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공동 제작은 쉽게 말하면 동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업은 서로 의 뜻이 맞지 않으면,또 한 사람이 동업자를 속이려 작정하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일을 통해서 이규한은 그 사 실을 새로 배웠다.
아니, 배웠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뼈저리게 다 시 깨닫게 됐다고 표현하는 게 맞았 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만약 이규한이 잘나가는 제작자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은밀하면서 도 위대하게’ 하나뿐이었다면?
이번 일이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 치명타가 됐을 터였다.
그렇지만 현재 블루문 엔터테인먼 트에서 단독 제작을 하거나 공동 제 작 중인 작품은 여러 편이었다.
그래서 타격이 그리 크지 않은 것 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규한이 소주잔을 매만지고 있을 때,하태열이 물었다.
“오히려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입 니다.”
“응?”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규한이 하태열의 의중을 물었다.
“그만둘 생각이야.”
“왜요?”
“박태혁 대표에 대한 신뢰가 깨졌 으니까.”
이번 일을 통해 박태혁에 대한 신 뢰가 깨진 것은 이규한만이 아니었 다.
램프 엔터테인먼트 직원인 하태열 역시 빅박스와의 투자 계약을 체결 한 것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상 황인 만큼,박태혁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간 상황이었다.
‘자업자득(自業 i 得).’
속으로 생각하며 이규한이 물었다.
“그만두면 앞으로 뭘 하시려고요?”
“아직 정해진 건 없어. 이제부터 고민해 봐야지.”
“제가 고민을 덜어 드릴까요?”
“응?”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함께 일 하시죠.”
이규한이 제안했다.
그 제안을 받은 하태열이 두 눈을 치켜 떴다.
“왜 그런 제안을 하는 거야? 내가 불쌍해서?”
“그런 것 아닙니다.”
“그럼?”
“선배의 능력을 썩히는 게 아까워 서요.”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하태열에게 이규한이 덧붙였다.
“이번 일로 인해서 많은 걸 잃었습 니다. 저도 하나는 얻는 게 있어야
죠
‘공동 제작은 위험하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이규한이 얻은 가장 큰 교훈이었다.
앞으로 공동 제작을 최대한 줄여야 겠다고 결심하고 나자,자연스레 블 루문 엔터테인먼트의 제작 역량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이미 제작이 진행 중이거나 제작을 진행할 예정인 프로젝트들이 적지 않은 상황.
그리고 아직 끝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매력적인 프로젝트가 추 가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의 제작 역량에는 한계가 있었다.
황진호와 백진엽,김미주까지.
현재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근 무하는 직원들의 면면이었다.
이들 가운데 이규한이 믿고 제작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것은 황진호
뿐이었다.
백진엽은 아직 경험과 대중성이 부 족했고,김미주는 피디 일보다 경리 일이 주 임무였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이규한과 황진호가 고군분 투하고,공동 제작으로 제작 부담을 덜면서 프로젝트들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앞으로 공동 제작을 배제하 고 나면,이규한과 황진호 둘이서 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이규한이 떠올린 것은 인력 충원이 었다.
‘태열 선배면 믿고 맡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규한이 하태열을 적임자 라고 판단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하태열은 능력이 있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 탓에 현장에서 감독과 마찰을 일으킨 바람에 능력에 비해 평판이 낮을 뿐,하태열의 피디로서의 능력 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하태열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박태혁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고 난 후,이규한은 신뢰할 수 있는 사 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 다.
능력도 중요하지만,그보다 더 중 요한 것은 절대 배신하거나 뒤통수 를 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었다.
그런 면들을 놓고 고민해 보니,하 태열만 한 적임자도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로서는 반가운 제안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세요?”
“내가… 과연 도움이 될까?”
하태열이 망설이다가 꺼낸 질문을 들은 이규한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 었다.
그 미소를 확인한 하태열이 물었 “왜 웃어?”
“비슷해서요.”
“뭐가 비슷하다는 거야?”
“진호 형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 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거든요.”
비로소 말뜻을 이해한 하태열이 멋 쩍은 표정을 짓는 것을 바라보던 이 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램프 엔터테인먼트 입사 후에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피디로서 참 여했던 작품들이 개봉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로 인해 자신감이 추락 한 것,맞죠?” “맞아.”
“제가 판단하기에는 선배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램프 엔터테인먼트에서 준비 중이었 던 작품들이 개봉하기 어려운 환경 이었던 거죠.”
박태혁은 배포가 두둑한 편이 아니 었다.
또 승부사 기질이 있는 편도 아니 었다.
그래서 제작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린 탓 에 여러 차례 아까운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그것이 램프 엔터테인먼트가 ‘과속 삼대 스캔들’ 다음에 후속작을 내지 못했던 이유였을 것이고.
굳이 원인을 꼽자면 하태열이 아니 라 박태혁의 문제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자신 없는 표정을 짓고 있 는 하태열을 발견한 이규한이 말했 다.
“진호 형도 잘하고 있잖아요?”
“그렇긴 하지.”
“진호 형이 제가 인재를 보는 눈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저는 선 배가 탐이 납니다.”
“이 대표,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 다.”
“도와주실 거죠?”
“그래.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 볼 게.”
하태열이 제안을 수락한 순간,이 규한이 환하게 웃었다.
소주를 한 모금 마신 하태열이 잠 시 후 물었다.
“아까 던졌던 질문,다시 할게. 이 제 어떻게 할 거야?”
“후회하게 만들어 줘야죠.”
“후회? 고소라도 할 거야?”
개를 흔들었다.
“고소해 봐야 승소하기 힘들 겁니 다. 설령 승소한다 해도 남는 것도 별로 없고요. 괜한 심력과 아까운 시간만 낭비할 뿐이죠.”
소송은 힘들다.
시간과 돈 그리고 아까운 심력까지 소비해야 했다. 그리고 박태혁 대표 와 소송까지 가게 되면 자연스레 안 좋은 소문이 퍼질 터.
결국 제 살 깎아 먹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편이 나았다.
“그럼 그냥 이대로 포기할 거야?”
“그냥은 못 보내죠.”
“응?”
이규한이 대답했다.
“손해배상을 최대한 많이 받아 낼 겁니다.” 빅박스 투자팀 회의실.
이규한이 들어서자 백기원 팀장이 환하게 웃으며 맞아 주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그 미소를 확인한 이규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이렇게 되지 않았느냐?’
백기원이 입가에 머물러 있는 미소 를 통해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 서였다.
“왔냐?”
박태혁도 시선을 피한 채 인사를 건넸다.
그런 박태혁의 뒤통수를 매섭게 노 려보던 이규한이 맞은편 자리에 앉 자마자 백기원이 질문을 던졌다.
“얼마 전에 박태혁 대표와 만났다 면서?” “네,만났습니다.”
“그때 어떤 선택을 내릴지에 대한 대답을 미뤘다고 들었는데,이제 결 정을 내렸나?”
“손해배상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규한이 대답하자 백기원의 표정 이 밝아졌다.
가장 원하던 답이었기 때문이리라. 박태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규한이 고소라는 선택지를 포기 했기 때문에 안도한 것이리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에는 너무 이를 겁니다.’
그 반응들을 살피던 이규한이 속으
로 생각했을 때였다.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의 공동 제작을 결정한 후에 블루문 엔터테 인먼트에서 현재까지 사용한 기획개 발비를 보상해 주면 되는 거지?”
백기원의 질문을 들은 이규한이 고 개를 흔들었다.
“처음부터 계산을 다시 해야 합니 다.”
“응? 그게 무슨 뜻이지?”
“판권료부터 다시 계산하자는 뜻입 니다.”
이규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기 원과 박태혁이 앞다투어 입을 뗐다.
“판권료는 이미 지불이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야,판권료로 오천만 원 줬잖아.”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말했 다.
“오천만 원을 받았죠. 그렇지만 판 권료로 오천만 원을 책정한 데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었습니다.”
“무슨 조건?”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와 램프 엔터 테인먼트가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 라는 작품을 공동 제작 한다는 조건 이었죠.”
팩트이기 때문일까.
박태혁의 말문이 막혔다.
대신 백기원 팀장이 나섰다.
“얼마를 원하나?”
“제가 판권료로 얼마를 원했는지 백 팀장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
까?”
램프 엔터테인먼트 박태혁 대표에 게 판권을 넘기기 전에 빅박스 투자 팀장인 백기원과 ‘은밀하면서도 위 대하게’의 판권료 협상을 벌였었다.
당시 이규한이 불렀던 판권료는 이 억 원.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백기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보 “혹시 기억하지 못하시면 다시 알 려 드릴까요?”
“그럴 필요 없네. 기억하고 있으니 까. 그런데… 너무 과한 요구야.”
“그럼 이렇게 하시죠.”
“어떻게 말인가?”
“일억 오천만 원에 판권을 넘기겠 습니다. 이미 오천만 원을 지급 받 았으니 추가로 일억 원을 더 지급하 는 걸로 끝내시죠?”
잠시 고민하던 백기원이 천천히 고 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 판권료 협상이 잘 끝났다고 판단해 서일까.
박태혁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소 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 좋아할 때가 아닙니다.’
빅박스 투자팀장인 백기원은 계산 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가 판권료로 일억을 추가로 지급 하기로 결정했다는 게 의미하는 것.
그 이상의 수익을 거둘 자신이 있 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더 많은 수 익을 거둘 방법은 간단했다.
빅박스에서 ‘은밀하면서도 위대하 게’의 제작에도 참여하는 것이었다.
물론 백기원은 아직 마수를 드러내 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의 계획은 실행 중 이었다.
박태혁을 이용해서 가장 큰 걸림돌 이었던 이규한을 ‘은밀하면서도 위 대하게’ 제작 과정에서 쳐 낸 것이 백기원이 세운 계획의 시작이었다.
‘그다음은?’
이규한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나간 빈자 리에 빅박스의 자회사나 다름없는
제작사를 공동 제작사로 밀어 넣을 것이다.
물론 박태혁은 반대하겠지만,그에 게는 힘이 없었다.
백기원은 이미 박태혁의 약점을 손 에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약점은 램프 엔터테인먼트에 자 금력이 없다는 것과 하태열마저 빠 져나간 램프 엔터테인먼트의 제작 역량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백기원은 이 약점들을 철저 하게 이용할 것이다.
‘왜 모를까?’
이규한의 눈에는 훤히 보이는 그 그렇지만 박태혁은 전혀 보지 못하 고 있었다.
‘어서 투자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어서 작품을 제작해서 개봉해야 한 다.’ 모든 신경이 여기에만 쏠려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상황 이기 때문이다.
‘든든한 우산이라고 여기고 있겠 지.’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박태혁은 백기원을 함께 우산 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의지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착각에 불과 했다.
머잖아 백기원은 그 우산을 접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