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억 관객 제작자-220화 (220/272)

220화

실패에서 교훈을 얻는다 (1) 이규한이 지적하자 김대환 대표가 소파 의자에서 살짝 등을 뗐다.

“주관적인 잣대가 드리워진 평가가 아닐세.”

“왜 그렇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극비리에 시나리오에 대한 평가를 거쳤으니까.”

김대환 대표가 미리 준비한 한 수 를 꺼냈다.

“여전히 저는 수긍할 수 없습니 다.”

“수긍할 수 없는 이유는?”

“시나리오 평가단의 수가 많지 않 았을 테니까요. 결국 극히 일부의 주관적인 의견이 될 수밖에 없죠.”

“그렇긴 하지만……

“게다가 영화 쪽 일을 하는 전문가 는 이번 평가에 참여하지 않았을 겁 니다. 그러니 더욱 신뢰할 수 없죠.”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건가?”

“기획 개발 단계에서는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기로 저기 앉아 있는 김기현 대표와 합의했거든요.”

이규한이 대답하자 김대환 대표가 김기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실이야?”

“그게……

“제대로 대답해.”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 고,아닌 것 같기도 하고.”

김기현이 바닥으로 고개를 떨군 채 대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규한이 코웃 음을 치며 물었다.

기억이 안 난다는 거야?” “정말 기억이 잘 안 나서……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란 거야?”

김기현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이규한이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휴대전화를 꺼냈다.

“직접 들어 보시죠.”

“응?”

“제가 녹취해 둔 것이 있습니다.” 이규한이 녹취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자 김기현이 깜짝 놀란 표정 을 지었다.

“녹취본이 있다고?”

“그래.”

“왜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녹음한 거지?”

“공적으로 업무상 대화를 나누는 자리였어. 녹취본을 만들어 두는 게 오히려 당연한 거 아냐? 향후에 회 의 내용을 다시 들으면서 확인할 수 도 있고,공동 제작자로서 서로 의 사소통을 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발 생하는 것도 방지할 수 있으니까.”

“바로 지금처럼.”

김기현이 당황한 기색으로 허둥대 기 시작한 순간, 이규한이 더 머뭇

거리지 않고 녹취본을 재생시켰다.

“그래서 비밀리에 제작을 진행했으 면 한다는 뜻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그런데 어느 선까지 비밀을 유지 해야 할까?”

“우리 둘과 감독만 알고 있는 편이 좋겠어.”

“그럼 그렇게 하자.”

당시의 대화 내용이 녹음된 녹취본 이 재생되는 것을 듣던 김기현의 얼 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반면 김대환 대표의 표정은 와락 일그러져 있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생각했다.

‘역시 녹음해 두길 잘했네.’ ‘분명히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공 동 제작에서 배제될 거야.’

단순한 추측이 아니었다.

이규한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 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냥 쳐 내기는 어려울 거야.’

아무리 김대환 대표가 영화계에서 막강한 파워를 갖고 있는 인물이라 고 하더라도 아무런 이유나 명분 없 이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를 ‘어메이 징 히어로즈’의 공동 제작에서 배제 하는 것은 어려웠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명분을 만들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기획 개발 부분이 었다.

‘결국 시나리오가 타깃이 될 거야.’ 투자사에서 가장 쉽게,또 흔하게 트집을 잡을 수 있는 부분 중 하나 가 바로 시나리오의 완성도였다.

그 이유는 시나리오의 완성도는 객 관적으로 판단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었다.

즉,주관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 있 는 영역이었다.

그 사실을 이미 짐작했기에 이규한 은 김기현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작품 제작을 철저히 비밀리에 제작 하자고 제안했다.

또 당시의 대화를 녹음까지 해 두 었다.

조금 전 김대환 대표가 인상을 구 긴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 녹취본의 존재로 인해 시나리오 의 완성도를 트집 잡아 블루문 엔터 테인먼트를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공동 제작에서 배제할 명분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 속 한 피디들과 작가들이 평가에 참여 했을 거야.’

그들은 영화 쪽 일을 하는 전문가 들.

김대환 대표의 계획은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평가를 근거로 각색을 마친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시나리오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가 가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었 으리라.

그렇지만 이 녹취본의 존재로 인해 김대환 대표가 세웠던 계획은 어그 러질 수밖에 없었다.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공동 제작 을 맡은 이규한과 김기현이 비밀리 에 제작을 진행하기로 합의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 일반인 평가단이 아 니라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 속해 있는 관계자들이 평가단에 합류했다 는 것이 드러난다면?

계약을 위반하는 셈이었기 때문이 다.

그래서일까.

김대환 대표는 더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자네의 주장도 일리가 있군. 전문 가들이 참여하지 않고 극소수의 일 반인만 평가에 참여했으니 시나리오 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에는 주관적 인 잣대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네.”

금세 신색을 회복한 채 말을 바꾸 는 김대환 대표를 바라보던 이규한 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능구렁이가 따로 없네.’

반면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고 판 단한 김기현은 여전히 낯빛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김기현과 비교가 돼서 김대환 대표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지금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잠시 후,이규한이 고개를 흔들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김대환 대표는 곧 2차 공세를 펼 칠 것이다.

‘다음은 캐스팅일 거야.’ 이규한이 막 짐작했을 때,김대환 대표가 입을 뗐다.

“내가 또 하나 실망한 것은 캐스팅

“왜 실망하셨습니까?”

“배요환은 너무 약하거든.”

원래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주연 으로 캐스팅하려던 배우는 하정후였 다. 그리고 캐스팅 작업을 맡았던 것은 김기현이었다.

그렇지만 김기현은 하정후 캐스팅 에 실패했다. 그리고 그의 캐스팅 실패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S급으로 평가받는 남자 배우들에게 줄줄이 퇴짜를 맡았다.

‘소문이 퍼졌어.’

영화계는 좁았다.

김기현과의 만남에서 하정후는 불 쾌함을 느꼈고,그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게다가 김기현에 대한 세간의 평가 가 좋지 않은 상황.

그래서 S급 배우들이 ‘어메이징 히 어로즈’의 주연 캐스팅을 잇따라 거 절한 것이다.

그로 인해 궁지에 몰린 김기현이 고육지책으로 캐스팅한 것이 A급으 로 분류되는 배우인 배요환이었다.

‘약한 건 사실이야.’

굳이 비교하자면 배요환은 ‘부산행 열차’의 주연으로 캐스팅된 공태유 보다도 티켓 파워와 인지도가 약했 다.

‘어메이징 히어로즈’와 ‘부산행 열 차’는 제작비가 엇비슷한 대작.

그리고 ‘부산행 열차’의 투자를 맡 은 NEXT 엔터테인먼트 투자팀장 김태훈은 공태유를 주연으로 캐스팅 하는 것에 난색을 표했었다.

대작의 주연을 맡기에는 공태유의 티켓 파워가 약하다는 이유 때문이 었다.

그런데 배요환은 공태유보다도 더 욱 인지도와 티켓 파워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배우였다.

그러니 김대환 대표가 내린 평가는

틀리지 않았다.

‘당신이 약하다고 평가하는 배요환 을 캐스팅한 것은 제가 아니라 김기 현 대표입니다. 그리고 캐스팅을 주 도한 것은 제가 아니라 김기현 대표 였습니다.’

이 말을 꺼내고 싶어서 입이 근질 근질한 것을 참으며 이규한이 김기 현을 힐끗 살폈다.

혹시 이규한이 캐스팅을 주도한 것 이 자신이란 사실을 밝힐까 두려운 둣 김기현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반응을 확인하고 난 후 이규한 이 더 참지 않고 입을 열었다.

“캐스팅은 김기현 대표가 주도했습 니다.”

“그게 사실이냐?”

“아닙니다.”

김기현이 억울한 표정으로 부인했 다.

“규한이도 캐스팅에 참여했습니 다.”

“맞나?”

“조연들 캐스팅을 하기는 했습니 다. 하지만 주연급 배우들의 캐스팅 은 김기현 대표가 맡았습니다.”

“그걸 증명할 방법이 있나?”

“사무실로 돌아가서 컴퓨터를 뒤져

보면 당시 기현이와 캐스팅에 관해 서 녹음을 해 둔 게 있을 겁니다.”

이건 거짓말이었다.

당시의 대화를 녹음해 둔 녹취본은 스마트폰 안에 저장되어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 녹취본을 틀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규한이 거짓 말을 한 이유.

퇴로를 열어 두기 위해서였다.

‘이게 공동 제작에서 물러날 수 있 는 마지막 기회니까.’

이규한이 고개를 들어 김기현을 살 폈다.

녹취본이 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김기현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해 있 었다. 그리고 본인이 준비한 또 하 나의 패가 어그러질 위기에 처한 탓 에 김대환 대표도 낭패한 표정을 짓 고 있었다.

‘여기까지.’

그 반응들을 확인하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이규한이 입을 뗐다.

“저도 캐스팅 실패의 책임에서 자 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일정 부분은 책임을 인정하겠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제게 원 하시는 게 있으면 그냥 솔직히 말씀 해 주시죠.

“저도 눈치가 있는 편입니다.”

이규한이 한발 뒤로 물러나며 판을 깔아 준 것을 김대환 대표는 놓치지 않았다.

“자네가 그리 말해 주니 말하기가 좀 쉬워지는군. 단도직입적으로 부 탁하겠네.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제 작에서 손을 떼 주게.”

김대환 대표가 예상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이게 일방적인 통보라는 사 실을 알고 계십니까?”

“물론 알고 있네.”

“그럼 명분이 부족하다는 사실도 알고 계시겠군요.”

“맞네.”

“제가 거부하면요?”

“지루한 법적 공방이 시작되겠지.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그런 일이 발 생하지 않길 바라고 있네.”

“만약 대표님의 제안을 수용한다면 제게 주어지는 보상은 있습니까?”

“당연히 보상해 줘야지. 잠시만 기 다리게.” 김대환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상금을 가지러 가는군.’

그가 책상 쪽으로 다가가는 이유를 이규한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양복 안주머니가 아닌 책상 서랍 안에 돈이 든 봉투를 넣어 둔 이유도 짐작이 갔다.

‘봉투를 다섯 개쯤 준비해 두지 않 았을까?’

김대환 대표의 첫 번째 계획이었던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트집 잡아서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를 공동 제작에 서 배제하려던 계획이 성공했다면?

그는 가장 적은 보상금을 지불할

서류가 든 봉투를 집어 들었으리라.

그렇지만 김대환 대표가 세운 첫 번째 계획과 두 번째 계획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 만큼 그는 가장 많은 보상금 을 지불해야 하는 서류가 든 봉투를 집어 들 것이다.

잠시 후, 책상 서랍에서 서류 봉투 를 집어 든 김대환 대표가 다시 자 리로 돌아왔다.

“살펴보게.”

스옥.

이규한이 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서류에는 복잡한 수식이나 계산이

등장하지 않았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공동 제작에서 손을 떼 고 법적인 권리를 주장하지 못 하는 조건으로 오억 원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억이라.’

오억은 거액이었다.

‘내 예상보다 조금 더 많네.’

1억 관객 제작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