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황진호가 햇갈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김미주가 잔을 들어 올리 며 제안했다.
“축하주 한 잔 해요.”
“축하주?”
“뒤통수 한 번 맞고 오억 벌었으면 축하할 일 아닌가요?”
“오억?”
황진호가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이 규한을 바라보았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공동 제작에서 빠지는 조건으로 김대환 대표가 오억을 제 시했습니다.”
이규한이 솔직하게 알려 주자 황진 호가 잔을 들었다.
“그 정도면 축하할 일이 맞네. 그 제안 받아들였지?”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덤으로 한마디 해 줬습니다.”
“욕한 건 아니지?”
김대환 대표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는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의 수장.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와의 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황진호가 우 려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욕은 안 했습니다.”
“다행이네. 그럼 뭐라고 했어?” 이규한이 대답했다.
“후회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였군요.”
축하주(?)를 마신 후 백진엽이 입
을 뗐다.
“무슨 뜻이야?”
“오늘 촬영장 분위기 완전 장난 아 니었거든요.”
“분위기가 어땠는데?”
“엄청 살벌했어요. 김기현 대표가 찾아와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역 정 내는 바람에 김대만 감독이 눈치 살피느라 안절부절못했어요. ”
‘대가 약하니까.’
김대만 감독은 대가 약한 편이었 다.
제작자인 김기현이 불쑥 찾아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모습이 눈 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래서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이규한이 입을 뗐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시나리오 책을 북북 찢었어요.”
“왜?”
“반전이 없다고.”
백진엽의 대답을 듣자 이규한의 입 가에 머물러 있던 미소가 짙어졌다.
“지인경 작가와 작품에 관해서 대 화를 나누던 중에 기막힌 반전이 떠 올랐어. 아직 시나리오 책에는 포함 되어 있지 않지만 그 반전 요소가 추가된다면 시나리오의 월리티가 한 층 높아질 거야.”
예전에 이규한이 꺼냈던 말이었다.
아마 김기현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촬영에 돌입한 시나 리오에는 딱히 반전이라고 부를 만 한 부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규한이 당시에 했던 말이 거짓말 이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김대만 감독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굳이 잘못의 유무를 따지자면 김기 현의 잘못이었다.
이규한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촬영 전에 시나리오조차도 확인하지 않았 던 것은 김기현의 실책이었다.
그 사실을 김기현이 모를 리 없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만 감독에 게 화풀이를 한 이유는 본인의 잘못 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다른 말은 안 했어?”
“자른다고 하던데요.”
“누굴 잘라?”
“김대만 감독이요.”
‘결국 그렇게 됐구나.’
이규한의 예상과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 전개였다.
소주를 한 잔 마신 이규한이 입을 뗐다.
“그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
“그럼요?”
“‘어메이징 히어로즈’는 개봉을 미 룰 거야.”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실.
김대환이 소파에 앉아서 팔짱을 낀 채 김기현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간파했기 때문일까.
김기현은 바닥으로 고개를 떨군 채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냐?”
김대환이 긴 침묵을 깨며 질문을 던지자 김기현이 입을 뗐다.
“감독을… 교체할 생각입니다.”
“감독을 교체한다?”
“SF 장르 영화를 연출한 경험이 있는 윤정민 감독으로 교체해서 촬 영을 이어 나가는 게 최선이라고 생
각합니다.”
김기현이 수습책을 꺼냈다.
그렇지만 김대환의 성에는 차지 않 는 대답이었다.
“기존에 촬영이 끝난 분량은?”
“그건… 그대로 가져가야 할 것 같 습니다.”
“이유는?”
“일정과 제작비 때문입니다. 윤정 민 감독이 처음부터 재촬영을 한다 면 개봉 일정을 맞추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미 극초반부 촬영을 하면 서 투입된 제작비도 적지 않습니다. 제작비가 초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는 조금 미흡하더라도 그대로 가 져가는 편이 옳다고 판단합니다.”
김기현이 미리 준비한 듯 재빨리 대답했다.
그렇지만 김대환은 여전히 그 대답 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윤정민 감독과 접촉은 해 봤느 냐?”
“일단 만나서 긍정적인 대답을 들 었습니다.”
“시나리오는 보여 줬고?”
“아직입니다.”
“다시 만나서 시나리오 책과 김대 만 감독이 초반에 촬영한 분량을 보 여 줘. 그럼 대답이 달라질 거야.”
“하지만……
‘한심한 놈.,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김기현을 발견한 김대환이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어메이징 히어로즈’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김기현은 여러 가지 실수 를 했다.
물론 실수는 다시 바로잡을 수 있 었다.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 었다.
‘영화를… 너무 쉽게 보고 있어.’ 영화를 제작하는 단계에서는 넘어 야 할 벽이 많았다.
감독,배우,투자 심사 그리고 최 종 관문인 관객의 선택까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현은 영화 제작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의 냉혹함을 몰라.’
당장 윤정민 감독부터 김기현의 제 안을 거절할 것이다. 그리고 관객은 무척 냉정한 편이다.
지금 수준의 작품을 개봉한다고 해 도 관객에게 외면받을 게 뻔했다.
‘실패작.’ 자신의 자식이긴 했지만, 김기현은 실패작이었다.
그 실패작을 볼 때마다 울화가 치 밀었다.
그래서 김기현에게서 시선을 땐 김 대환이 김덕원 팀장에게 고개를 돌 렸다.
“개봉을 미뤄야겠네.”
“재촬영을 하시기로 결심한 겁니 까?”
“그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 야.”
“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
뻔히 실패할 것이 보이는 상황.
계속 끌고 가는 것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처럼 무모했다.
그래서 김대환이 결단을 내린 순간 김덕원 팀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기획 개발 단계부터 새로 시 작하신단 뜻입니까?”
“맞아.”
“손해가 막심할 겁니다.”
기존 촬영분을 폐기하는 것만으로 도 큰 손실이 발생했다.
그런데 아직 끝이 아니었다.
작가를 구해서 기획 개발 단계부터
캐스팅 작업까지 새로 시작한다면 또다시 막대한 비용이 발생한다.
게다가 일찌감치 ‘어메이징 히어로 즈’의 흥보를 시작한 상황.
그동안 사용했던 홍보비도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었던 것처럼 아무런 효 과 없이 사라질 터였다.
‘최악!’
그 사실을 김대환이 모를 리 없었 다.
그래서 최악이란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렸던 김대환의 눈앞에 이규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무 쉽게 물러난다 했어. 그때
의심을 했어야 했는데.”
김대환이 한숨을 내쉬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공동 제작에서 손을 땐 다는 것을 명시한 서류에 서명할 당 시, 이규한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의아할 정도로 쉽게 서류에 서명했 다.
당시에는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를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공동 제작에 서 배제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그 부분을 놓치고 지나갔 다.
그렇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니 그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됐다.
‘마치 내가 그 서류를 내밀기를 기 다렸던 사람 같았어.’
이게 의미하는 것.
이규한은 ‘어메이징 히어로즈’가 개봉하기 전에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가 공동 제작에서 배제될 것을 일찌 감치 예상했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이규한은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제작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 다.
아니,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표 현으로는 부족했다.
이대로 촬영을 마치고 개봉하면 무 조건 실패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 따.
‘제대로 당했어. 멍청하긴!’
쾅.
이규한에게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 달은 김대환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 리쳤다.
그 모습을 확인한 김덕원 팀장이 말했다.
“대표님, 지금은 감정에 휘둘려서 는 안 됩니다.‘
“나도 알아. 그런데 그게 쉽지 않 군.” “선택을 내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무슨 선택?”
“작품을 포기하느냐,계속 끌고 가 느냐.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셔 야 됩니다.”
김덕원 팀장의 조언을 들은 김대환 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시나리오 책을 바라보 았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닐까?’
처음부터 다시 ‘어메이징 히어로 즈’를 제작해서 개봉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차라리 여기서 제작을 포기하고 멈 추는 편이 손실을 줄일 수 있는 현 실적인 방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포기할까?’
그래서 김대환의 마음이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제작을 포기하는 쪽으 로 살짝 기울었을 때였다.
“후회하실 겁니다.”
이 말을 던지던 이규한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아직… 안 끝났어.”
“네?”
“포기할 수 없단 뜻이야.” 새파랗게 젊은 일개 제작자에 불과 한 이규한에게 놀아났다는 사실이 김대환을 분노케 만들었다.
그래서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이규한이 보란 듯이 ‘어메이징 히 어로즈’를 제작해서 대한민국을 대 표하는 시리즈물로 만드는 것이 복 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대표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실패의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실패의 원인을 찾아라?”
“그래야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김덕원 대표가 재차 조언을 건넨 순간 김대환이 소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을 때, 김기현은 움찔 하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도 바닥만 바라보며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제가 실수했으니 수습도 제가 하 겠습니다.”
본인의 실수를 인정하고 책임을 지 겠다고 나서는 것이 김대환이 바라 던 김기현의 대응이었다.
그렇지만 김기현은 실수도 인정하 지 않았고,책임을 지겠다고 나서지 도 않았다.
작정한 듯 침묵하고 있었다.
‘내 뒤에 숨겠다는 거구나.’
김대환이 앞에 놓인 잔으로 손을 뻗었다.
“커피를 다시 가져오라고……
김덕원 팀장이 비서에게 다시 커피 를 가져오도록 지시하겠다고 말하려 했지만,김대환은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차갑게 식어 버린 커피는 지독히 썼다. 그래서 슬쩍 미간을 찌푸리던 김대환이 떠올린 것은 어린 시절의 김기현이 었다.
친구를 괴롭히고 때렸을 때 그리고 문방구에서 장난감을 훔치다가 걸렸 을 때,어린 김기현의 표정은 지금 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해결해 주세요.’
김기현은 항상 책임을 미뤘다.
‘그대로구나.’
그때와 비교해서 몸만 커졌을 뿐 내면은 그대로였다.
그게 너무 화가 났다.
그 화는 이내 부끄러움으로 변했 다.
김덕원 팀장이 김기현에게 한심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 기 때문이었다.
‘실패의 원인이 뭔지 알겠군.’
잠시 후 김대환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강태경 대표에게 내 사무실에 들 르라고 전하게.”
“네이처 필름 강태경 대표를 말씀 하시는 겁니까?”
“맞네.”
“강태경 대표는 왜 만나시려고 “자네의 충고를 따르려고 하네. 아 까 실패의 원인을 찾아야 실패를 반 복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 나?”
“그래서 강태경 대표에게 ‘어메이 징 히어로즈’의 제작을 맡길 생각이 야.”
김대환이 계획을 밝힌 순간,바닥 만 쳐다보고 있던 김기현이 번쩍 고 개를 돌렸다.
“아버지,그럼 저는요?”
“‘어메이징 히어로즈’에서 손을 떼 거라.”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