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북소리를 울려라 (1) “골치 아픈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 습니다. 오늘은 그냥 즐겁게 술이나 마시도록 하죠.”
이규한이 분위기를 전환하며 소주 가 담긴 종이컵을 들었다.
가볍게 잔을 부딪친 후 이규한이 종이컵에 든 소주를 비웠을 때였다.
“대표님,오늘이 처음인 것 아세 요?” 남지유가 불쑥 물었다.
“뭐가 처음이란 겁니까?
“촬영장에 찾아오신 거요.”
남지유가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않 고 덧붙였다.
“명색이 저희 작품의 제작자이신데 너무 관심이 없으신 거 아니에요?”
남지유가 불평을 토로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서운하 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 서 이규한이 웃으며 변명을 꺼냈다.
“영화 제작자에게 있어 본인이 제 작하는 작품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입 니다. 당연히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동안 한 번도 안 찾 아오셨어요?”
“일부러 안 찾아왔습니다.”
“왜요?”
“제가 촬영장을 자주 찾아오면 저 기 앉아 있는 최감독이 불편해할 것 같아서요.”
" ‘……?"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원래 이규한은 촬영 현장을 자주 찾는 편이 아니었다.
제작자가 촬영 현장을 자주 방문하 면 현장의 책임자인 감독이 불편함 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를 사랑한 아저씨’의 촬영 현장에 그동 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이번 작품의 연출을 바로 최호인이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동생인 이규리와 결혼하며 머잖 아 한 가족이 될 가능성이 높은 최 호인이 연출을 맡고 있는 촬영 현장 에 이규한이 자꾸 찾아가면?
최호인이 무척 불편해하며 눈치를 볼 가능성이 높다.
이규한은 이렇게 판단했던 것이었 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규한은 ‘나를 사랑한 아저씨’의 연출을 맡은 최호인과 자신의 사적 인 관계에 대해서 배우들과 스태프 들에게 일절 알리지 않았다.
물론 남지유는 어머니의 생신을 축 하하는 식사 자리에 예고 없이 참석 해서 최호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최호인이 이규한 이 제작하는 영화의 감독 자격으로 그 자리에 찾아온 것으로 알고 있었 다.
그로 인해 자세한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남지유가 고개를 갸웃한 후 입을 뗐다.
“어쨌든 그 말씀은 앞으로도 대표 님께서 우리 촬영장을 찾아오지 않 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죠?”
“맞습니다.”
“그럼 오늘 꼭 찍어야겠네요.”
“뭘 찍는단 겁니까?”
“기념사진이요.”
남지유가 대답한 순간 이규한이 희 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왜 웃으세요?”
“요새 기념사진 찍자는 사람이 많 아서요.”
얼마 전에 있었던 박동선 작가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대답한 이규한이 덧붙였다.
“다 같이 찍죠.”
모두 한데 모여 기념사진을 찍은 후,남지유는 바로 스마트폰을 하기 시작했다.
“뭐 하고 있어요?”
“SNS에 방금 찍은 사진을 올리고 있어요.”
남지유의 대답을 들은 최호인이 두 눈을 빛내며 입을 됐다.
“저희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되겠네 요.”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호기심 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최소 비용으로 최대
한의 홍보 효과를 낼 수 있을까?’
이규한이 최근 들어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최호인이 홍보 라는 단어를 꺼낸 탓에 귀가 번쩍 뜨인 것이었다.
“왜 우리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된다 는 거야?”
“지유 씨가 SNS에 방금 찍은 사진 을 태그와 함께 올릴 테니까요.”
" ,<……?"
“지유 씨 SNS 팔로워 수가 얼마나 많은지 대표님은 아직 모르시는군 요. SNS 팔로워 수만 수백만 명입 니다. 만약 지유 씨가 SNS에 이 사 진을 올리면 수백만 명의 팔로워가 지유 씨가 주연을 맡은 우리 영화에 대해서 알게 될 테니까 자연스레 흥 보가 되는 거죠.”
‘이거다.’
최호인의 설명을 듣던 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다.
방금 설명을 듣는 도중에 최소 비 용으로 최대한의 흥보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 다.
‘아저씨.,
“한나?”
“아저씨,나를 사랑한 아저씨. 그리 고… 내가 사랑한 아저씨.”
남지유의 담담한 내레이션과 함께 영상이 끝났다.
제작 시사회가 끝난 순간, 이규한 이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 참석한 김대환 대표와 김덕원 홍보팀장 쪽 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김대 환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4왜 직접 왔을까?’
고개를 갸웃했다.
투자 배급사 측에서 먼저 요청해 오지 않는 경우,이규한은 투자사와 제작사가 함께 모여 편집본 영상을 검토하는 제작 시사회를 갖지 않았 다. 그리고 이규한이 제작 시사회를 갖지 않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 다.
바로 영화 ‘만월’ 때문이었다.
‘만월’을 개봉하기 전,레드문 엔터 테인먼트 대표였던 이규한은 VIP 시사회는 물론이고 제작 시사회도 가졌었다.
그런데 제작 시사회 때 보았던 편 집본 작품과 VIP 시사회 때 보았던
작품은 전혀 달랐다.
마치 다른 작품처럼 느껴졌을 정도 로.
그리고 다른 작품처럼 느껴졌던 이 유는 ‘만월’의 연출을 맡았던 김대 만 감독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렸기 때문이다.
김기현에게서 협박과 회유를 받았 던 김대만 감독은 일찌감치 투 트랙 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그래서 제작 시사회 때 공개했던 작품과 VIP 시사회 때 공개했던 작 품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즉,김대만 감독이 ‘만월’의 제작자 였던 이규한을 작정하고 기만했던
것이다.
그 일을 겪고 난 후,이규한은 제 작 시사회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 을 품었다.
‘만약 연출을 맡은 감독이 작정하 고 속이려 든다면?’
제작자 입장에서는 당할 수밖에 없 기 때문이다.
‘만월’을 통해서 뼈아픈 경험을 겪 은 후 이규한은 제작 시사회를 갖는 대신 연출자와의 인간적인 관계를 더 돈독하게 가지며 신뢰를 쌓으려 고 노력했다. 그리고 블루문 엔터테 인먼트에서 제작한 영화들이 잇따라 성공을 거두면서 개봉 전에 제작 시 사회를 갖는 경우는 더욱 줄어들었 다.
투자 배급사가 이규한이 이끌고 있 는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한 작품들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한 아저씨’의 경 우는 예외였다.
투자 배급사인 씨제스 엔터테인먼 트 측에서 먼저 제작 시사회를 하자 고 요청했기 때문에 이번 제작 시사 회가 열린 것이다.
‘이유가 뭘까?’
이규한이 김대환 대표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대표인 김대 환이 직접 ‘나를 사랑한 아저씨’의 제작 시사회에 찾아오리란 것은 예 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내가 못 올 데 왔나?”
예고 없이 제작 시사회를 불쑥 방 문한 김대환 대표를 발견하고 이규 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을 때,그가 웃으며 던졌던 말이다.
물론 투자 배급사 대표가 본인이 투자를 결정했던 작품의 제작 시사 회에 참석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었 다.
그렇지만 투자 배급사 대표가 제작 시사회를 찾는 것.
메이저 투자 배급사 대표는 바쁘 다. 그래서 기자 시사회나 VIP 시사 회에도 찾아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 분이다.
그런데 기자 시사회도 아닌 제작 시사회에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의 김 대환 대표가 직접 찾아왔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김대환이 고개를 돌렸다.
이규한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김 대환이 가까이 다가오라며 손짓했 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규한이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김 대환이 제안했다.
“순서를 바꾸세.”
? 구”
“질문의 순서를 바꾸자는 뜻일세. 아까 내가 했던 대답을 정정하려고 하거든.”
비로소 말뜻을 이해한 이규한이 다 시 물었다.
“왜 ‘나를 사랑한 아저씨’의 제작 시사회에 직접 찾아오신 겁니까?”
“궁금했기 때문이네.”
‘아까와는 다른 대답.’
“‘나를 사랑한 아저씨’라는 작품이 많이 궁금하셨습니까?”
“맞네. 그런데 작품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네.”
“또 뭐가 궁금하셨습니까?”
“자네.”
김대환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고 개를 갸웃한 순간이었다.
“신기하군.”
김대환이 이규한을 빤히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게 내 감상평이네.”
‘무슨 뜻일까?’
이규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김대환이 방금 꺼낸 신기하다는 감 상평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 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규한이 그 를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라 는 작품과 ‘나를 사랑한 아저씨’. 제 목이 바뀌었지만 같은 작품이지. 그 런데 과연 같은 작품이 맞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환골탈태했군. 이 렇게 확 바꾼 이유가 있나?”
“숭산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규한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숭산이 없다?” “대표님도 알고 계셨지 않습니까? 바꾸기 전의 작품 상태로는 개봉을 하더라도 승산이 없다는 사실 말입 니다.”
김대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버린 카드였네.”
“ ‘?”
“홍행에 대한 기대가 거의 없었단 뜻일세.”
“이번 작품의 투자와 배급을 맡았 던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수장인 대 표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 니다만.”
“그런가?” 껄껄 웃던 김대환이 다시 입을 뗐 다.
“그러나 그게 사실인 걸 어쩌겠나?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이 작품에 투 자를 결정한 이유는 흥행 때문이 아 니었네. 자네의 능력을 시험하는 게 진짜 목적이었지.”
이미 알고 있던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환의 입으 로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규한 의 호흡이 살짝 거칠어졌다.
다시금 분노가 치밀었기 때문이었 다.
그때 김대환이 말했다.
“내 나이쯤 되면 놀랄 일이 별로 많지 않은 법이네. 여러 경험이 쌓 이다 보니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거 나 당황하지 않거든. 그런데 자네 덕분에 무척 오랜만에 놀랐네.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작품이 좋게 바 뀔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거든.”
“그래서 아까 신기하다고 말씀하셨 던 겁니까?”
“맞네. 이렇게 작품이 확 바뀐 것 도 신기하고,그것을 가능케 만든 자네의 능력도 신기하네. 대체 무슨 수를 쓴 건가?”
김대환이 새삼스러운 시선을 던지 며 물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규한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 다. 그렇지만 김대환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렸 다.
“누구나 최선은 다하네. 그렇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드물지.”
“운이 따르는 편입니다.”
“운도 실력인 법이지.”
이규한이 꽁꽁 감추고 있는 비밀을 꼭 밝혀내고 말겠다는 둣 강렬한 시 선을 던지던 김대환이 입을 뗐다.
“난 자네가 마음에 드네.”
물었다.
“저로 인해 곤경에 처하지 않으셨 습니까?”
“얼마 전에 개봉했던 ‘해적의 시 대’의 흥행 부진 말인가?”
“네. 그런데 제가 멈거나 원망스럽 지 않으십니까?”
“처음에는 조금 화가 났었네.” 김대환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화가 사그라들더 군. 그리고 오히려 자네가 더 마음 에 들었네.”
“왜입니까?” 김대환이 대답했다.
“감히 내게 복수의 총구를 겨누었 던 자네의 두둑한 배짱이 마음에 들 었거든.”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