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분이 아직 덜 풀렸거든요 제작비가 100억이 넘어가는 대작 이 흥행에 참패하면 메이저 투자 배 급사도 휘청거리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씨제스 엔터테인먼트가 투 자했던 대작 작품이 한 편도 아니고 세 편이나 잇따라 흥행에 실패했다. 그로 인해 김대환 역시 사퇴 압박 에 시달렸던 것이고.
환은 고개를 흔들었다.
“투자를 해서 모두 성공할 수는 없 는 노릇이네. 투자 실패는 비일비재 한 일이야. 내가 진짜 후회하는 것 은 자식 농사에 실패한 거야.”
김대환이 다시 잔을 비웠다.
“나처럼 고생시키지 말자,이런 생 각에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그게 자식을 망치는 길이라는 것도 모르 고.”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나도 늦지 않았길 바라고 있네.“
쪼르륵.
김대환이 소주병을 들어 이규한이
들어 올린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그래서 부탁이 있네. 자네가 날 좀 도와주게.”
“무슨 말씀입니까?”
“기현이 그 녀석에게 진짜 영화를 어떻게 제작하는지 자네가 좀 알려 주게.”
‘날 만난 목적이 이거였구나.’
이규한이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가 며 생각했다.
그렇지만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 는 않았다.
김대환이 이런 부탁을 할 것을 어 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와 배급을 맡은 작품을 블루문 엔터테 인먼트와 스카이 엔터테인먼트가 공 동 제작을 했으면 하네.”
“공동 제작이요?”
“맞네.”
“어떤 작품입니까?”
김대환이 대답했다.
“아직 가제이긴 하지만 ‘어메이징 히어로즈’라는 작품이네.”
‘어메이징 히어로즈?’
이규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들어 보는 작품의 제목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내 기억에 없지?’
이규한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 다는 것이 ‘어메이징 히어로즈’가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증거 였다.
‘이상한데? 좀 더 알아보자.’
이렇게 결심한 이규한이 다시 질문 했다.
“제작비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150억 정도로 예상하고 있네.”
‘대작이다.’
대작이란 사실을 알게 된 이규한이 재차 고개를 갸웃했다.
제작비 규모가 150억 수준이고,씨 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와 배급 을 맡았다면 분명히 개봉을 했을 것 이다.
그렇다면 흥행에 성공을 했건 실패 했건,이규한이 제목 정도는 들어 봤을 터였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어메이징 히어로즈’라는 제목은 들 어 본 적이 없었다.
‘아까 가제라고 했으니까 제작 과 정에서 제목이 바뀌었던 건가?’
잠시 후,이규한이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 냈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란 생각 이 들어서였다.
‘틀렸습니다.’
김대환을 바라보며 이규한이 속으 로 생각했다.
아까 김대환은 자식 능사를 잘못했 다고 후회했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자신의 실수를 바로 잡고 싶다고 밝 혔다.
김대환이 찾아낸 방법은 ‘어메이징 히어로즈’라는 작품을 블루문 엔터 테인먼트와 스카이 엔터테인먼트가 공동 제작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의도는 눈에 훤히 그려 졌다.
‘족집게 과외.’
이규한이 ‘어메이징 히어로즈’라는 작품의 제작을 진행하는 과정을 아 들인 김기현이 곁에서 지켜보게 하 면서 일종의 족집게 과외를 받길 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김대환의 선택은 틀렸다.
만약 진짜 자식 능사를 제대로 할 의도였다면,스카이 엔터테인먼트와 의 관계부터 단절해야 했다.
즉,스카이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 하는 영화를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 서 투자와 배급을 맡지 않았어야 했 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김기현은 금세 궁지에 몰릴 것이었 다.
당연히 스카이 엔터테인먼트는 오 래 버티지 못할 것이고,김기현은 밑바닥부터 다시 기어 올라와야 했 다.
자식이 고생하고 좌절하는 모습.
부모로서 분명히 지켜보기 힘들겠 지만,가장 확실한 교육 방법이었다.
그러나 김대환은 가장 확실한 교육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편법을 선택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일 텐가?”
그때,김대환이 초조한 기색으로 다시 질문했다.
이규한이 잔을 비운 후 대답했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김대환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여부 를 혼자서 결정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이규한이 다음 날 아침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대환이 자신에게 했던 제안에 대 해서 설명한 후,이규한이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직원들에게 의견을 구 했다.
“나쁜 제안은 아닌 것 같은데.”
황진호가 가장 먼저 의견을 꺼냈 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가 확실하게 밀어준다고 약속했으니,실패 확률 은 그만큼 줄어든 셈이니까.” “백 피디 의견은?”
“무조건 해야죠.”
백진엽이 평소와 달리 열정적인 모 습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무조건 해야 하는 이유는?”
“요새 작품 투자를 받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시지 않습니까? 이미 투자 까지 확정된 마당이니,무조건 해야
죠
백진엽의 이야기 중 틀린 부분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그가 감추고 있 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것에 대해서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진짜 이유를 말해 봐.”
“진짜 이유요?”
“날 속일 생각 마. 다른 이유가 있 잖아.”
“그게…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와 돈 독한 관계를 유지해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요.”
잠시 후,백진엽에게서 돌아온 대 답을 들은 이규한이 웃으며 물었다.
“‘부산행 열차’ 때문이지?”
“네?”
“‘부산행 열차’는 제작비가 큰 작 품이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와 돈 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번 작품 까지 흥행시키면 ‘부산행 열차’의 투자와 배급을 맡아 줄 확률이 높 다,이런 계산이 밑바탕에 깔려 있 는 것,아냐?”
정곡을 찔려서일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백진엽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뭐,그런 계산을 아주 안 했던 건 아니죠.”
‘역시.’
이규한이 예상대로라고 생각한 순 간,김미주가 끼어들었다.
“저도 찬성입니다.”
“왜 찬성이야?”
“인센티브 받을 수 있을 것 같거든 요.”
‘솔직해서 좋아.’
김미주의 대답을 듣고 픽 웃은 이 규한이 마지막으로 하태열을 바라보 았다.
“선배도 같은 생각이세요?”
“아니,난 달라. 스카이 엔터테인먼 트와 공동 제작을 하는 조건이라면 이 작품은 안 했으면 좋겠어.”
“이유는요?”
“공동 제작이 위험하다는 것,이 대표도 이미 경험했잖아.”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램프 엔터테인먼트 박태혁 대표와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라는 작품을 공동 제작 하는 과정에서 이규한은 뒤통수를 맞았다.
무척 아프고 쓰라렸던 경험.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된다고 하태열은 경고하고 있었다.
“아마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겁니 다.”
“그게 무슨 뜻이야?”
“또 뒤통수를 맞은 확률이 높다는 뜻입니다.” “김대환 대표와 김기현,욕심이 많
은 편이거든요.”
하태열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공동 제작 도중에 블루문 엔터테 인먼트가 배제될 수도 있단 뜻이 야?”
“아마 그럴 겁니다.”
“하지만……
“영화 제작이 거의 끝나 갈 때가 되면 김대환 대표가 블루문 엔터테 인먼트를 제작에서 배제시킬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김기현이 이끄는 스카이 엔터테인먼트에서 단독 제작 을 한 것으로 해서 작품을 개봉할 겁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네. 그렇게까지 할 겁니다. 김대환 대표도 아버지니까요. 그리고 그냥 아버지가 아니죠. 영화계에서 막강 한 힘을 갖고 있는 아버지죠.”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게 부모였다.
김대환 역시 아버지라는 사실을 이 규한은 포장마차에서 대화를 나눈 후 확실히 깨달았다.
“그럼 이번 작품에 참여하면 안 되 겠네.”
황진호가 굳은 표정으로 말한 순 간,이규한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참여할 겁니다.”
“왜?”
“제 분이 아직 덜 풀렸거든요.” ‘베테랑들’의 야외촬영 현장.
이규한이 촬영 현장에 도착하자, 낯익은 스태프들이 눈인사를 건넸 다.
그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며 이 규한이 발소리를 죽인 채 장준경에 게 다가갔다.
툭.
이규한이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치 자 장준경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이규한을 발견하고 두 눈을 크게 떴 다.
“언제 왔어?”
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왜 연락도 없이……?”
“촬영 중이니까 잠깐 나가자.”
이규한이 장준경과 함께 촬영 현장 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찾아 온 거야?”
장준경이 의아한 시선으로 던진 질 문에 이규한이 대답했다.
“미안해서 찾아왔어.”
“뭐가 미안해? 혹시… 무슨 안 좋 은 일이라도 있어?”
장준경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물었다.
조금은 과하다고 느껴지는 반응.
그렇지만 이규한은 장준경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이해가 갔다.
영화를 제작하다 보면 갖은 변수가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그 변수들로 인해 제작이 무산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고.
심지어 촬영을 마치고 제작 시사회 까지 가진 후에도 작품을 개봉하지 못하는 경우도 여럿 존재했다.
홍보비를 쏟아붓지 않는 편이 손실 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는 편이라고 투자 배급사에서 판단을 내리는 경 우였다.
그리고 장준경은 갖은 돌출 변수들 로 인해서 제작이 무산되는 경우를 수차례 경험한 제작자였다.
그래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었고.
“아무 일 없어.”
서 이규한이 서둘러 대답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장준경 이 다시 물었다.
“그럼 왜 미안하다고 말한 거야?”
“감시 역할을 너한테 혼자 맡겨 둔 게 미안하단 뜻이였어.”
“감시 역할?”
“우중완 감독이 딴짓 못 하도록 철 통 감시 하고 있잖아.”
그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장준경이 환하게 웃었다.
“그동안 제작자 생활을 오래 했지 만,이번처럼 열심히 촬영장에 쫓아 다닌 것은 처음이다. 대체 왜 촬영
장에 꼭 따라다니라고 한 거야?”
“연출을 맡은 게 우중완 감독이니 까.”
“ 9”
“불안하거든.”
이규한의 말을 들은 장준경이 따지 듯 물었다.
“언제는 천재 감독이라면서?”
“천재 감독 맞아. 그래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고.”
“무슨 뜻이야?”
“천재는 영감이 번뜩이거든. 밀착 감시를 하고 있지 않으면 시나리오 와 콘티랑 다르게 이상하게 촬영을
할 가능성이 높거든.”
“그건 걱정할 것 없어. 조금,아니 많이 깐깐한 편이긴 한데,아직까지 이상한 짓은 안 하고 있으니까.”
“확실해?”
“확실히 감시하고 있었다니까.”
“다행이네.”
이규한이 웃음을 지었을 때,우중 완 감독이 디렉션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컷. 10분만 쉬었다 가시죠J “우 감독님.”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우중 완이 벌떡 일어났다.
그런 그가 고개를 돌렸다가 이규한 을 확인하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 다.
“대표님,언제 오셨습니까?”
허둥대며 인사하는 우중완을 바라 보던 이규한이 두 눈을 가늘게 좁혔 다.
‘수상한데?’
의심을 품은 이규한이 물었다.
“제가 귀신이라도 됩니까?”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