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혹시 저를 아십니까?
“여기 있다.”
하태열이 건넨 담배 한 개비를 받 아 든 이규한이 입에 물었다.
잠시 후,이규한이 입을 뗐다.
“선배,미안해요.”
“왜 미안하다는 거야?”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기 어렵거 든요.”
왜 하필 신인 감독이냐?
또 신인 감독 중에 하필 김대만 감독을 선택한 것에 어떤 이유가 있 느냐?
하태열이 의문을 품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규한이 김대만 감독을 선 택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의 아프고 쓰라렸던 경험을 똑 같이 갚아 주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
해서 이규한이 사과한 것이었다.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어메이징 히어로즈’는 흥행에 성공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역시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있던 하태열이 고 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이다.”
“뭐가 처음이란 겁니까?”
“내가 제작에 관여하는 영화가 흥 행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말이야. 머리털 나고 처음 하는 경험이란 뜻 이야.”
“저도 처음입니다.”
이규한이 쓰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마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겁 니다.”
톡,톡,토독.
이규한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 렸다.
‘침착하자.’
마음속으로 침착하자고 계속 되뇌 었지만,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딸랑.
그때,커피 전문점 블루문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에 김대만 감독이 보였다.
‘나쁜 자식.’
본능적으로 이규한이 벌떡 일어났 을 때,김대만 감독이 앞으로 다가 왔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이규한 대표 님이시죠? 김대만입니다.”
김대만이 인사를 건넸다.
그런 김대만과 마주하자 간신히 억 누르고 있던 화가 다시 치밀었다.
또 호흡이 거칠어진 순간이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김대만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혹시… 저를 아십니까?” ‘당연히 알지.’
이규한이 속으로 소리쳤다.
김기현의 협박에 넘어가서 자신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장본 인.
그런데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진심 한 대 치고 싶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 는 김대만이 얄미웠다.
순진한 척,착한 척하고 있는 김대 만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다는 생각에 이규한이 꽉 말아 쥐었던 주 먹을 다시 풀었다.
‘날 몰라.’ 이규한은 기적이 벌어지며 다시 과 거로 돌아온 상황.
그 후 김대만 감독과는 한 차례도 만난 적이 없었다.
이번이 첫 만남인 만큼 김대만 감 독은 이규한을 전혀 모르는 것이 당 연했다.
“…알고 있습니다.”
이규한이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대 답하자 김대만이 놀란 표정을 지었 다.
“절 어떻게 아십니까?”
‘너랑 희대의 망작이었던 ‘만월’ 작 업을 같이 했으니까 알지.’ 이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이규한이 다른 대답을 꺼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 는 작품의 연출 후보로 감독님의 이 름을 괜히 올린 게 아닙니다. 감독 님에 대해서 나름 조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감독님을 알고 있다고 대답 한 겁니다.”
“아,그런 뜻이었군요. 어쨌든 영광 입니다.”
“왜 영광이란 겁니까?”
“신인 감독들 사이에서는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이규한 대표님이 제작 하는 작품의 연출을 맡는 것이 꿈이 거든요.” ‘작품이 흥행을 하니까.’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는 작품은 투자를 쉽게 받아 개봉한다.
덕분에 감독으로서 입봉을 빨리 할 수 있는 데다가 블루문 엔터테인먼 트에서 제작한 작품들 가운데 흥행 에 실패한 작품은 아직까지 없었다.
감독 입봉은 물론이고,홍행 감독 타이틀까지 움켜쥘 수 있는 기회.
그래서 신인 감독들은 블루문 엔터 테인먼트가 제작하는 영화에 참여하 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넌 예외야.’
기대에 찬 시선을 던지고 있는 김 대만을 바라보던 이규한이 코웃음을 쳤다.
‘어메이징 히어로즈’라는 작품에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공동 제작사 로 참여하긴 했지만,이번 작품은 흥행에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리신 것 아닙니까?”
이규한이 정색한 채 묻자 김대만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김대만 감독님께 연출을 맡 기기로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 까지나 후보 중 한 명일 뿐이죠.” 솔직히 말하면 이미 김대만 감독에 게 연출을 맡기기로 결정한 상태였 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이규한이 거짓말을 하는 이 유는 김대만 감독에게 아직 앙금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저를 믿고 연출을 맡겨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김대만 감독이 본인 을 어필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그 말을 순순히
믿지 않았다.
이전에도 김대만 감독이 똑같이 말 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속아서 내 인생이 박살 났지.’
한숨을 내쉰 이규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감독 김대만의 장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장점이요?”
“연출자로서 본인만의 장점이 있을 것 아닙니까?”
“…성격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김대만 감독이
대답했다.
깐깐한 면접관 앞에서 압박 면접을 받고 있는 구직자처럼 김대만 감독 은 식은땀을 뻘뻘 홀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 지지는 않았다.
‘대가 약한 편이긴 했지. 그래서 김기현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갔던 것이고.’
김대만 감독을 빤히 바라보던 이규 한이 지적했다.
“성격 좋은 감독은 많습니다.”
“네? 네.”
“저만의 장점은… 그러니까 제가 가진 장점은……
“모르시나 보네요.”
“네?”
“제가 감독님을 연출 후보군으로 올린 데는 감독님만의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감독님께 서는 본인이 가진 장점을 모르시는 것 같네요. 제가 알려 드릴까요?”
“알려 주십시오.”
“고집이 세지 않다는 겁니다.”
“ 아
“강형진 감독,양우섭 감독,최호인 감독의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이규한이 질문을 던지자 아까와 달 리 김대만이 바로 대답을 꺼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작품의 연출을 맡았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 점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감독으 로서의 입지를 다졌지만,그때는 모 두 신인 감독 혹은 신인급 감독이었 다는 것이죠.”
김대만이 두 눈을 빛냈다.
이규한이 방금 열거한 세 명의 감 독처럼 본인도 입봉을 하고 흥행 감 독으로 입지를 굳히고 싶다는 욕심 이 생겨서일 것이다.
어쩌면 김대만이 욕심을 부리는 것 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규한 이 이용하려는 것이 바로 이 욕심이 었다.
“제가 언급했던 세 감독님의 또 하 나의 공통점은 바로 제작 과정에서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쉽게 말해 감독으로서 고집을 피 우지 않고 제작자인 저를 믿고 제 의견을 존중하고 따랐다는 겁니다. 김대만 감독님도 그렇게 할 수 있겠 습니까?”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이규한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화제를 돌렸다.
“그럼 계약하시죠.”
“네?”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말씀하 셨으니까 김대만 감독님과 연출 계 약을 맺겠다는 말씀입니다.”
너무 빨리,또 너무 쉽게 계약이 성사됐기 때문일까.
김대만 감독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저와 연출 계약을 맺으시려 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 니다.”
김대만 감독이 연신 고개를 숙일 때,이규한이 계약서를 꺼냈다.
“직접 확인해 보시죠.”
이규한이 건넨 계약서를 받아 들고 살피던 김대만 감독의 표정이 이내 굳었다.
“총액 육천만 원에 계약금은 이천 만 원,작품이 개봉할 때 잔금 사천 만 원을 받는 계약 조건이 맞습니 까?” 이규한이 확인해 주자 김대만 감독 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 표정 변화를 유심히 살피던 이 규한이 물었다.
“계약 조건이 마음에 안 드십니 까?”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닌데… 제 가 들었던 것과는 조금 달라서요.”
“어느 부분이 다릅니까?”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는 감독이나 작가와 계약 시에 계약금과 잔금을 나눠서 주지 않고 일괄 지급 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 계약서에는……?”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단독 제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약서를 보시 면 알겠지만,이번 작품은 스카이 엔터테인먼트와 공동 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군요.”
김대만 감독이 아쉬운 기색을 감추 지 못하고 표정에 드러냈다.
물론 이번에도 거짓말이었다.
비록 스카이 엔터테인먼트와 공동 제작을 하고 있긴 하지만,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대부분의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김대만 감독과 연출 계약을 맺을 때 총액 육천만 원을 일시불로 지급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규한이 그런 결정을 하지 않은 데는 나름의 이유 가 있었다.
‘잔금을 받기 위해서라도 김대만 감독은 촬영과 후반 작업을 서두를 거야.’
김대만 감독의 생활 형편에 대해서 는 굳이 따로 조사할 필요가 없었 다.
이미 과거에 술자리에서 그의 사정 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김대만 감독은 여전히 입봉하지 못 한 상황.
복권에 당첨되지 않았다면 당시보 다 형편이 훨씬 더 어려울 터였다.
그런 만큼 잔금 사천만 원을 받고 다른 제작사와 새로운 연출 계약을 맺기 위해서라도 개봉을 서두를 수 밖에 없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또 뭐가 남았습니까?”
“이 서류에 서명을 해 주셔야 합니 다.”
이규한이 건넨 서류를 살피던 김대 만 감독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비밀 유지 의무 서약서는 랩니 까?”
“말 그대로입니다. 작품의 연출자 로서 작품에 대한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서약을 하는 겁니다.”
“그건 저도 압니다.”
“그럼 뭐가 궁금하신 겁니까?”
“이걸 왜 하는 겁니까?”
“만의 하나의 사태를 대비하는 겁 니다.”
“만의 하나의 사태요?”
“나중에 작품을 보시면 아시겠지 만,소재가 기발한 편은 아닙니다. 또 카피도 쉬운 케이스입니다. 그래 서 작품 내 소재와 스토리 그리고 캐릭터들이 유출되는 것을 미리 방 지하기 위해서 비밀 유지 의무 서약 서를 받으려는 겁니다.”
“그렇군요.”
김대만 감독이 수긍한 순간,이규 한이 말했다.
“연출 계약을 맺는 조건은 다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도 계약하시겠습니 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대만 감독이 결심을 굳힌 둣 아 쉬운 기색을 털어 내고 비장한 표정 으로 각오를 밝혔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규한이 손을 내밀자 김대만이 맞 잡았다.
과악.
악수를 하는 과정에서 이규한이 강 하게 힘을 줬다.
아파서 당황하는 김대만을 향해 이 규한이 씨익 웃으며 속으로 소리쳤 다.
‘이렇게라도 해야 내 분이 좀 풀릴 것 같아서 말이지.’ “얼마나 바뀌었을까?”
김대만 감독이 먼저 떠나고,혼자 남은 이규한이 백팩에서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시나리오 책을 꺼냈다.
- 감독: 김대만.
김대만의 이름을 기입하고 난 후 이규한이 시나리오 책을 집어 들었 다.
잠시 후,이규한의 눈앞에 숫자가 떠올랐다.
- 1,271,519.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