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까다로운 조건 (2) “‘부산행 열차’가 왜 여기서 나오 는 겁니까?”
너무 뜬금없단 생각에 이규한이 의 아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기존의 한국 영화와는 결이 다르 거든.”
‘결이 다르다?’
끄덕였다.
일단 ‘부산행 열차’에는 조폭이 등 장하지 않았다.
또 사랑 타령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화의 장르가 좀비가 등장하는 SF 재난물이었다.
“결이 다르긴 하네요.”
이규한이 수긍하자 김태훈이 다시 입을 뗐다.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해?”
“어떤 말이요?”
“NEXT 엔터테인먼트에서 ‘부산행 열차’를 투자하기로 결정한 데는 해 외시장에서 수익을 거둘 자신이 있 기 때문이다,요새 해외시장이 괜찮 다,이렇게 말했잖아?”
“기억납니다.”
“새로운 시도를 한 잘 만든 한국 영화는 해외시장에서도 통한다. 그 래서 국내에서 거두는 수익 못지않 게,아니 오히려 해외에서 더 큰 수 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그럼 상황이 변할 수도 있어.”
“파이를 키우라는 뜻이군요.”
“정확해. 400억이라는 제작비를 투 입하더라도 국내와 해외시장에서 모 두 흥행 성공을 거두면 충분히 손익 분기점을 넘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익도 거둘 수 있다. 이걸 증명하 고 나면 ‘신과 같이’ 제작이 가능해 질 수도 있지.”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판단한 이 규한이 다시 물었다.
“만약 ‘부산행 열차’가 국내는 물 론이고 해외에서도 대박이 나고 나 면, NEXT 엔터테인먼트가 ‘신과 같이’에 투자할 가능성이 있습니 까?”
“40%.”
“투자 가능성이 40%다?”
“맞아. 메이저 투자 배급사는 투자 결정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지만 투자 가능성을 높일 수 있 는 방법이 있어.” “뭡니까?”
“배우.”
“배우요?”
“한류 열풍이란 말 들어 봤지?”
“물론 들어 봤습니다.”
“아시아 전역에 한류 열풍이 불고 있는 상황이야. 특정 가수나 배우에 게 팬덤이 형성된 상황이고. 그래서 아시아권에서 통하는 배우가 출연을 확정한다면 분명히 투자 가능성이 높아지지.”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업 논리라고 평하할 수도 있는 의견이었지만, 이규한이 제작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업 영화였다.
이런 부분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부산행 열차’가 일단 흥행해야겠 군요.”
“그럼 모두가 해피해지지.”
“모두요?”
“NEXT 엔터테인먼트에서 ‘부산행 열차’에 투자했다는 것,잊은 건 아 니지?”
“동기부여가 생기네요.”
의욕을 드러내던 이규한이 입을 열 었다.
“하나만 더 질문할게요.”
“또 뭐야?” “저를 제외하고 같은 조건에서 ‘신 과 같이’를 제작할 수 있는 제작자 가 있을까요?”
김태훈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 다.
“절대 없어.”
“절대요?”
“이규한이 못 하면 대한민국 어떤 제작자도 못 하는 거야.” 부스럭.
밤새 뒤척이던 이규한이 결국 침대 를 박차고 일어났다.
충혈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이 규한이 혼잣말을 꺼냈다.
“누굴까?”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던 이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계속 찾느라 였다.
“이규한 대표님이 못 하시면 누구 도 할 수 없죠.”
“이규한이 못 하면 대한민국 어떤 제작자도 못 하는 거야.” 최효민 작가도 김태훈도 자신이 아 니면 다른 어떤 제작자도 ‘신과 같 이’를 제작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렇지만 분명히 ‘신과 같이’ 제작 에 돌입했던 제작자가 있었다.
이규한이 예전에 봤던 기사가 그 증거였다.
그 제작자가 대체 누구일까에 대해 밤새 고민한 끝에 이규한이 떠올린 이름은… 양동현이었다.
천만 영화를 두 편 제작한 영화제 작자.
현재 충무로에서 이규한과 함께 가 장 잘나가는 영화제작자가 바로 양
동현이었다.
“나와 양동현 선배가 아니면… 절 대 못 한다.”
이규한이 결론을 내리고 휴대전화 를 집어 들었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번호를 검색하 던 이규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양동 현의 이름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일단 만나 보자.”
이규한이 결심을 굳히고 통화 버튼 을 눌렀다.
이규한이 벨을 누른 지 얼마 지나 지 않아 사무실 문이 열렸다.
직접 문을 열고 나온 양동현이 오 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규한,이게 얼마 만이냐?”
“너무 오랜만에 연락드려서 면목 없습니다.”
이규한이 양동현이 내밀고 있는 따 뜻한 손을 맞잡으며 인사했다.
“들어와.”
“네.”
양동현의 제작사인 리얼리 픽처스 사무실로 들어선 후 내부를 살폈던 이규한이 크게 놀랐다.
예전에 리얼리 픽처스를 찾아갔던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과 같은 사무실은 아 니었다.
리얼리 픽처스가 사무실을 이전했 기 때문이다.
그사이 리얼리 픽처스의 대표인 양 동현은 천만 영화를 두 편이나 제작 했다.
당연히 사무실의 규모가 훨씬 커지 고 함께 일하고 있는 직원들도 늘었 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규한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전한 리얼리 픽처스의 사무실 규 모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작았다.
그래서 이규한이 놀란 표정으로 사 무실 내부를 살피고 있을 때였다.
“왜 그래? 영화제작사 사무실 처음 봐?”
“그건 아니지만… 선배님의 사무실 은 규모가 더 클 줄 알았습니다.”
“영화 흥행해서 돈 많이 벌었으니 까 사무실도 더 큰 곳으로 이전했는 지 알았나 보지?”
“네.” 이규한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양동 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똑같아.”
“사무실 평수가요?” “내 마음 말이야.”
“ 구”
“천만 영화를 두 편 제작하긴 했지 만,난 그게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 고 생각해. 다음에는 운이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그럼 내가 제작한 영화가 폭망할 수도 있다,그때를 대비해서 사무실 운용비를 줄이자. 처음 영화사를 차렸을 때도 천만 영 화를 두 편 제작한 후에도 내 마음 가짐은 똑같다는 뜻이야.”
“대단하시네요.”
이규한이 감탄했다.
방금 양동현이 꺼낸 이야기.
결국 초심에 관한 것이었다.
양동현은 천만 영화 두 편을 비롯 해 여러 편의 흥행 작품을 제작했 다.
그로 인해 거만해질 수도 있었지 만,양동현은 여전히 겸손했다.
또 영화제작에 뛰어들 당시의 초심 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규한에게 대접할 믹스 커피를 본 인이 직접 타는 것이 양동현이 초심 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규한이 새삼스러운 시선을 던지 고 있을 때 양동현이 커피를 타면서 물었다.
“지금 이런 면은 배워야겠다고 속 으로 생각했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다들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렇군요.”
“그런데 넌 배우지 마.”
“네?”
양동현이 웃으며 덧붙였다.
“이런 날 닮지 말라고.” 양동현의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너와 난 다르니까.”
" 구”
“우리가 뭐가 다를까?”
‘선배님과 나의 다른 점이 뭐지?’ 예상치 못했던 질문.
그래서 이규한이 쉽게 답을 찾지 못하고 있자 양동현이 웃으며 입을 뗐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질문인데 너 무 오래 고민하는 것 아냐?”
“그게……
“정답은 흥행 작품의 수야.”
“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흥행 작품이 리얼리 픽처스에서 제 작한 흥행 작품보다 더 많잖아. 그 게 네가 나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야.”
“제가 알기로는 거의 비슷합니다.”
당황한 이규한이 뺨을 붉힌 채 서 둘러 정정하자 양동현이 믹스 커피 가 든 종이컵을 내밀며 말했다.
“너무 심각하게 반응할 필요 없어. 농담이었으니까.”
“농담… 이요?”
“진짜 정답을 알려 줄까? 나이야.”
“나이요?”
“내가 너보다 나이가 훨씬 많잖아. 이렇게 간단한 답을 왜 못 찾고 허 둥대는 거야?”
양동현은 50대,반면 이규한은 30 대였다.
‘많이 늙으셨네.’
양동현의 귀밑머리가 희끗하게 변 해 있는 것을 이규한이 안타깝게 바 라보고 있을 때였다.
“나이가 드니까 점점 재고 계산하 는 게 많아지더라고. 왜 이것저것 재는 게 늘어날까? 그 이유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 봤는데 겁이 많아 졌기 때문이더라고.”
양동현이 씁쓸한 표정으로 이야기 룰 이어 나갔다.
“이 영화를 제작해서 흥행에 실패 하면 내가 다시 재기할 수 있을까? 지금껏 한국 영화에서 한 번도 시도 해 보지 않은 장르에 도전하는 것은 너무 무모하지 않을까? 겁이 많아져 서 그런지 자꾸 안정적인 작품만 찾 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 지.” 빈 탁자에 앉은 양동현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끝맺은 후 이규한을 바라보았다.
“넌 그러지 마.”
“네?”
“나보다 한참 젊으니까 도전해. 지 금까지는 아주 잘하고 있어. 앞으로 도 지금처럼 계속해 나가면 돼.”
‘내 행보를 주시하고 계셨다?’
양동현의 당부를 듣고서 이규한이 깨달았을 때였다.
“난 지는 해지만,넌 뜨는 해야. 너처럼 젊은 친구들이 장차 한국 영 화를 이끌어 가야 해. 잘 부탁한다.” 일반인들은 영화를 보고 난 후 주 로 배우나 감독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달랐다.
누가 제작을 맡았고,어느 투자사 에서 작품의 투자를 맡았는가 여부 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양동현 vs 이규한.
영화인들은 두 사람 중 누가 대한 민국 최고의 영화제작자인가에 대해 서 갑론을박을 벌이는 경우가 잦았 다.
그런 이야기를 워낙 자주 듣다 보
니 이규한은 부지불식간에 양동현을 라이벌로 의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양동현은 달랐다.
자신의 행보를 주시하면서 앞으로 더 잘되길 응원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양동현의 표정과 말에서는 진심이 묻어났다.
“선배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각오를 다지던 이규한이 짤막한 한 숨을 내쉬었다.
‘선배님도 아냐.’
당연히 양동현이 ‘신과 같이’를 제 작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지만 그를 만나서 대화를 나눈 후,이규한은 그 짐작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장르의 작품 에 도전하는 용기가 사라졌다는 양 동현의 고백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래가 달라진 게 아닐까?’
잠시 후,이규한이 퍼뜩 떠올린 생 각이 었다.
이규한이 세운 블루문 엔터테인먼
트가 비상하지 않았다면?
양동현은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 제작자로 남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는 좀 더 자신 있게 새로운 장르에 도전할 수 있었을 것 이고,‘신과 같이’의 제작에 나섰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영화들이 잇따라 흥행에 성 공하면서 나비효과처럼 미래가 바뀌 고 있었다.
눈앞의 양동현의 모습도 달라진 부 분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무슨 고민 있어?” 이규한이 연신 한숨을 내쉬는 것을 놓치지 않은 양동현이 물었다.
그 질문을 받은 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다.
리얼리 픽처스를 찾아온 원래 목적 은 양동현이 ‘신과 같이’의 제작자 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방금 다른 목적이 생겼 다.
‘조언을 구하자.’
이렇게 결심한 이규한이 현재 ‘신 과 같이’라는 작품이 처해 있는 상 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요약해서 설 명했다.
그 설명을 모두 들은 양동현이 만 족스레 웃었다.
“역시 젊음이 좋구먼. 해리 포터를 이길 각오로 한국형 판타지 장르에 과감히 도전하는 걸 보니 말이야.”
그리고 양동현은 베테랑 제작자였 다.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현재 이규한 이 고민하고 있는 지점에 대해서 정 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관건은 투자 유치가 되겠군.”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