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화
이규한이 영화 제작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회귀를 한 데다가 감정이라는 특수 한 능력까지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성공을 좇느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료와 선후배들이 궁지 에 몰려 있는 것을 모른 척 외면했 다.
천천히 고개를 흔들던 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다.
‘어쩌면 이게 내게 주어진 사명이 아닐까?’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 한 기적이 하필 자신에게 벌어진 데 는 어떤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지금까지 그 이 유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대신 기적이 벌어지며 얻은 능력을 이용해서 성공을 좇았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처음으 로 하필 자신에게 이런 기적이 벌어
졌던 이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 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 해서 고민하게 된 것이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어둠에 휩싸인 청월 빌딩을 바라보 던 이규한의 고민이 깊어졌다.
박스오피스 순위.
1위. 나를 사랑한 아저씨. 2위. 위험한 펜션.
3위. 플라이 하이.
북소리를 요란하게 울려서 가장 유 력한 경쟁작이었던 ‘공범들’의 개봉 을 뒤로 미루도록 만들자,그래서 무주공산에 입성하자.
이규한이 세운 계획은 적중했다.
마땅한 경쟁작이 없었던 데다가 씨 제스 엔터테인먼트 측에서 대작급으 로 흥보에 열을 올린 덕분에 ‘나를 사랑한 아저씨’는 개봉 첫날 박스오
피스 순위 1위에 올랐다.
예매율은 40퍼센트대 중반.
압도적인 1위를 달리는 상황이었 고,관객평도 나쁘지 않았다.
- 간만에 보고 나서 가슴이 따뜻 해졌다.
- 찬바람 부는 가을에 개봉해서 더 좋았음.
- 따뜻하고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신 느낌.
- 올해 내가 본 최고의 영화.
관람평을 확인한 이규한이 대표실
을 빠져나갔다.
커피 전문점 블루문.
이규한이 고정석이나 다름없는 창 가 쪽 탁자에 앉아 있을 때,이규리 가 아이스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갖 고 다가왔다.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들었어. 커피 가 더 맛있을 거야.”
“그래? 기대되네.”
이규한이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 내서 내밀었지만,이규리는 손사래
를 쳤다.
“됐네요.”
“뭐가 됐다는 거야?”
“오늘은 공짜야.”
“웬일이야?”
평소 이규리는 계산이 철저한 편이 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계산은 정확해 야 한다면서 항상 칼같이 계산했었 다. 그런데 오늘은 커피와 케이크값 을 받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래?”
그래서 이규한이 이유를 묻자 이규 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거든.”
“무슨 양심?”
“오빠 덕분에 호인 씨가 무사히 입 봉할 수 있었다는 것,나도 알아. 그래서 나도 표현은 안 했지만 내심 무척 고마워하고 있어.”
“안다니 다행이네.”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답니 다. 진짜 고마워. 평생 잊지 않을 게.”
이규리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괜히 멋쩍어진 이규한이 서둘러 화 제를 돌렸다.
“그래서?”
“응?”
“고작 커피랑 케이크로 때우려는 거야?”
“에이,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그 정도로 양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 니까. 다른 것도 준비했어.”
“뭘 준비했는데?”
이규한이 호기심을 드러내자 이규 리가 대답했다.
“아직은 비밀이야. 조금만 더 기다 려 줘.”
‘대체 뭘 준비했을까?’
더욱 궁금해졌을 때,커피 전문점
안으로 최호인이 들어섰다.
“대표님, 인터뷰가 길어지는 바람 에 조금 늦었습니다.”
그가 약속 시간에 약 m분가량 늦 은 것에 대해서 사과했다.
“괜찮아. 규리랑 얘기하느라 지루 하지 않았거든. 그보다 이제 호칭을 바꾸지?”
“호칭… 이요?”
“‘나를 사랑한 아저씨’가 개봉하면 서 최 감독과 나 사이의 계약 관계 는 얼추 마무리됐어. 그러니 이제 새로운 작품을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와 하기 전까지는 서로 공적인 관계 로 얽히지 않은 셈이니까 호칭을 바
꾸라고.”
“알겠습니다,형님.”
최호인이 눈치 빠르게 호칭을 바꿨 다.
그런 그는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한 눈치였다.
그러나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망 설일 때,이규리가 대신 나섰다.
“오빠, 호인 씨 다음 작품도 블루 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할 거야?”
‘부창부수가 따로 없네.’
눈치 빠르게 최호인을 대신해 나서 는 이규리의 모습을 확인하고 속으 로 쓰게 웃은 이규한이 대답했다.
“그건 최 감독에게 달렸지.”
“무슨 뜻이야?”
“‘나를 사랑한 아저씨’의 흥행 성 적이 괜찮으면 여러 제작사가 최 감 독에게 계약 제의를 할 거야. 즉, 어떤 제작사와 함께 일할지를 결정 하는 선택권은 최 감독이 손에 쥐고 있다는 뜻이야.”
비로소 말뜻을 이해한 이규리가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빠 이야기 듣고 나니까 비로소 호인 씨가 입봉했다는 게 실감이 나 네.” 그때,최호인이 입을 뗐다.
“저는 다음 작품도 형님과 함께하 고 싶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웃으며 물었다.
“질리지 않았어?”
“네?”
“신물 날 정도로 내게 잔소리를 들 었잖아?”
“형님께서 애정이 있어 잔소리를 하셨다는 것,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이규한이 다 시 말했다.
다롭다는 것은 알게 됐지?”
“물론입니다.”
“‘나를 사랑한 아저씨’의 최종고가 기준이야.”
“ 구"
“그 기준 이상의 시나리오 초고를 갖고 오면 계약해 줄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기 때문일까.
최호인이 한숨을 푹 내쉬는 것을 웃으며 바라보던 이규한이 다시 화 제를 돌렸다.
“입봉한 기분이 어때?”
그리고 제가 연출한 ‘나를 사랑한 아저씨’라는 작품이 박스오피스 1위 에 올랐다는 것도 실감이 안 납니 다.”
“좋아?”
“솔직히 말씀드리면 너무 좋아서 간밤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최호인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대답 했다.
잠시 후,그가 이규한의 담담한 표 정을 살피며 질문했다.
“형님은 안 기쁘십니까?”
“기뻐.”
“그런데 왜 표정이……
“아직 안 끝났거든.”
최호인과 이규한의 입장은 달랐다.
최호인의 입장에서는 ‘나를 사랑한 아저씨’의 개봉과 함께 원하던 것을 거의 다 이룬 상황이었다.
입봉을 했고,비록 영화계 비수기 시즌이긴 하지만 박스오피스 1위로 출발한 ‘나를 사랑한 아저씨’의 홍 행 성적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규한의 입장은 달랐다.
개봉 첫날,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나를 사랑한 아저씨’의 관객 수는 약 8만 명 수준.
평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적
은 숫자였다.
‘반토막 이상이야.’
이규한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암살자,보이지 않는 총구’의 개봉 첫날 관객 수는 평일이었음에도 불 구하고 20만 명을 훌쩍 넘겼었다.
‘나를 사랑한 아저씨’와 ‘암살자, 보이지 않는 총구’.
두 작품 모두 개봉일에 박스오피스 순위 1위에 올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이런 차이가 발생한 원인은 영화계 성수기에 개 봉했느냐 비성수기에 개봉했느냐 여 부였다.
‘우려했던 대로야.’
이런 차이가 발생한 이유.
작품의 내용이나 완성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극장가 비성수기에는 극장으 로 찾아오는 관객 수가 적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이런 추세라면 ‘나를 사랑한 아저씨’의 최종 관객 수는 300만 명을 넘기지 못할 가능 성이 높았다.
‘248,3347명.,
이규한이 마지막으로 감정을 했을 당시 ‘나를 사랑한 아저씨’의 예상 관객 수였다.
순 제작비는 최대한 줄였지만 홍보 에 치중하면서 자연스레 총 제작비 가 늘어난 상황.
대략 2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것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는 있 었다. 그렇지만 큰 수익을 올리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그건 이규한이 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빚을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안유천과 김단비 작가 그리고 주 연배우 이성균.’
‘나를 사랑한 아저씨’를 제작하면 서 이규한이 빚을 졌던 사람들이었 다.
업계 톱클래스 작가들인 안유천과 김단비는 각색비를 받는 대신 러닝 개런티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성 균도 보장 개런티는 불과 1억 원 수준이었고,작품의 홍행에 따라 더 많은 출연료를 챙길 수 있는 닝 개 런티 계약을 맺었다.
모두 자신을 믿고 러닝 개런티 계 약의 비중을 늘린 상황.
이규한은 그들의 믿음에 부응하고 싶었고,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사 랑한 아저씨’의 관객을 더 동원해서 가능한 수익을 더 늘려야 했다.
‘때가 됐다.’
를 꺼냈다. 그리고 씨제스 엔터테인 먼트 홍보팀장인 김덕원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 SNS 마케팅을 시작해 주십시오.
- ‘나를 사랑한 아저씨’ 400만 관 객 돌파 기념 축하연.
고기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한쪽 벽 면에 붙어 있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가장 먼저 이규한의 시선을 잡아끌 그 플래카드를 이규한이 웃으며 바 라보고 있을 때,이성균이 앞으로 다가왔다.
“대표님,오셨습니까?”
“일찍 도착하셨네요.”
“일부러 일찍 찾아왔습니다.”
" ……?"
“제 주연작인 ‘나를 사랑한 아저 씨’가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게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아서요. 축하연 자리에 오고 나면 진짜 실감이 나지 않을까 싶어서 일찍 도착했습니다.”
밤잠을 설쳐서일까.
이성균의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 었고,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지만 이성균의 표정만큼은 밝 았다.
‘나를 사랑한 아저씨’의 흥행 성공 으로 그동안 가슴에 맺혀 있었던 흥 행의 한을 풀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 문이리라.
“이게 다 성균 씨가 좋은 연기를 해 주신 덕분입니다.”
이규한이 이성균에게 공을 돌렸지 만,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똑같았습니다.”
“네?”
“그동안 출연했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최선을 다해 준 비를 하고 연기에 임했습니다. 그렇 지만 작품의 홍행 결과는 달라졌습 니다. 이성균이라는 배우는 작품을 고르는 눈이 없다, 처음 만났을 때 대표님이 하셨던 말씀입니다. 결과 적으로 대표님의 말씀이 옳았던 겁 니다.”
열변을 토한 후 이성균이 덧붙였 다.
“그래서 대표님께 부탁이 하나 있 습니다.”
“어떤 부탁이십니까?” “다음 작품도 꼭 대표님과 함께하 고 싶습니다. 주인공 배역이 아니더 라도 좋습니다. 흥행할 수 있는 좋 은 작품이라는 확신이 드시면 제게 꼭 출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 오.”
“오히려 제가 드리고 싶은 부탁입 니다.”
이규한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성공은 달콤하다.
돈과 명예를 모두 손에 렬 수 있 으니까.
그렇지만 돈과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다.
바로 신뢰다.
본인이 제작한 영화가 흥행 성공을 거두어서 돈과 명예는 얻었지만,감 독과 배우 그리고 스태프들의 신뢰 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돈과 명예를 조금 더 가지려고 욕 심을 부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규한은 욕심을 더 부리는 대신 신뢰를 얻는 선택을 내렸다. 그리고 이규한은 지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때,남지유가 다가왔다.
“지유 씨,왔어……?”
남지유에게 인사하던 이규한이 도
중에 말을 멈췄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던 도중에 남지 유가 달려와 이규한에게 몸을 던지 듯이 안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를 매몰차게 밀어낼 수는 없는 노릇.
이규한이 팔을 벌린 채 석상처럼 굳어져 있을 때였다.
‘운다?’
자신의 품에 안긴 남지유가 가늘게 몸을 떨면서 들썩이는 것이 전해졌 다.
‘왜 울지?’
그 사실을 깨닫고 이규한이 당황했 을 때,남지유가 품에 안긴 채 말했 다.
“책임지세요.”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