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이러니까 계속 망하지 “계속?”
“안 돼?”
“아냐. 그렇게 하자.”
김기현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이 규한은 모른 척 화제를 돌렸다.
“참,각색이 끝난 시나리오 책은 읽어 봤어?”
“응,읽어 봤어.” “어땠어?”
“나쁘지 않았어.”
“나쁘지 않았다? 좀 더 자세히 말 해 봐.”
“신파적인 요소가 더 들어가니까 확실히 한국적인 느낌이 나는 것 같 아. 그래서 ‘슈퍼파워스’와 차별화가 되는 느낌이고. 내 생각에는 각색하 기 전 시나리오 책보다 각색을 마친 지금이 훨씬 좋아진 것 같아.” 김기현이 대답한 순간,이규한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러니까 계속 망하지.’
이규한은 이미 지인경 작가가 각색
을 마친 시나리오 책의 감정을 마친 후였다.
‘1,863,397명.,
당시 감정을 한 결과였다.
3,341,518명에서 1,863,397명으로.
지인경 작가가 각색을 마친 후,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예상 관객 수는 오히려 감소했다. 그리고 감소 폭도 무척 큰 편이었다.
거의 반토막이 난 상황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현은 지인 경 작가의 각색고에 만족한 기색이 었다.
이것이 김기현이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형편없다는 중거였다.
‘누워서 떡 먹기.’
이규한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예상대로 김기현을 속이는 것은 식 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아직 방심하기는 일렀다. 김기현의 뒤에는 김대환 대표가 버 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단속을 시켜야 해.’
이렇게 판단한 이규한이 넌지시 입 을 뗐다.
“기현아.”
“난 이번 프로젝트를 철저하게 비 밀리에 진행했으면 해.”
그 이야기를 들은 김기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비밀리에 제작을 진행해야 하는 이유가 있어?”
“두 가지 이유가 있어.”
“뭔데?”
“우선 ‘슈퍼파워스’라는 외국 작품 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게 마음에 걸려. 제작을 하는 도중에 ‘어메이 징 히어로즈’의 스토리와 캐릭터가 유출되면 상황이 복잡해져. 다른 투 자 배급사에서 바로 카피를 할 수도
있으니까.”
“비슷한 소재의 작품을 다른 투자 배급사에서 먼저 제작할 수도 있다 는 뜻이야?”
“정확해.”
“설마 ?”
“원래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야. 그리고 비슷한 소재의 작품일 경우, 먼저 세상에 내놓는 사람이 주인이 라는 것쯤은 너도 알잖아?”
김기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그가 잠시 후 반론을 꺼냈다. “설령 비슷한 소재의 작품을 다른 제작사에서 먼저 제작해서 개봉한다
고 해도 완성도 측면에서는 차이가 크지 않을까? 특히 CG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차이가 많이 발생할 테 니까 상관없는 것 아냐?”
“장르물이기 때문에 상관이 있어.”
" ……?"
“‘어메이징 히어로즈’와 비슷한 포 맷의 한국형 히어로물이 먼저 개봉 할 경우,네 말대로 CG가 허술하고 완성도 측면에서도 부족할 거야. 그 럼에도 불구하고 카피작이 먼저 개 봉했다고 치고,그로부터 얼마 지나 지 않아서 ‘어메이징 히어로즈’가 개봉한다고 가정해 보자. 대중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기대하지 않을까?”
“왜 기대한다는 거야?”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스토리와 CG의 완성도가 더 뛰어날 거라고 기대할 것 같은데.”
김기현이 조심스럽게 꺼낸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바로 반박했다.
“내 생각에는 반대야. 기대치가 현 저히 낮아질 거야.”
“왜 기대치가 낮아지지?”
“한국 영화의 CG는 역시 허술하 고 작품의 완성도도 형편없구나. 카 피작을 보고 난 후,이미 잔뜩 실망 해 버린 대중들은 ‘어메이징 히어로 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판 단하고 극장으로 찾아오지 않을 게 분명해.”
“하지만……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어. 비록 완 성도 측면에서 허술하긴 하지만,이 미 비슷한 소재의 한국형 히어로물 이 나온 상황이야. CG의 완성도 측 면에서는 ‘어메이징 히어로즈’가 더 뛰어나겠지만, 어차피 스토리는 비 숫할 텐데 굳이 비싼 관람료를 지불 하고 볼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피 로감을 느낄 가능성이 높아.”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걸까.
고개를 끄덕이던 김기현이 물었다.
“아까 이유가 두 가지라고 했지? 나머지 하나의 이유는 뭐야?”
“반전.”
“반전 때문이라고?”
이규한의 대답을 들은 김기현이 고 개를 갸웃했다.
“내가 읽어 본 시나리오 책에서 반 전이라고 할 만한 부분은 없었던 것 같은데?”
“현재는 없어.”
“그게 무슨 뜻이야?”
“지인경 작가와 작품에 관해서 대 화를 나누던 증에 기막힌 반전이 떠 올랐어. 아직 시나리오 책에는 포함
되어 있지 않지만 그 반전 요소가 추가된다면 시나리오의 월리티가 한 층 높아질 거야.”
“그래?”
김기현이 반색한 순간,이규한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반전 따위가 있을 리 없지.’
이규한은 방금 거짓말을 한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현은 전 혀 알아채지 못하고 기뻐하고 있었 다‘
“내 생각에는 이 반전이 무척 중요 해. 그래서 절대 개봉 전까지는 어 떤 반전인지 알려져서는 안 돼. 아 니,개봉을 하고 난 후에도 관객들 에게 스포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해야 할 정도야. 최악의 경우는 제 작 과정에서 이 반전이 유출되는 거 야. 그래서 비밀리에 제작을 진행했 으면 한다는 뜻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수긍한 표정의 김기현이 다시 물었 다.
“그런데 어느 선까지 비밀을 유지 해야 할까?”
“우리 둘과 감독만 알고 있는 편이 좋겠어.”
“그럼 그렇게 하자.”
김기현이 별 의심 없이 수긍하는
것을 듣고 이규한이 안도했을 때였 다.
“이제 다음 수순은 감독 선임인 가?”
“때가 됐지.”
“혹시 염두에 두고 있는 감독이 있 어?”
김기현이 질문하는 것을 들은 이규 한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커피가 담긴 컵을 들어 올렸다.
‘변했다?’
각색 작가를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할 당시,김기현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후보군을 추 려 왔다.
신진옹과 홍기훈 그리고 안유천까 지.
세 명의 작가를 후보군으로 추려 오는 준비성을 발휘했다.
그렇지만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연출을 맡을 감독을 선임하는 이번 과정에서는 달랐다.
김기현은 후보군을 추려 오지 않았 다.
대신 이규한에게 염두에 두고 있는 감독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아주 작은 차이.
그렇지만 이규한은 그 작은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유통기한이 다 된 거야.’
이규한은 김기현의 태도가 변한 이 유를 알았다.
아니,좀 더 정확히 말하면 변한 척하다가 다시 원래 모습으로 회귀 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이규한이 속으로 생각하며 입을 됐 다.
“신인급 감독이 좋을 것 같아.”
그 이야기를 들은 김기현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메이징 히어로즈’는 제작비가 백억이 넘어가는 대작이야. 그런데 신인 감독에게 연출을 맡기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김기현의 우려는 일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바로 반박했다.
“‘광안리’와 ‘민란’ 그리고 ‘해적의 시대’까지,세 작품의 공통점이 뭐 야?”
이규한이 열거한 세 작품은 모두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와 배 급을 맡아서 흥행에 실패했다.
그래서일까.
김기현이 슬쩍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제작비가 백억이 넘어가는 대작이 라는 공통점이 있지.”
“하나 빼먹었어.”
“ 이,
“세 작품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는 것도 공통점이야.”
김기현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을 때,이규한이 덧붙였다.
“그리고 세 작품 모두 기성 감독들 이 연출을 맡았다는 또 하나의 공통 점이 있어. 이게 내가 신인 감독에 게 연출을 맡기려는 이유 중 하나 야.”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기성 감독들은 자기주장과 색깔이 강해. 그래서 한계가 명확한 편이지. 반면 신인 감독들은 그런 한계가 존 재하지 않아. 물론 네 말처럼 신인 감독은 아직 검증이 되지 않았기 때 문에 위험해. 그러나 난 모험을 선 호하는 편이야.”
“모험을 선호한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잖아. 기성 감독보다 신인급 감독이 연출을 맡 은 작품들의 흥행 성적이 더 좋거 ‘변호사’와 ‘나를 사랑한 아저씨’의 연출을 맡았던 감독들은 모두 신인 감독이었다. 그리고 ‘과속 삼대 스 캔들’과 ‘수상한 여자’로 일약 스타 감독 반열에 오른 강형진도 두 작품 의 연출을 맡기 이전에는 신인급 감 독이었다.
이규한과 두 작품을 함께하면서 스 타 감독이 된 케이스였다.
김기현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 다.
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김기 현이 물었다.
“신인 감독 중에 누구에게 연출을 맡기려는 건데?”
이규한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김대만 감독.” “여기 곱창 맛이 괜찮아요.”
이규한이 가게 문을 열고 앞장섰 고,하태열이 따라 들어왔다.
빈 탁자에 앉아서 곱창 2인분을 주문한 후,이규한이 소주병을 들었 다.
“한 잔 받으세요.”
쪼르륵.
규한이 물었다.
“이제 적응 좀 되셨어요?”
“아직 멀었어.”
이규한에게서 소주병을 건네받으며 하태열이 대답했다.
“적응을 못 해서 소주 한잔 사 달 라고 부탁한 거야.”
“많이 힘드세요?”
“힘들다기보단 잘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많아.”
“어떤 부분이 이해가 안 되세요?” “이 대표가 내리는 선택들.”
“제가 내린 선택들이요?”
“가장 최근의 일은 김대만 감독에 게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연출을 맡기려 하는 이 대표의 결정이야.”
소주잔을 비운 이규한이 쓰게 웃었 다.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제작은 이 규한이 주도하고 하태열이 뒤를 받 쳐 주는 구조였다. 그리고 하태열은 제작비 100억이 넘어가는 대작인 ‘어메이징 히어로즈’의 연출을 신인 감독인 김대만에게 맡기려는 이규한 의 선택에 의문을 품은 것이었다.
‘내 잘못이야.’
이규한이 자책했다.
하태열에게 충분히 설명을 하지 않 았기 때문에 그가 이런 의문을 가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꼭 김대만 감독이어야 하는 이유 가 있어?”
“네,있습니다.”
“뭔데?”
끼이익.
이규한이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일어서?”
“잠깐 밖으로 나가죠.”
“갑자기 왜?”
“담배 생각이 나서요.” 먼저 밖으로 나온 이규한에게 하태 열이 물었다.
“담배 안 피잖아?”
“그냥 입에 물고라도 있으려고요.”
“무슨 일 있어?”
“옛날 생각이 나서요.”
이규한의 기억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과거로 치달아 갔다.
영화 ‘만월’의 VIP 시사회 당시, 제작 시사회 때 보았던 편집본과 너 무 다른 작품에 당황했던 기억.
관객석 곳곳에서 새어 나오던 답답 한 한숨과 탄식 소리.
빚 독촉을 하기 위해서 걸려 왔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던 기억.
그런 이규한의 기억이 마지막으로 영화 ‘만월’의 연출을 맡았던 김대 만 감독과의 먹살잡이로 이어졌다.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김기현 대표가 찾아와서 ‘만월’을 망하게 만들라고 협박했거든요.”
이규한에게 먹살이 잡힌 채 김대만 감독이 털어놓았던 진실은 충격적이 었다.
또, 지독한 배신감을 느끼게 만들 그래서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자 담 배 생각이 간절해진 것이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