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계산은 철저하게 ‘만약 예전이었다면?’
이규한은 박태혁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 줬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똑같은 경험을 하고 나서 얼마나 아픈지 깨달아 봐야 해.’
이규한이 입으로 아무리 떠들어 봐 야 박태혁은 깨닫지 못하리라.
본인이 직접 배신을 당해 봐야 누 군가를 배신하는 게 얼마나 몹쓸 짓 인지 깨닫게 될 터.
그래서 이규한이 박태혁을 노려보 며 다시 입을 뗐다.
“사무실 임대료도 주시죠.”
그 말을 들은 박태혁이 발끈했다. “야,임대료는 공짜라고 했잖아?”
“그때는 공짜였죠.”
“그때는?”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라는 작품 을 공동 제작 하기로 했기 때문에 사무실 임대료를 받지 않았던 겁니 다. 그렇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
으니,임대료를 받아야겠습니다.”
“치사한 놈.”
“방금… 치사한 놈이라고 했습니 까? 박태혁 대표님께 그런 말을 입 에 올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
까?”
이규한의 서슬 퍼런 눈빛을 감히 맞받지 못하고 박태혁이 시선을 피 했다.
“임대료 내면 될 것 아냐? 시세대 로 청구해.”
“태열 선배 월급 보조해 줬던 것도 청구할 겁니다. 그리고 이미 지급한 기획 개발비도 보전해 주셔야 합니 다.” “작가 계약한 것 말이지? 그건 그 대로 내가 떠안을게.”
“무슨 뜻입니까?”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작가에 게 지급한 계약금은 돌려주고,작가 계약은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뜻이 야.”
박태혁이 백기원과 시선을 교환한 후 말했다.
‘참 뻔뻔하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이규한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이규한은 박동선 작가와 ‘은밀하면 서도 위대하게’의 시나리오 작가 계 약을 맺었다. 그리고 박태혁이 이 계약을 떠안으려는 이유.
자신이 하필 박동선 작가에게 ‘은 밀하면서도 위대하게’의 시나리오 작업을 맡긴 것에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박태혁의 생각대로였다.
원작이 있는 작품의 시나리오 작업 에 박동선이 최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규한은 그와 시나리오 계 약을 했던 것이었다.
“그건 알아서 하십시오.”
“작가와 협의하란 뜻이지?”
“맞습니다.”
이규한이 수락하자 박태혁과 백기 원의 표정이 동시에 밝아졌다.
원하던 것을 얻었다고 판단했기 때 문이었다.
‘뜻대로 홀러가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규한은 속으로 비웃었다. 이미 독하게 마음을 먹은 상황. 그래서 이규한은 빅박스를 찾아오 기 전에 이미 박동선 작가를 만났 다.
“저는 이규한 대표님과 함께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
당시 박동선 작가가 꺼냈던 대답이 었다.
다행히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의 시나리오 작업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었다. 그래서 이규한 은 박동선 작가에게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가 아니라 ‘부산행 열차’의 시나리오 작업을 맡아 달라고 제안 했다.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의 시나리 오 작가 계약을 하면서 계약금을 이 미 받은 상황.
‘부산행 열차’라는 작품의 시나리 오 작가 계약을 새로 맺는 것이니 박동선 작가의 입장에서는 이득이면
이득이지 절대 손해는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박동선 작가는 흔쾌히 이규한의 제 안을 수락한 상황이었다.
박태혁이 찾아가서 사정을 하거나 협박해 봐야 박동선 작가는 ‘은밀하 면서도 위대하게’의 시나리오 작업 을 맡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다 끝났지?”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박태혁이 밝은 표정으로 물은 순간,이규한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또 뭐가 남았는데?” “시간이요.”
“시간?”
이규한이 덧붙였다.
“대한민국 톱클래스 제작자가 한 달 넘게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라 는 작품에 매달렸습니다. 그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상도 받아야겠습니 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인근 고기집.
이규한이 들어서자,이미 회식하자 는 연락을 받은 블루문 엔터테인먼 트 직원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빅스빅 픽처스 대표인 장준경과 하 태열도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직원들 틈에 섞여 있었다.
“저 왔습니다.”
이규한이 테이블 앞에 도착하자 황 진호가 물었다.
“갑자기 웬 회식이야?”
“제가 공돈을 좀 벌었습니다.”
“공돈을 벌어? 어떻게?”
“눙담입니다. 너무 오래 회식을 안 했던 것 같아서요.” 이규한이 가볍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자 장준경이 입을 됐다.
“이거 내가 끼어도 되는 자리인지 모르겠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직 원들끼리 오붓하게 회식하지 그래?”
“장 대표를 부른 데는 다 이유가 있지.”
“무슨 이유?”
“임대료 밀렸더라?”
이규한이 웃으며 말하자 장준경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회식비 계산하라고 불렀다는 뜻이 지?”
“왜? 내기 싫어?”
“메뉴가 소고기잖아. 너무한 것 아 냐?” “그렇게 정색할 필요 없어. 농담이 니까.”
“농담?”
“그냥… 사람이 많아서 떠들썩하면 더 좋을 것 같아서 부른 거야.”
장준경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이규한이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금세 이상한 낌새를 알아 챘다.
“이 대표,무슨 일 있는 거지?”
장준경의 질문을 받은 이규한이 대 답했다.
“무슨 일,있지.”
“무슨 일인데?” “제대로 배신당했어.”
어차피 머잖아 알게 될 터.
그래서 이규한이 굳이 감추려 들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하자 김미주가 끼어들었다.
“누구한테 배신당했는데요?”
“미주 씨도 아는 사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대표님을 배 신할 만한 사람이라면……
잠시 뜸을 들이던 김미주가 물었 다.
“박태혁 대표,맞죠?” “역시 눈치가 빨라.”
이규한이 칭찬했음에도 김미주는 웃지 않았다.
“나쁜 놈. 그렇게 나쁜 놈을 그냥 내버려 뒀어요?”
“한 대 칠걸 그랬나?”
“뭐야? 배신을 당하고 한 대 치지 도 않았어요? 마음이 아주 태평양이 네,태평양.”
잠시 후,김미주가 다시 물었다.
“박태혁 대표 안 미워요?”
“별로.”
“별로… 라고요? 왜 안 미운데요?” “립다기보단 안된 마음이 더 커.” “왜요?”
“그 양반도 오죽하면 그랬을까? 이 런 생각이 자꾸 들어서.”
김미주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규 한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아무리 설명해도 김미주는 이해하 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주 씨는 제작자가 아니니까.’
대신 이규한이 소주잔을 들어 입으 로 가져갔다.
‘만약 같은 상황이라면?’
지금의 이규한은 박태혁 대표와 다 른 결정을 내릴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로 돌아오지 못했던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이규한 이라면?
박태혁 대표와 다른 결정을 내렸을 거란 확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준경아.”
“응? 응.”
“년 박태혁 대표 이해할 수 있지?”
“물론 나라면 다른 선택을 내렸겠 지만,박태혁 대표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선택을 내렸을지 충분히 이해 는 가.”
장준경 역시 영화 제작자.
이 돌아왔다.
‘박태혁 대표가 무조건 나빴던 게 아냐. 지금 한국 영화계의 구조가 이런 문제를 만들고 있는 거야.’
투자 배급사,배우 그리고 감독까 지.
그들의 파워와 입김이 강해질수록 제작자는 영화를 제작하기 어려워졌 다.
거기에 더해 투자 배급사들이 영화 제작에까지 은밀히 뛰어들면서 기존 영화 제작사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 됐다.
그로 인해 제작자들이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상황.
그렇지만 메이저 투자 배급사들은 제작자들을 함께 영화 일을 하는 동 반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영화 제작자들에게 손 을 내밀긴커녕,오히려 이런 상황을 이용해 영화 제작자들을 착취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투자 계약을 체결할 때,수익 배분 비율을 투자 배급사에게 더 유리하게 가져가는 것이다.
8 대 2, 심하면 9 대 1까지.
이런 경우 영화가 개봉해서 흥행에 성공한다 해도,제작사의 수익은 전 무하다시피 했다.
그렇지만 영화를 제작해서 개봉하 기 위해서는 투자 배급사와 손잡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투자 계 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악순환의 고리는 더욱 깊어지는 것이었고.
‘어렵다.’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이상하게 술맛이 없어요.”
김미주가 불평을 토로했다.
“왜 오늘따라 술맛이 없는가 했더 니 이유가 있었네요. 배신자가 술자 리에 섞여 있기 때문이었어요.”
김미주의 시선은 하태열에게로 향 해 있었다.
“배신자 주제에 대표님한테 고기까 지 얻어먹는 것,너무 양심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태열을 향해 김미주가 쏘아붙인 순간,이규한이 나섰다.
“태열 선배는 배신자가 아니라 오 히려 피해자야.”
“왜 피해자인데요?”
“박태혁 대표가 꾸민 일을 태열 선 배도 몰랐거든.”
하태열을 두둔하며 이규한이 덧붙 였다.
“자,정식으로 소개할게. 태열 선배 는 앞으로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같이 일하게 될 거야.”
“네?”
김미주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 다. 그리고 놀란 것은 황진호와 백 진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반응을 살피던 이규한이 입을 뗐다.
“아팠어요. 괜찮은 척했지만,그래 도 배신을 당하고 나니 무척 아팠습 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아프지 않 기 위해서 태열 선배를 블루문 엔터 테인먼트로 부른 겁니다.” “한잔 더 하자.”
이규한이 제안하자,장준경이 걱정 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취한 것 같은데 괜찮겠어?”
“임대료 낼 기회를 주려는 거야.”
“알았다. 가자.”
장준경과 어깨동무를 한 채 선술집 으로 향하던 이규한이 도중에 걸음 을 멈추었다. 그리고 청월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어둡다.”
잠시 후 이규한이 입을 떼자,장준 경이 대답했다.
“거의 다 공실이니까.”
기존에 청월 빌딩에 입주해 있었던 가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상황.
그래서 불이 꺼진 청월 빌딩이 오 늘따라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둠에 휩싸인 청월 빌딩을 바라보 며 이규한이 말하자,장준경이 대답 했다.
“정신 나간 건물주.”
“대책 없이 기존에 입주해 있던 가 게들을 다 내보냈으니까.”
장준경이 덧붙인 말을 들은 이규한 이 쓰게 웃었다.
“그걸 물은 게 아냐.”
“그럼?”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 걸 물은 거야.”
“우리?”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 그 일념으 로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던 우리가 왜 이렇게 궁지에 몰리게 된 걸까?”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 다.
장준경에게서 어떤 대답이 돌아오 길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답답함 속마음을 토로했던 것뿐이 었는데.
“세상이 변했으니까.”
장준경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세상이 변했다?’
이규한이 그 말을 속으로 되뇌었 다.
장준경의 말처럼 세상은 빠르게 변 했다.
그 과정에서 영화 제작 환경도 많 이 변했다. 그렇지만 영화 제작자들 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쳐졌다.
이것이 좋은 영화를 제작하겠다는 일념으로 영화판에 뛰어들었던 영화 제작자들이 궁지에 몰려 버린 이유 였다.
그때,장준경이 다시 말했다.
“이규한,넌 역시 좋은 놈이다.”
“왜 내가 좋은 놈이란 거야?”
“요새 충무로에서 제일 잘나가는 영화 제작자 이규한과는 상관없는 문제잖아? 그런데 마치 네 일처럼 다른 영화 제작자들을 걱정하고 있 는 게 네가 좋은 놈이란 증거야.”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