 천이 다시 질문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직원입니 까?”
“맞아.”
“그런데 왜 처음 보는 겁니까? 혹 시 신입 사원입니까?”
“신입 사원 아냐.”
“그런데 왜……?”
“그동안 한 번도 못 봤냐고?”
“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 알지?”
“당연히 알죠.”
“그럼 프로토스 종족 중에 ‘다크 템플러’라는 유닛도 알아?”
스타크래프트는 한때 국민 게임이 라고 불렸던 인기 게임이다.
테란,프로토스,저그.
세 가지 종족 중 한 종족을 선택 해서 상대와 경기를 해 승부를 겨루 는 고전 명작 전략 게임으로,프로 토스 종족의 유닛 중 하나가 바로 다크 템플러였다.
다크 템플러의 가장 큰 특성은 상 대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
안유천이 대답하기 전에 백진엽이 먼저 나섰다.
“저와 다크 템플러가 비슷하단 뜻 입니까?”
“맞아.”
이규한이 대답하자 백진엽의 표정 이 밝아졌다.
“회사에서 저의 공헌도가 무척 높 다는 뜻이로군요.”
“왜 그렇게 생각했어?”
“다크 템플러의 공력력이 어마무시 하지 않습니까?”
다크 템플러라는 유닛의 또 다른 특성 중 하나가 공격력이 높다는 점 이었다.
그리고 잡기에 무척 능한 편인 백 진엽은 다크 템플러라는 유닛의 특 성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고 있었다.
‘그런 뜻이 아닌데.’
이규한이 속으로 입맛을 쩝 다셨 다.
조금 전에 백진엽을 소개하면서 ‘다크 템플러’라는 유닛을 예로 든 이유.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직원이긴 하 지만 존재감이 무척 희미하다는 의 미였다.
그러니 백진엽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셈이었다.
‘하긴 꿈보다 해몽이니까.’
이규한이 백진엽을 다크 템플러에 비유한 진짜 이유에 대해서 밝히는 것을 포기하고 장단을 맞춰 주었다.
“백 피디 말대로야. 회사에 공헌도 가 엄청나. ‘부산행 열차’의 초고 시 나리오도 백 피디가 직접 썼거든.”
“그래요?”
두 작가가 백진엽에게 새삼스러운 시선을 던지는 것을 확인한 이규한 이 덧붙였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직원이기 전 에 ‘부산행 열차’의 초고 시나리오 를 쓴 작가이기도 하니까 회의에 참
석해도 되지?”
“물론입니다.”
“네,당연히 그래야죠.”
안유천과 김단비 작가의 허락을 득 하는 데 성공한 후,이규한이 다시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까 하던 말을 마저 하면 ‘부산 행 열차’의 윤색 작업에서 내가 가 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로맨스 야.”
“로맨스요?”
“그래. 그것도 좀 특이한 로맨스 야.” 이규한이 김단비 작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야기하자 안유천이 발 끈하며 나섰다.
“왜 단비만 보고 얘기하십니까?”
“응?”
“저도 로맨스 잘 씁니다.”
“누가… 그래?”
“김치훈 대표님이요.”
“렉서스 필름 김치훈 대표?”
“마침 알고 계시네요.”
안유천이 어깨를 으쓱하는 것을 확 인한 이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김치훈 대표가 네게 로맨스를 잘 쓴다고 말했다고?” “그렇다니까요.”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음. 육 개월쯤 전에요.”
“그때 다른 말은 안 했어?”
“다른 말이요?”
“예를 들면 계약을 하자는 이야기 말이야.”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