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화
실패에서 교훈을 얻는다 (2) 이규한의 계산이 적중한 셈이었다. ‘몇 달 아르바이트 한 것치고는 큰 수익을 올린 셈이네.’
잠시 후 이규한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단순히 오억을 번 것이 다가 아니 었다.
공동 제작에서 물러난 후 앞으로 나 비효과처럼 더 많은 일이 파생될 것 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됐다.’
이렇게 판단한 이규한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제가 이 서류에 서명을 하면 끝나 는 겁니까?”
“맞네.”
“펜을 좀 빌려주시죠.”
“서명을 하겠다는 건가?”
“네.”
“왜인가?”
“오억은 적은 돈이 아니니까요.”
이규한의 대답을 들은 김대환 대표 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잘난 척해 봐야 너도 고작 돈 오 억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일개 가난한 영화제작자에 불과하지 않느 냐?’
이런 의미가 깃든 미소를 짓던 김 대환 대표가 김기현에게 눈짓했다.
행여 이규한의 마음이 도중에 바뀔 것을 우려한 김기현이 서둘러 만년 필을 꺼내서 앞으로 내밀었다.
“펜 여기 있다.”
샤사삭.
그 펜을 받아 든 이규한이 서명을
마친 순간이었다.
“기분이 어떤가?”
김대환 대표가 물었다.
“속이 시원하네요.”
“시원섭섭한 게 아니라 시원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부터 내키 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왜 이번 일을 맡았나?”
“제게 부탁한 것이 대표님이었으니 까요.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와 척을 지는 것은 너무 무모하다고 판단했 습니다.”
이규한의 대답이 마음에 든 걸까. 김대환 대표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 가 짙어진 순간,이규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려던 이규한 이 도중에 걸음을 멈추고 빙글 몸을 돌렸다.
모두 뜻대로 됐기 때문일까.
여유 있게 웃고 있는 김대환 대표 를 바라보며 이규한이 덧붙였다.
“참,하나 빼먹었네요.”
“뭘 빼먹었나?”
“후회하실 겁니다.”
“왜 후회할 거라고 말하는 거지?” 이규한이 대답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으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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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저처럼.” 후릅.
미지근하게 식어 버린 차는 밍밍했 다.
그렇지만 김대환은 그 사실조차 알 아채지 못하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 혔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찜씹했기 때문 “왜 그러십니까?”
그런 자신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살피던 김기현이 조심스럽게 물었 다.
“아까 이규한이 떠나기 전에 한 말 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구나.”
“후회할 거란 이야기 말입니까?”
“그래.”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어메이 징 히어로즈’의 공동 제작에서 배제 된 탓에 분한 마음에 아무렇게나 던 진 말일 테니까요.”
김기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김대환은 그 대답을 들은 후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김기현이 너무 낙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서였다.
“지금 촬영이 얼마나 진행됐지?” “1/3 정도 촬영됐을 겁니다.”
“촬영됐을 겁니다?”
김대환이 슬쩍 미간을 찌푸린 채 추궁했다.
“마지막으로 촬영장을 찾아간 게 언제냐?”
“그게… 좀 됐습니다.”
“정확히 언제야?” “"?크랭크인을 하던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기어들어 갈 듯 작은 목소리로 김 기현이 대답하는 것을 들은 김대환 이 더 참지 못하고 노성을 터트렸 다.
“명색이 제작자란 놈이 그 후로 촬 영장을 한 번도 안 찾아갔단 뜻이 냐?”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
“이규한 대표가 촬영장에 찾아가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왜 그런 충고를 한 거지?” “제작자가 촬영장으로 자주 찾아가 면 현장의 책임자인 감독이 불편해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김대환이 다시 물었다.
“촬영장에 상주하고 있는 직원은 있겠지?”
“물론입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시원한 대답이 돌 아왔다.
덕분에 굳어졌던 표정을 살짝 풀었 던 김대환이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스카이 엔터테인먼트 직원이 촬영 장에 상주해 있는데 왜 촬영이 얼마 나 진행됐는지도 파악하지 못한 것 이냐? 매일 보고를 할 것 아니냐?”
“그게… 촬영 진행 상황을 체크하 기 위해서 촬영장에 직원이 상주하 고 있긴 한데……
“그런데?”
“스카이 엔터테인먼트 직원이 아니 라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직원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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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한이의 뜻이었습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의 직원이 촬영장에 상 주하면서 촬영 진행 상황을 체크할 테니까 굳이 스카이 엔터테인먼트 직원까지 촬영장에 찾아와서 인력 낭비,돈 낭비를 할 필요 없다고 했 습니다.”
‘단단히… 잘못됐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은 김 대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전히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싱 글거리며 웃고 있는 김기현을 발견 한 김대환은 뱃속 깊숙한 곳에서 분 노가 치밀었다.
‘멍청한 자식!’
전혀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김기현에게 호통을 치고 싶은 것을 김대환이 꾹 눌러 참았다.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기 때문 이다.
“지금 당장 촬영 중단하라고 지시 해.”
“네?”
“김대만 감독에게 지금까지 촬영한 영상과 콘티,아니 진행된 것을 모 두 갖고 뛰어 들어오라고 해.” “이제 좀 마음에 드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월 빌 딩에는 공실이 많아서 죽은 건물처 럼 느껴졌었는데.
모든 사무실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청월 빌딩을 바라보던 이규한 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규한이 김미주에게 물었다.
“미주 씨,고깃집 예약했지?”
“예약은 했는데……
“무슨 문제 있어?”
“좀 오버 아닐까요?”
김미주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 다.
“왜 오버라는 거야?”
“사무실을 거의 공짜로 임대해 준 걸로 모자라 비싼 고기까지 사 먹이 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내가 오늘 기분이 좋아서 그래.” “왜 기분이 좋은데요?”
“잘렸거든.”
“어디서 잘렸는데요?”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공동 제작 에서 배제됐어.”
이규한이 대답하자 김미주가 고개 를 갸웃했다.
“결국 뒤통수 맞은 거잖아요? 그런 데 왜 기분이 좋아요?”
“미리 예상하고 대비를 했더니 별 로 안 아프네. 게다가 공돈도 좀 생
“공돈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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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돈이 얼마나 생겼는데요?”
“골든벨 울릴 정도는 돼.”
“보자. 골든벨 울리면서 한껏 생색 낼 정도면 500만 원 정도 공돈이 생겼어요?”
“좀 더 많아.”
“ 얼마나요?”
“방금 미주 씨가 짐작한 액수의 백 배 정도.”
“500만원의 백 배면… 오억이요?”
재빨리 계산을 마친 김미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면 뒤통수 맞을 만한데 요?”
“그런가?”
“아,나도 뒤통수 맞고 싶다.” 부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김미주에 게 이규한이 말했다.
“진호 형과 태열 선배는 어디 갔 어?”
“벌써 회식 장소에 가 있어요.”
“그래? 우리도 빨리 가자.”
“골든벨 울리면서 생색 내고 싶어 서 몸이 근질근질한가 보죠.”
“역시 미주 씨는 날 잘 알아.”
이규한이 김미주와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회식이 열리고 있는 고깃 집으로 이규한이 들어섰다.
‘많네.’
고깃집을 가득 메우고 있는 청월 빌딩에 입주한 영화제작자들을 이규 한이 둘러보고 있을 때, 황진호가 벌떡 일어났다.
“이 대표, 왜 이렇게 늦었어?”
“회식비 좀 마련하느라 늦었습니 다.”
이규한이 농담과 함께 황진호의 옆
으로 다가갔다.
“일단 앉아. 여기는 공진주 대표 그리고 이쪽은 조회원 대표. 이름은 들어 봤지? 인사부터 나눠.”
“이규한입니다.”
평소 친분이 있는 제작자들을 소개 하는 황진호의 표정은 오늘따라 유 난히 밝았다. 그리고 그건 하태열도 마찬가지였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이규한이 흐뭇하 게 바라보고 있을 때,황진호가 제 안했다.
“이 대표, 한마디 해.”
“제가요?”
“그럼 누가 해? 이 대표는 그럴 자격 있어.”
황진호의 재촉을 이기지 못한 이규 한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주목. 청월 빌딩 건물주이자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이규한 대표님 이 도착했습니다. 모두 주목해 주세 요.”
황진호가 나서서 소리친 덕분에 청 월 빌딩에 새로이 입주한 제작자들 이 담소를 멈추고 일제히 이규한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있는 이규한입니다. 우선 여러분의 새 사무실 입주를 축하드립니다.”
짝짝짝.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요란한 박 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박수 소리가 잦아 들 때쯤 이 규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현장에서 영화 를 제작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열정만으로는 버티기 힘 든 어려운 영화제작 환경을 버티지 못한 많은 동료와 선후배들이 영화 계를 떠났습니다. 같은 제작자로서 그 모습들을 지켜보며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
는 일이 뭐가 있을까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 에 사무실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저렴하게 임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현재 제가 가진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군요. 부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 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분 에게 부탁 하나 드리겠습니다. 초심 을 잃지 말고 좋은 영화를 만들어 주십시오. 계속해서 좋은 영화를 만 들다 보면 어려운 영화제작 환경도 점점 좋아질 거라고 믿습니다. 좋은 영화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 이 있으니까요.”
이규한이 말을 마쳤을 때였다.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 지며 두 눈을 빛내고 있던 제작자들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현실이 시궁창일수록.”
잠시 후, 모든 사람이 그 선창에 화답했다.
“아름다운 영화가 태어난다.” ‘현실이 시궁창일수록 아름다운 영 화가 태어난다!’
이규한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
꿈과 열정이 가득했던 대학 시절, 술자리의 단골 건배사였다.
‘모두 초심을 잃지 않았구나.’
20대부터 60대까지.
청월 빌딩에 새로 입주한 제작자들 의 연령대는 모두 달랐다.
그렇지만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이 건배사를 제창하는 것이 이들이 여 전히 초심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였 다.
‘잘했어.’
여전히 뜨거운 열정이 가슴속에 살 아 숨 쉬는 동료들.
다만 팍팍한 현실의 제약으로 인해 힘겨워하는 그들을 돕기 위해 나선 것이 역시 옳은 결정이었다고 이규 한이 생각했을 때였다.
고깃집 안으로 백진엽이 들어왔다.
잠시 후,백진엽이 비어 있던 이규 한의 옆자리에 털썩 앉자 황진호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년 왜 왔어?”
“제가 못 올 데 왔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어메이징 히어 로즈’ 촬영장에 쭉 머무르고 있었잖 아?” 백진엽은 한동안 블루문 엔터테인 먼트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았다.
이규한의 지시를 받고 ‘어메이징 히어로즈’ 촬영장에 따라다녔기 때 문이다.
“제가 불러들였습니다.”
백진엽을 대신해 이규한이 대답했 다.
“왜 불러들였어?”
“이제 ‘어메이징 히어로즈’와 블루 문 엔터테인먼트는 연관이 없게 됐 거든요.”
“그럼… 이 대표의 예상대로 공동 제작에서 배제된 거야?”
“이게… 축하해야 할 일이야,슬퍼 해야 할 일이야?”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