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2)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거냐?”
“그건……
“냉정하게 평가해 보거라. 강태경 대표와 너,둘 중 누가 더 뛰어난 제작자인 것 같으냐?”
김기현은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 분한 표정으로 지그시 입술을 깨물
고 있는 김기현을 바라보던 김대환 이 속으로 혀를 찼다.
‘실력은 없고 욕심은 많다. 그런데 자존심은 강하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콩깍지가 벗겨 졌기 때문일까.
자식의 민낯이 보였다.
“이규한 대표에게 큰 빚을 졌군.” 김대환이 혼잣말을 꺼냈다.
이규한 덕분에 김기현이 얼마나 한 심한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김대환이 덧붙였다.
“앞으로 스카이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는 작품의 시나리오는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 투자 심사를 넣지 마라.”
“클릭한다?”
이규한이 마우스를 막 클릭하려 할 때, 장준경이 손을 뻗었다.
덥썩.
마우스를 쥔 이규한의 손을 잡은 장준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기다려 봐.”
“왜?”
“마음의 준비가 안 끝났어.”
장준경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한 숨을 내쉬었다.
이규한이 클릭해서 확인하려는 것 은 어제 개봉한 ‘베테랑들’의 박스 오피스 순위와 일일 관객 수였다.
그렇지만 컴퓨터 앞에 앉은 후 십 분이 넘도록 클릭을 하지 못하고 있 었다.
장준경이 계속 막고 있었기 때문이 다.
“대체 언제 마음의 준비가 끝나는 데?” “거의 다 됐어.” “십 분 전에도 똑같이 말했거든?”
“야,너도 생각해 봐라. 이번 영화 5년 만에 내놓는 거다. 그 5년이란 인고의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상을 확인하기 직전인데 내가 안 떨리겠 냐? 십 분도 짧아.”
“알아.”
“알면서 왜 그렇게 서둘러?”
“안 바뀌거든.”
“응?”
“계속 확인하는 걸 미룬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진 않는다는 거지.”
“그렇긴 하지만……
“최선을 다했잖아. 그러니까 이제
결과를 확인하자.”
“???그래. 알았다.”
장준경이 마침내 결심을 굳힌 듯 대답했다.
딸깍.
그 대답을 듣고서 이규한이 마우스 를 클릭했다.
‘얼마나 관객이 들었을까?’
이규한이 모니터를 바라볼 때였다. 와락.
장준경이 몸을 날려 모니터 앞을 막아섰다.
“뭐 해?”
“아니야.”
“뭐가 아니란 거야?”
“마음의 준비가 다 된 줄 알았는데 아직 아니었어.”
필사적으로 모니터를 막고 있는 장 준경을 확인한 이규한이 결국 한숨 을 내쉬었다.
“배고프다.”
“나도 배고파.”
“그러니까 빨리 확인하자.”
“아직 안 된다니까. 좀 참아.”
“뱃가죽이 등가죽과 조우할 지경이 다. 더는 못 참아.” 이규한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장준 경과 몸싸음을 벌였다.
완강하게 버티는 장준경과 이규한 의 몸싸움이 격해졌을 때였다.
벌컥.
대표실의 문이 열리고 김미주가 들 어왔다.
“지금 뭐 하세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는 김미주를 발견한 이규한이 석 상처럼 그대로 얼어붙었을 때였다.
“설마… 아니죠?”
“미주 씨,지금 뭘 생각하는 거 야?” 김미주는 대답 대신 서로 끌어안고 있는 이규한과 장준경을 위아래로 훌어 보았다.
그 시선을 확인한 이규한이 서둘러 말했다.
“오해야.”
“상관없어요.”
“응?”
“취향은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 하는 편이거든요.”
“오해라니까.”
이규한이 재차 변명을 꺼냈을 때였 다.
“내 인센티브만 확실히 챙겨 주면 김미주가 불쑥 말했다.
“인센티브?”
“74만이에요.”
“74만은 또 뭐야?”
“첫날 관객수요.”
? …?"
" ‘?”
“이 정도면 천만 관객 돌파할 테니 까 인센티브 받을 수 있지 않겠어 김미주가 말을 마친 순간,장준경 이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런 그가 모니터를 확인했다.
“진짜… 74만이네.”
잠시 후,그가 격앙된 목소리로 소 리 쳤다.
‘많이 들었네.’
‘베테랑들’의 개봉 첫날 스코어는 74만 명.
대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관객이 든 셈이었다.
여전히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 하던 장준경이 한참 만에 입을 됐 다.
“이규한.”
“내가 성공할 거라고 했…… “사랑한다.”
장준경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규한을 덥썩 안았다.
쪽.
그리고 이규한의 뺨에 입을 맞추었 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황한 이규한이 장준경을 밀치기 위해 애쓰다가 김미주를 바라보았 다.
“미주 씨.”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
“제가 방해가 됐네요.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
김미주가 서둘러 몸을 돌렸다.
“오해라니……
광.
이규한이 변명을 끝마치기도 전에 대표실의 문이 닫혔다.
딩 동.
벨이 울린 순간 이규한이 재빨리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사무실 문을 열었던 김미주가 벨을 누른 여자에게 물었다.
“누구세요?”
“내 손님이야.”
이규한이 문 앞으로 다가가서 여자 에게 인사했다.
“제수씨,오랜만입니다.”
“네,오랜만이에요.”
이규한이 여자와 인사를 나누는 모 습을 지켜보던 김미주가 작은 목소 리로 물었다.
“누구예요?”
“미주 씨가 하고 있는 오해를 풀어 줄 사람.” 김미주에게 대답했을 때 장준경이 나왔다.
“왔어?”
“응. 좀 늦었지? 차가 막혀서.”
“괜찮아.”
장준경과 여자가 다정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을 바라보던 이규한이 김미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준경이 애인이야.”
“신기하네.”
“뭐가 신기해?”
“애인도 있는데 왜 대표님을 사랑 해요?” “오해라니까.”
“내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요?”
“아까 그런 상황이 벌어졌던 건 너 무 기뻐서였어. 쉽게 말해서 월드컵 거리 응원전이랑 비슷해.”
“월드컵 거리 응원전이 여기서 갑 자기 왜 나와요?”
“거리 응원 해 봤어?”
“그걸 왜 해요?”
“응?”
“집에서 편하게 TV로 보면 되지.” ‘힌결 같네.’
딱 김미주에게 어울리는 대답이란
생각을 하며 이규한이 다시 물었다.
“그래도 월드컵 때 거리 응원을 하 는 걸 뉴스에서라도 봤을 것 아냐?” “보긴 했죠.”
“그때 우리나라 축구 대표 팀이 골 을 넣으면 어떻게 해?”
“기뻐하죠.”
“기뻐하는 건 당연한 거고,그 기 쁨을 주체하지 못해서 모르는 사람 과도 막 끌어안잖아?”
“그러니까 아까 그게 기쁨의 표현 이다?”
“맞아.”
“알았어요.”
“이해했다고요.”
김미주가 시크한 목소리로 꺼낸 대 답을 들은 이규한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오해를 풀기 위해서 장준경의 연인 인 차혜선을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사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월드컵 거 리 응원전까지 비유로 들어 가면서 열심히 설명한 것이 허무하게 느껴 질 정도로 김미주의 오해가 너무 쉽 게 풀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요.”
“뭔데?”
“‘베테랑들’이 박스오피스 순위 1 위에 오른 게 그 정도로 기쁜 일인 가요?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 작한 영화는 항상 개봉하면 박스오 피스 순위 1위에 올랐잖아요?”
“그게 신기한 일이야.”
“네?”
“우리가 제작한 영화가 매번 박스 오피스 1위에 오르는 게 신기한 일 이라고.”
김미주가 비로소 이해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라 여기로 불렀어?”
“그럴 이유가 좀 있었어. 오해를 풀어야 했거든.”
“무슨 오해?”
“그런 게 있어.”
장준경이 대충 얼버무렸지만 차혜 선은 더 질문하지 않았다.
‘왜 자세히 안 묻는 거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이규한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차혜선과의 만남.
처음이 아니었다.
장준경과 차혜선이 오랫동안 사귀 었기에 이규한도 몇 차례 그녀를 만 났었다.
그리고 이규한이 기억하는 차혜선 은 호기심이 많은 편이었다.
“저렇게 재미없는 영화도 제작해서 개봉하는데 왜 준경 오빠와 규한 오 빠가 제작하는 영화는 개봉을 못 해 요?”
“그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는 조 보영이랑 김민기 진짜 사귀는 것 아 니에요?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 무 애릇하던데.”
“오빠,영화 촬영할 때 나도 조연 으로 출연하면 안 돼요? 제작비도 절감할 수 있고,혹시 제가 연기를 엄청 잘해서 작품을 살릴 수도 있잖 아요?” 영화의 내용은 물론이고,배우들의 사생활에도 호기심을 갖고 종달새처 럼 쉬지 않고 질문을 던졌었다.
그래서 당연히 장준경에게 이유에 대해서 다시 질문할 거라 예상했는 데.
이규한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러고 보니 표정도 좀 어둡네.’
잠시 후,차혜선의 표정도 어둡다 는 사실을 알게 된 이규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연인인 장준경이 제작해서 개봉한 ‘베테랑들’이 첫날 7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순위 1위 에 올랐다는 사실.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혜선의 표정 이 어두운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 는 것이다.
‘집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속으로 생각하던 이규한이 제안했 다.
“나가자.”
“어딜?” “축하주 한잔해야지.”
이규한의 제안을 받은 장준경이 환 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마셔야지. 내가 살 게.”
장준경이 호기롭게 술값을 계산하 겠다고 선언한 순간, 차혜선과 이규 한이 동시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장준경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들 이래? 나도 술 한잔 살 돈 은 있어.”
“준경 씨,마이너스 통장 좀 그만 써요.”
“어떻게 다 갚으려고 그래요?”
차혜선에게서 핀잔을 들은 장준경 의 낯빛이 달아올랐다.
“정산 나오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 니 오늘은 내가 살게.”
“그럴래?”
금세 태세를 전환하는 장준경을 확 인하고 픽 웃은 이규한이 앞장섰다.
“나가자. 제수씨도 오랜만에 찾아 오셨는데 소고기 먹자.”
“표정이 왜 그래?”
스마트폰으로 박스오피스 순위를 바라보고 있는 차혜선을 살피던 장 준경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제작한 ‘베테랑들’이 지금 박스오피스 순위 1위인 거 안 보 여?”
“봤어요.”
“그런데 안 좋아?”
될 둣이 기뻐할 차혜선의 모습을 기대했기 때문일까.
장준경이 살짝 실망한 기색으로 물 었다.
“그게 다야?”
“응.”
“너무 무미건조한 것 아냐?”
장준경이 서운한 기색을 드러내자 차혜선이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내 나름대로 살 방도를 찾은 거 야.”
“무슨 뜻이야?”
“이번 시나리오는 기가 막히게 잘 나왔어. 하정후 거의 잡았어. 이제 도장만 받으면 돼. 두고 봐. 이번엔 무조건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것 같 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이 영화는 개봉만 하면 대박이 날 거 야. 진짜 천만 영화라니까.”
? <……?"
“준경 씨가 내게 했던 말들이야. 기억나?”
“응. 기억나.”
“그때마다 많이 기대했어. 드디어 준경 씨가 제작자로서 성공을 거두 는구나,이런 기대 말이야. 그런데 준경 씨 말처럼 된 적은 없었어.”
“그건……
장준경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을 때 차혜선이 덧붙였다.
“준경 씨와 만나는 기간이 길어지 면서 깨달았어. 영화를 만드는 일이 절대 쉽지 않다는 걸. 그리고 영화 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과 만나면 서 너무 상처받지 않으려면 기대치 를 낮춰야 한다는 것도.”
‘비슷하네.,
차혜선이 담담한 목소리로 꺼낸 이 야기를 듣던 이규한이 속으로 생각 했을 때였다.
“이번엔 진짜 달라. 박스오피스 순 위 가장 높은 곳에 내가 제작한 ‘베 테랑들’이 올라가 있는 걸 봤잖아.”
“나도 봤어.”
“그러니까 이번엔 마음껏 기뻐해도 돼.” 장준경이 힘주어 말했지만 차혜선 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기뻐하긴 이른 것 같아.”
“왜 이르다는 거야?”
“이제 시작에 불과하니까. 이번 작 품이 극장에서 내려오면 다시 새 작 품을 준비할 테고,투자 유치를 받 고 관객들의 평가를 받는 작업을 계 속할 거야. 성공하든 실패하든 간에 그때마다 감정의 진폭이 너무 크면 내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아.”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