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캐스팅의 비결 (1)
“그걸 이 대표가 어떻게 알아?”
“제가 하정후를 캐스팅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이규한이 말을 마치자 하태열이 고 개를 갸웃했다.
“이 대표가 착각하는 것 아냐? 블 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작품 들 중에 하정후가 출연한 작품은 없 어.” “있습니다.”
“있다고? 무슨 작품?”
“‘암살자,보이지 않는 총구’라는 작품입니다.”
“‘암살자,보이지 않는 총구’라는 작품에도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공 동 제작으로 참여했었어? 그런데 왜 내가 몰랐지?”
“그냥 묻어갔거든요.”
“응?”
“공동 제작자로 이름을 올리긴 했 지만,당시에 제가 했던 건 딱히 없 습니다. 캐스팅에만 참여했습니다.”
이규한의 대답을 들은 하태열이 기
잠시 후,스마트폰을 꺼내 뭔가를 검색하던 하태열이 두 눈을 크게 떴 다.
“너무 겸손한 것 아냐? 한 게 없 는 게 아니라 이 대표가 다 했네.”
“저는 정말 캐스팅에만 참여했습니 다.”
“그래서 한 말이야.”
“
“하정후를 캐스팅한 덕분에 ‘암살 자,보이지 않는 총구’는 천만 영화 가 됐고,하정후 캐스팅에 실패한 경쟁작 ‘해적의 시대’는 폭망했으니
까.”
“원래 작품도 좋았습니다.”
“끝까지 겸손하네. 그나저나 당시 에 하정후를 어떻게 캐스팅했던 거 야?”
“전혜수를 이용했습니다.”
“전혜수?”
이규한이 당시 하정후 캐스팅에 얽 힌 비화를 간략하게 요약해서 하태 열에게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하태열이 말했 다.
“이 대표 제안을 받아들이길 잘했 네.” “전혜수요?”
“아니. 나.”
" 각"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한 덕 분에 많이 배우고 있으니까. 이런 노하우는 돈 주고도 못 배우거든.”
하태열의 칭찬을 듣고 쑥스러워진 이규한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당시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는 하정후에게 역대 최고 대우를 약속 했습니다. 더구나 김대환 대표가 직 접 하정후에게 전화를 걸어서 ‘해적 의 시대’ 출연을 설득했죠. 그럼에 도 불구하고 하정후는 ‘해적의 시 대’가 아니라 ‘암살자,보이지 않는 총구’에 출연하는 것을 선택했습니 다. 이게 하정후과 돈과 권력의 유 혹에서 자유롭다는 증거죠.”
“이 대표 말이 맞네.”
“김대환 대표가 직접 연락해서 부 탁해도 거절했던 하정후입니다. 그 런데 김기현이 찾아가서 설득한다고 해서 ‘어메이징 히어로즈’에 출연할 까요?”
“출연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그럼 이제 식사하시죠.”
“응?”
“다시 입맛이 돌아오지 않으셨어
이규한의 말뜻을 이해한 하태열이 그제야 수저를 들었다.
설렁탕에 밥을 말던 하태열이 잠시 후 물었다.
“만약 김기현이 실패하고 돌아오면 누굴 캐스팅할 거야?”
이규한이 대답했다.
“그건 김기현이 알아서 하겠죠.”
이규한의 예상대로였다.
수화기 너머로 김기현의 침통한 목 소리가 들려온 순간,이규한은 직접 보지 않아도 상황을 그릴 수 있었 다.
“그럼 대안을 찾아봐야지.”
“대안?”
“주연 배우 캐스팅은 네가 맡기로 했으니까 대안을 찾는 것도 네 몫이 지.”
“하지만……
“왜? 자신 없어?”
“알았다. 내게 맡겨.”
김기현과의 짤막한 통화를 마친 이 규한이 바로 전혜수에게 전화를 걸 었다.
“누구세요?”
“접니다,이규한.”
“아,이규한 대표님이셨구나. 그동 안 하도 연락이 없어서 이제 이름이 가물가물할 지경이네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공사다망하신 이규한 대표 님께서 갑자기 무슨 일로 연락하셨 어요?”
“식사나 한번 대접하려고요.”
“내게 미안해서 맛있는 것 사 주려 고요?”
“엄청 비싼 거 먹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가 넓은 마음으로…… 기분이 풀린 전혜수가 제안을 수락 하기 직전,이규한이 먼저 말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 이요?”
“정후 씨와 같이 만나고 싶네요.” “정후라면… 하정후요?”
“네. 가능할까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전혜수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갑자기 슬프다.”
“ …?"
“정후 동생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밥도 못 얻어먹게 되다니. 내 신세 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약속 장소는 강남역 인근에 위치한 ‘해촌’이란 일식집이었다.
하정후와의 첫 만남을 앞둔 이규한 이 살짝 긴장했다.
충무로 톱클래스 제작자와 톱클래 스 배우.
이규한과 하정후의 현 위치였다. 그렇지만 신기하리만치 서로 인연 이 닿질 않았다.
드르륵.
이규한이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을 때,룸의 미닫이문이 열렸다. 그리고 전혜수보다 하정후가 먼저 도착한 것을 발견한 이규한이 서둘 러 일어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정후입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대표를 맡고 있는 이규한입니다. 만나서 반갑습 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정후와 가볍게 악수를 나누며 이 규한이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오늘 자리가 불편한 걸까.
하정후는 슬쩍 미간을 찌푸리고 있 었다.
‘왜 불쾌한 기색이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기에 이규한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정후야,나 왔다.”
전혜수가 도착했다.
“선배님,오셨습니까?”
“대표님,오랜만이네요.”
이규한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지 만,전혜수는 입을 삐죽였다.
“진짜 날 기다린 것 맞아요?”
“네?”
“내가 아니라 정후 동생을 기다렸 던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이규한이 손사래를 칠 때 전혜수가 다시 말했다.
“실은 일찍 도착해서 차에서 10분 정도 기다렸어요.”
“왜 빨리 들어오시지 않고 기다렸 습니까?”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거든요.”
“ <……?"
“주인공은 원래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잖아요. 그래서 기다렸죠.”
전혜수의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매력 있어.’
속으로 꽁해 있는 것보다는 이렇게 툭 터놓고 이야기하는 전혜수의 성 격이 무척 마음에 든 것이었다.
그때,전혜수가 하정후에게로 고개 를 돌렸다.
“정후,너도 마찬가지야?”
“무슨 말씀이신지?”
“날 만나는 게 탐탁지 않은 거야?” “그럴 리가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제 표정이 어떻습니까?”
“꼭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 같은 데?”
“실은… 오늘 자리가 좀 불편한 건 사실입니다.”
“왜 불편해?”
“이규한 대표님이 ‘어메이징 히어 로즈’의 공동 제작자이기 때문입니 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듣 던 이규한이 그제야 하정후가 미간 을 찌푸리고 있는 이유를 알아챘다.
‘진짜 여기저기 민폐 끼치네.’
한숨을 내쉰 이규한이 속으로 생각 했다.
하정후가 이렇게 불편한 기색을 드 러내는 이유는 김기현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불편한 표정이 김기현과 의 만남이 무척 불쾌했다는 증거였 다.
‘쉽지 않겠네.’
그런 김기현을 속으로 욕하며 이규 한이 재빨리 말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오늘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공동 제작자로 참석한 게 아닙니다.” “그럼?”
“‘신과 같이’라는 작품의 제작자로 서 참석했습니다.”
‘확실히 선을 긋는 게 우선이야.’ 이렇게 판단한 이규한이 덧붙였다.
“김기현 대표와 만나셨죠?”
“네,만났습니다.”
“그 자리가 불쾌하셨다면 제가 대 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저 역시 ‘어 메이징 히어로즈’의 공동 제작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까요.”
“그리 유쾌한 자리는 아니었습니 다.”
‘소문대로 솔직하네.’
하정후가 꺼낸 대답을 들은 이규한 이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 말했다.
“그래도 이건 확실히 말씀드리겠습 니다. 저는 ‘어메이징 히어로즈’에서 기획 개발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캐 스팅은 전적으로 스카이 엔터테인먼 트 김기현 대표가 맡고 있습니다.”
“저를 그 작품에 캐스팅하기 위해 서 자리를 마련한 것은 아니란 뜻이 군요?” “맞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오늘 ‘신과 같이’라는 작품의 제작자로서 참석했습니다.”
‘신과 같이’는 아직 투자를 받지 못했다.
아니,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 판권 도 구입하지 못했고,시나리오 초고 도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만큼 ‘신과 같이’라는 작품에 대해서 하정후와 전혜수가 알고 있 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새로 제 작하려는 작품인가요?”
예상대로 전혜수는 ‘신과 같이’라 는 작품에 대해 모르고 질문을 던졌 다.
그렇지만 하정후는 달랐다.
“그 작품을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 서 영화로 제작하는 겁니까?”
“‘신과 같이’라는 작품에 대해 알 고 계십니까?”
“재밌다는 소문을 듣고 웹툰을 찾 아봤습니다.”
‘알고 있다?’
하정후가 포털 사이트에서 연재 중 인 ‘신과 같이’라는 웹툰 작품에 대 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 규한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땠습니까?”
“소문대로 재밌더군요.”
‘작품에 대해 알고 있는 데다가 흥 미도 있다?’
그 사실을 알아챈 이규한의 표정이 더욱 밝아진 순간이었다.
“파이널 스톰에서 제작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하정후가 덧붙인 말을 들은 이규한 이 고개를 갸웃했다.
“파이널 스톰이요?”
“아,모르시겠군요. 제가 세운 제작 사입니다.”
‘하정후가 제작사를 차렸다?’
이규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소문이 진짜였구나.’
하정후가 영화제작에도 관심이 많 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배우로서 작품에 출연하 는 것과 제작자로서 실제 작품을 제 작하는 것은 무척 차이가 컸다.
그래서 진짜 제작사를 차리는 것은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이규한의 예상은 빗나갔다.
“진짜 제작사를 차렸어?”
그때,전혜수가 흥미를 드러내며 질문했다.
“제작사를 세운 게 다가 아닙니다.
벌써 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벌써 작품도 제작했다고?”
“네.”
“무슨 작품인데?”
“‘선상 블루스’란 작품입니다.”
‘선상 블루스?’
이규한이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지만 ‘선상 블루스’란 작품은 기억 속에 없었다.
‘아직 개봉을 안 했나?’
이규한과 비슷한 의문을 품은 전혜 수가 대신 질문을 던져 주었다.
“아직 개봉 안 했어?”
“개봉했습니다.”
“개봉했다고? 언제?”
“꽤 됐습니다. 역시 선배님도 모르 시는군요.”
하정후가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덧붙였다.
“망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전혜수가 다시 물었다.
“왜 홍보를 안 했어?”
“저예산 영화라서요.”
“그래도 하정후가 제작사를 차려서 제작한 첫 영화다,인터뷰 중에 이 렇게 밝히기만 했어도 자연스럽게
하정후는 톱클래스 배우인 만큼 일 거수일투족이 주목을 받고 있었다.
전혜수의 말처럼 그가 인터뷰 도중 에 직접 제작사를 세우고 작품을 제 작했다는 사실을 밝혔다면?
기사가 쏟아지면서 자연스레 ‘선상 블루스’는 홍보가 됐을 것이었다.
“일부러 안 밝혔습니다.”
“왜?”
“배우 하정후가 아니라 영화제작자 하정후가 만든 작품을 세상에 내놓 고 공정한 평가를 받아 보자,이렇 게 생각했거든요.”
“제가 오만했습니다.”
하정후가 목이 탄 둣 소주잔을 비 운 후 덧붙였다.
“그 오만함의 대가를 요새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