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좀비 좋아하세요? (1) 차혜선의 이야기가 끝난 순간 장준 경의 말문이 막혔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서운한 기색 대신 미안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미안.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미처 몰랐네.”
“괜찮아. 이제 익숙해졌으니까.”
장준경이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내쉰 순간,조용히 앉아서 고기를 굽던 이규한이 끼어들었다.
“제수씨,고기 탑니다.”
“네? 아,네.”
“너도 얼른 먹어. 소고기는 너무 익으면 질겨서 맛없어.”
“알았어.”
두 사람이 젓가락을 드는 것을 확 인한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과한 오지람이 아닐까?’
변해 버린 차혜선의 모습.
무척 위태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미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에 두 사람의 불행한 미래가 훤히 그려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규한이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남의 연애사 에 끼어드는 것이 과연 맞는지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나서는 게 맞지 않을까?’
장준경은 이규한의 오랜 친구였다.
그래서 그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한참의 망설임 끝에 이규한이 결심 을 굳히고 입을 뗐다.
“제수씨,주제넘을 수도 있지만 제 가 충고 하나 드릴까요?” “어떤 충고요?”
“이 녀석과 헤어지세요.”
“준경 씨와… 헤어지라고요?” 예상치 못했던 충고였기 때문일까.
차혜선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장준경도 마찬가지였 다.
“갑자기 왜 우리더러 헤어지라는 거야?”
살짝 언성을 높이는 장준경에게 이 규한이 대답했다.
“끝이 보여서.”
“끝?”
“너와 결혼하면 제수씨가 행복하지 않을 거야.”
“야,너 취했어?”
“안 취했어. 멀껑해.”
“그런데 왜 그래? 악담이 너무 심 하-
“악담이 아냐.”
“그럼?”
“영화 포기할 수 있어?”
이규한의 질문을 받은 장준경이 움 찔했다.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던지는 건 데?”
“대답이나 해.”
“포기 못 해.”
“이유는?”
“영화를 만드는 건 힘들어. 그렇지 만 즐거운 일이기도 해. 그래서 머 릿속에 온통 영화 생각이 가득해. 그런데 어떻게 포기할 수가 있겠 어?”
장준경이 꺼낸 대답은 이규한의 예 상에서 빗나가지 않았다.
그 대답을 들은 후 이규한이 차혜 선을 바라보았다.
“들으셨죠? 준경이는 절대 영화를 포기 못 할 겁니다.”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계속 준경이를 만날 겁 니까?”
“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아까와 달랐다.
차혜선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 설였다.
“우리의 끝은 불행해질까요?”
잠시 후,그녀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규한 오빠는 어떻게 알아요?”
‘먼저 경험해 봤으니까요.’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미 경험했기 에 이규한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전 처와 차혜선이었다.
“이제 화도 안 나.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아.” 그녀 역시 살기 위해 감정의 진폭
을 줄였다.
그렇지만 감정의 진폭을 줄이는 것 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애정은 물론이 고 분노라는 감정조차 남아 있지 않 게 됐으니까.
“봤습니다.”
“뭘 봤다는 거죠?”
“결혼한 선배들과 동료가 많습니 다. 그들이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 던 중에 헤어지는 것을 많이 봤습니 다.” “그래서 우리도 불행해질 거라고 확신하시는군요.”
“아니요.”
“아니라고요?”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예외도 있 거든요.”
이규한이 웃으며 덧붙였다.
“제수씨도 준경이를 포기하지 못한 다고 하셨죠?”
“네,
“설령 그 끝에 불행이 기다리고 있 다고 해도 계속 달려갈 테고요?”
“분명히 그럴 겁니다.”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온 순간,이 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제가 두 사람이 극히 일부분의 예 외에 속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 릴까요?”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는 뜻인가요?”
“네,알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 대체 뭐죠?”
“제수씨가 변해야 합니다.”
“내가 변해야 한다?”
차혜선이 그 말을 되뇔 때 장준경 이 끼어들었다.
“나는? 나는 안 변해도 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예전의 나와 똑같거든.’
이규한이 속으로 대답했을 때 차혜 선이 말했다.
“저도 알아요. 준경 씨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현명하네.’
차혜선을 보며 이규한이 한 생각이 었다.
행복할 것만 같던 결혼 생활이 삐 거덕대는 이유는 서로의 다름을 인 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른 부분을 고치려 할 때 싸 움이 시작된다.
그런데 차혜선은 결혼 전임에도 불 구하고 이미 장준경의 다름을 인정 했다.
또 바꾸려 들지도 않았다.
“제수씨한테 잘해라.”
이규한이 장준경에게 충고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제수씨 놓치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것 같아서 그래.”
“진짜 취했냐?”
“안 취했다니까.”
“그런데 왜 말이 자꾸 바뀌어? 아 까는 우리가 결혼하면 불행해질 테 니까 헤어지라고 악담을 퍼부었잖 장준경이 따지듯 던진 질문에 이규 한이 대답했다.
“도중에 생각이 바뀌었어. 제수씨 만 바뀌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
“제가 어떻게 바뀌면 되죠?”
차혜선이 이규한에게 물었다.
“억지로 애쓰지 마세요.”
“네?”
“상처받기 싫어서 감정의 진폭을 최대한 줄이고 있다고 하셨잖습니 까? 그러지 말란 뜻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감정의 진폭을 키우세요. 준경이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나쁜 일이 있으면 화를 내세요. 그래야 감정이 무뎌지지 않 습니다.”
“ <?
“너무 어려운가요?”
“네.”
“그럼 좀 더 쉽게 말씀드릴게요. 순간을 즐기세요. 언젠가 좋은 순간 이 찾아올 거다,그때까지 참고 기 다리지 말고 마음껏 기뻐하세요. 행 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다 보면 행복해지거든요.” 불교에서 참선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참구하는 문제를 뜻하 는 용어였다. 그리고 차혜선은 마치 어려운 화두를 만난 것처럼 신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차혜선이 말했다.
“기뻐해도 되는 일이죠?”
“네. 많이 기삐하셔도 됩니다. ‘베 테랑들’은 천만 영화가 될 테니까 요. 그리고 제수씨는 천만 영화를 제작한 대한민국에 몇 안 되는 실력 있는 제작자와 만나고 있는 겁니 다.”
비로소 차혜선의 입가에 미소가 번 졌다.
‘웃으니까 보기 좋네.’
이규한이 속으로 생각할 때,일식 집 룸의 문이 열렸다.
“어? 우 감독이 여기 어떻게 왔 어?”
우중완을 발견한 장준경이 놀란 표 정으로 물었다.
“불러서 왔죠.”
“누가? 난 안 불렀는데?”
“내가 불렀어.”
이규한이 대답한 후 자리에서 일어 섰다.
“저와 따로 얘기 좀 하시죠.’ 비어 있던 룸으로 들어간 이규한이 우중완 감독과 마주앉았다. 종업원에게 부탁한 녹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이규한이 물었다.
“‘베테랑들’의 박스오피스 순위와 관객 수 확인하셨죠?”
“당연히 확인했습니다.”
“기분이 어떠세요?”
“얼떨떨합니다.”
“왜요?”
“아직 실감이 안 나네요.”
천재 감독이란 수식어가 이름 앞에 붙었지만,우중완 감독이 연출했던 작품은 대부분 흥행에 실패했다.
그의 연출작 가운데 박스오피스 순 위 1위에 오른 것은 ‘베테랑들’이 처음이었다.
‘딱 적기야.’
우중완 감독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 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를 오늘 술자리에 부른 이유.
‘베테랑들’이 박스오피스 순위 1위 에 오른 것을 축하하기 위함도 있었 지만,더 큰 이유는 그와 계약을 맺 기 위함이었다.
“머잖아 흥행 감독이 됐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베테랑들’ 이 천만 영화가 될 테니까요.”
“천만 영화요?”
여전히 실감 나지 않기 때문일까. 천만 영화라는 단어를 되뇌고 있는 우중완 감독에게 이규한이 말했다.
“제가 실감이 나게 해 드리겠습니 다.”
“어떻게요?”
“저와 차기작 계약을 하시죠.”
“차기작 계약이요?”
우증완 감독이 난색을 드러냈다.
예상과 다른 반응이었기에 이규한 이 살짝 당황했다.
‘벌써 차기작 계약을 한 건가?’
‘베테랑들’이 개봉 첫날 박스오피 스 순위 1위에 오른 상황.
더구나 첫날 70만 명이 넘는 많은 관객을 동원했고, 작품을 관람한 관 객들의 평도 좋은 편이었다.
이미 다른 제작사가 발 빠르게 움 직여서 우중완 감독과 접촉했을 가 능성도 충분하다고 판단하며 이규한 이 물었다.
있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행이다.’
이규한이 비로소 안도하며 다시 물 었다.
“그럼 왜 망설이시는 겁니까? 혹시 ‘베테랑들’ 제작 과정에서 불편함을 느끼셨습니까?”
“그게… 조금 불편하긴 했습니다.” 녹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우중완 감독이 덧붙였다.
“손발이 다 묶인 느낌이었거든요.”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쓰게 웃었다.
‘우증완 감독은 가만히 내버려 두 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촬영을 할 때는 물론이고 편집을 하는 마지 막 순간까지 방심하면 안 된다.’
이규한은 이렇게 판단했기 때문에 ‘베테랑들’의 공동 제작자인 장준경 에게 부탁해서 우중완 감독을 밀착 감시했다.
그로 인해 우중완 감독은 불편함을 느꼈던 것이다.
“다음 작품은 제가 하고 싶은 이야 기를 연출하고 싶습니다.”
우중완 감독이 꺼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물었다.
“시나리오 작업을 마친 작품이 있 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베테랑들’에 올인 하느라 시나리오 작업을 할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렇지만 소재는 있습 니다.”
“어떤 소재입니까?”
“좀비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좀비라고 했습니다. 설마… 좀비 를 모르시는 건 아니죠?”
이규한이 대답했다.
“저도 좀비 압니다. 그리고… 좀비 영화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외지인이 거의 찾아오지 않는 두 메산골. TV도 공중파만 나올 정도 로 깊은 두메산골에 좀비들이 찾아 오는 겁니다. 그런데 산골 사람들은 좀비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그래 서 이들이 좀비라는 사실조차 모르 죠. 그냥 몸이 좀 불편한 아픈 사람 이라 여기고 맙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타나고 난 후 마을에 변고가 생기 기 시작하자 마을 촌부들이 생존을 위해서 좀비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 합니다. 그 대결의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마을 촌부들이 좀비들을 물리치고 인류를 구했죠.”
우중완 감독이 놀란 표정을 지은 순간 이규한이 덧붙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마을 촌부가 아니라 호랑이가 인류를 구했죠.”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봤거든요.”
“네?”
“‘좀비와 호랑이’라는 단편영화를 봤습니다.”
‘좀비와 호랑이’는 우중완 감독이 제작한 단편영화 중 한 편이었다.
그 단편영화를 봤다고 솔직히 대답 하자 우중완 감독이 더욱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괜찮았죠?”
“그게……
“좀비와 호랑이의 대결,신선하지 않습니까?”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