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애사심 잠시 후 시작된 회의의 안건은 사 무실 입주자 선정이었다.
“제가 막연하게 예상했던 것보다 사무실 입주를 원하는 신청자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선정 기준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 다.”
이규한이 회의 안건에 대해서 운을 떼자 황진호가 의아한 시선을 던지
며 물었다.
“추첨으로 선정하는 것 아니었어?”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 런데 도중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왜 생각이 바뀌었어?”
“좋은 일 하고 욕먹기는 싫어서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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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혁 대표를 만나고 나서 확실 하게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제각각 전부 다르다는 것을요. 제가 호의를 갖고 시작한 일이라고 하더 라도,본래 의도를 곡해하는 사람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나중에 잡음이 일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 명확하게 선정 기준을 세우 는 것이 좋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 뀌었습니다.”
이규한이 설명을 마치자 황진호가 비로소 이해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 다.
“잘 생각했어. 선정 기준이 명확할 수록 나중에 잡음이 발생할 확률이 줄어드니까. 그런데 기준을 어떻게 정할 거야?”
“제작 역량을 중심으로 선정할 겁 니다.”
이규한이 계획을 밝히자 하태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선정 기준으로 제작 역량에 중 점을 두려는 거야?”
“자선사업을 하려는 게 아니거든 요. 제작 역량은 있지만 당장 자금 사정이 열악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 는 제작사에 도음을 주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걸까.
고개를 끄덕이던 하태열이 다시 입 을 뗐다.
“그럼 기존에 작품을 했던 제작사 에 더 유리한 거야?”
“그건 아닙니다. 십 년 전에 한 작 품을 개봉하고 나서 더 이상 작품을
제작하지 않고 있는 기성 제작사들 도 부지기수니까요. 오히려 현재 제 작사의 제작 역량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합니다.”
이규한이 대답을 마친 순간 백진엽 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렵네요.”
“왜 어렵다는 거야?”
“선정 기준을 정하기가 어려우니까
요.”
제작사의 잠재적인 제작 역량을 파 악하는 것.
결코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회사 내부 사정은 외부인이 봐서는
백진엽의 말처럼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규한이 김미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주 씨 의견은 어때?”
“저는 계속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어떤 생각?”
“대표님이 왜 이렇게 번거롭기만 하고 돈도 안 되는 일을 하시는 걸 까? 이런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거든요.”
“그건… 사명감 때문이라고 하자.”
“사명감이요?” “일단은 그렇게만 알아 둬.”
이규한이 팔짱을 낀 채 다시 입을 뗐다.
“결국은 선정 기준을 어떻게 투명 하게 정하느냐가 관건이 되겠네요. 차라리 미리 공개를 하죠.”
“선정 기준을 공개하자는 거야?”
“네. 그 편이 만의 하나 뒷말이 나 올 것을 미리 예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내 생각에도 그게 좋을 것 같다.” 황진호를 선두로 다른 직원들도 그 의견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김미주가 팔을 번쩍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어떤 질문이야?”
“대표님이 생각하고 계신 선정 기 준에 따르면 램프 엔터테인먼트는 입주 자격을 얻을 수 있을까요?”
“램프 엔터테인먼트?”
“네.”
“그건 왜 물어?”
“램프 엔터테인먼트도 신청했거든 요.”
김미주의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서둘러 서류를 살폈다.
잠시 후,램프 엔터테인먼트의 이 름을 발견한 이규한이 황당한 표정
“혹시 똑같은 이름의 제작사가 하 나 더 있는 게 아닐까?”
“그건 아닙니다.”
“어떻게 알아?”
“신청자 이름이 박태혁이거든요.”
김미주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 한 순간,이규한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진짜 양심도 없네.”
잠시 후 이규한이 덧붙였다.
“심사 기준을 엄격하게 해야겠습니 다. 적어도 램프 엔터테인먼트가 탈 락할 정도는 되야 합니다.”
부천역 인근 커피 전문점에 도착한 이규한이 주변을 살폈다.
잠시 후,박상구 작가를 발견한 이 규한이 앞으로 다가갔다.
“박 작가님.”
“대표님,오셨어요?”
박상구 작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최효민 작가님은 아직 안 오셨습 니까?”
혼자 서 있는 박상구를 확인한 이 규한이 물었다.
“작업하다가 약속을 깜박했다네요. 그래도 거의 도착했다고 문자 왔으 니까 오 분쯤 기다리면 도착할 겁니 다.”
“그래요?”
“일단 커피부터 시킬까요? 전 이미 주문해서 마시고 있으니까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만 시키면 됩니 다.”
박상구의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최효민 작가님께 물어본 겁니까?”
“그런데 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라는 겁니까?”
“외골수거든요.”
“ 이,
“효민이 형 다른 건 절대 안 마시 고 오직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십 니다. 한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 노만 고집하죠.”
비로소 이해한 이규한이 아이스 아 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하고 돌아왔 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이 비슷한 면이 있네요.”
“저와 최효민 작가요?”
“네. 대표님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만 마시니까요.”
이규한도 다른 종류의 커피는 마시 지 않았다.
한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고집했다.
‘틀린 말은 아니네.’
그래서 이규한이 희미한 미소를 머 금었을 때,박상구 작가가 인사했다.
“술 잘 마셨습니다.”
“무슨 술이요?”
“진엽이 형이 얼마 전에 법인 카드 룰 들고 절 찾아와서 술을 사 주고
갔습니다.”
‘아!,
그제야 기억을 떠올리는 데 성공한 이규한이 웃으며 말했다.
“왜 소고기 안 드시고 삼겹살 드셨 습니까?”
백진엽이 법인 카드를 사용했던 식 당은 삼겹살 전문점이었다.
그것도 무한 리필을 하는 저렴한 곳이었다.
“제가 비싼 것 사 드리라고 백 피 디에게 신신당부했는데.”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삼겹살을요?”
이규한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까?”
“진엽 형에게 애사심이라는 게 생 긴 것 같거든요.”
“애사심… 이요?”
“내가 대표님에게서 법인 카드를 받아 오긴 했지만 절대 비싼 걸 먹 으면 안 된다, 그건 가뜩이나 어려 운 회사에 누를 끼치는 것이다,이 렇게 주장하면서 무한 리필 삼겹살 집으로 저를 끌고 가더라고요.”
이규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귀한 손님을 무한 리필 삼겹살집으 로 모실 정도로 회사 사정이 어렵지 는 않습니다.”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영화들이 대부분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 고 있거든요. 어쨌든 중요한 건 그 게 아닙니다. 진엽 형에게 애사심이 생겼다는 게 중요하죠. 대표님도 아 시겠지만,진엽 형과 애사심이라는 단어,절대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지 않습니까?”
박상구 작가가 꺼낸 말을 들은 이 규한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백진엽과 애사심.
절대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자유분방한 영혼의 대명사인 백진엽은 직장 생 활 자체와 어울리지 않았다.
“제가 그동안 진엽 형에게 어울리 지 않는 애사심이 생긴 이유에 대해 서 곰곰이 고민해 봤습니다. 그리고 제가 내린 결론은 대표님을 좋아한 다는 겁니다.”
‘백 피디가 날 좋아한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기분은 좋았다.
애사심을 가진 직원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박상구 작가가 다시 입을 뗐 다.
“대표님은 역시 대단하시네요.”
“제가 왜 대단하다는 겁니까?”
“진엽 형의 신뢰를 얻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인데 결국 해내셨으니까 요.”
감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박상구 작가가 이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그렇지만 효민 형의 마음을 얻는 건 더 어려울 겁니다.”
“왜입니까?”
박상구 작가가 대답했다.
“고집이 장난 아니거든요.” “형,여기예요.”
최효민 작가를 발견한 박상구 작가 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이규한이 챙이 긴 야구 모자를 쓴 채 검정색 정장을 입고 나타난 최효 민 작가를 빤히 바라보았다.
‘패션 감각이… 특이하네.’
이규한이 속으로 생각할 때,박상 구 작가가 지적했다.
“형도 참. 야구 모자와 정장은 안 어울린다니까요.” “그거 편견일 뿐이야.”
“편견이 아니라……
“명색이 창작자란 놈이 고정관념에 갇혀서야 되겠어?”
최효민은 멋쩍은 표정을 짓는 대신 오히려 당당하게 박상구 작가를 탓 했다.
“됐습니다. 더 말을 말죠.”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어차피 제 말 안 들으실 거잖아
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박상구 작 가가 이규한을 소개했다.
“일단 인사부터 하세요. 여기는 영 화제작사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의 이 규한 대표……
“됐다.”
“왜 됐다는 겁니까?”
“문자로 알려 줬잖아.”
“그렇긴 하지만……
“직접 인사할게.”
최효민 작가가 이규한을 관찰하듯 살피며 입을 됐다.
“웹툰 작가 최효민입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대표를 맡고 있는 이규한입니다.”
이규한이 소개를 마치자마자 최효 민 작가가 본론으로 돌입했다.
“상구를 통해서 제 작품의 판권을 구매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 었는데,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규한이 대답한 순간 최효민 작가 가 덧붙였다.
“판권은 안 팝니다.” 최효민 작가는 일언지하에 작품의 판권을 팔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단칼에 거절당한 순간,이규한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떤 작품의 판권을 구입하려는 것 인지,판권을 어떤 조건으로 구매하 려는 것인지,또 판권을 구입한 후 에 어떤 플랜을 갖고 있는지 등등.
이규한은 최효민 작가를 만나기 위 해서 미리 준비해 온 이야기가 많았 다.
그렇지만 준비해 온 이야기들을 입 밖으로 꺼내 보기도 전에 작품의 판 권을 팔지 않겠다는 거절을 당한 셈 이었다.
그리고 당황한 것은 이규한만이 아 니었다.
최효민 작가와의 만남을 주선했던 박상구 작가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
했다.
“형,이런 법이 어딨어요?”
“내가 뭐 잘못했어? 내 작품의 판 권을 안 팔겠다고 말한 것뿐이잖 아.”
“그렇긴 하지만……
잠시 말문이 막혔던 박상구 작가가 다시 입을 뗐다.
“좋은 분이세요.”
“누가?”
“여기 계신 이규한 대표님이요. 적 어도 순진한 작가들에게 사기를 치 거나 뒤통수를 치지는 않으실 거예 요. 그러니까 이규한 대표님을 믿
고.
“상구야.”
“네.”
“못 보던 새 취직했냐?”
“취직… 이요?”
“꼭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직원처럼 얘길 해서 말이지.”
최효민 작가의 지적을 받은 박상구 가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그랬나요?”
“그래. 꼭 직원 같았어.”
“제가 그만큼 이규한 대표님을 좋 아해서일 겁니다.”
박상구 작가가 멋쩍은 표정으로 대 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후,최효민 작가가 이규한에게 새삼스러운 시선을 던지 며 질문했다.
“어차피 작품의 판권을 팔지도 않 을 거면서 왜 여기까지 나왔느냐, 지금 이런 의문을 갖고 계시죠?”
“그건 아닙니다.”
이규한이 고개를 흔들며 덧붙였다.
“판권을 구입하지 못한다는 점은 무척 아쉽지만,시간을 낭비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인간 공 부라고 생각하니까요.”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