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내조의 여왕 이규한이 재차 확인해 준 순간, 백 기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빅박스에서 제시했던 일억에는 판 권을 넘기지 않겠다고 하더니, 다른 곳엔 오천만 원에 판권을 넘겼다?”
“그럼 안 됩니까?”
“물론… 안 될 건 없지.”
후우.
크게 숨을 내쉰 후,백기원이 물었 다.
“어디 이유나 들어 보세.”
“욕심이 생겼습니다.”
“무슨 욕심?”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라는 작품 을 직접 제작하고 싶다는 욕심 말입 니다.”
이규한의 대답을 들은 백기원이 고 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아까는 오천만 원에 판권 을 넘겼다고 말하지 않았나?”
“공동 제작이라는 조건을 붙였습니 다.”
“그렇군. 이제 이해가 가는군.”
백기원이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수익 배분 비율은 어떻게 정했 나?”
“4 대 6입니다.”
“어디가 6이지?”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4입니다.”
“적당하군.”
두 눈을 빛내며 평가하는 백기원을 바라보던 이규한이 물었다.
“비슷한 이유지 않습니까?”
“뭐가 말인가?”
이규한이 대답했다.
“빅박스에서 투자 제안을 한 이유 말입니다.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 라는 작품은 흥행에 성공할 확률이 무척 높다. 이렇게 판단했기 때문에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 일억이란 거 액을 판권료로 지불하고 판권을 구 입하시려고 했죠. 빅박스에서 제작 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을 겁니 다. 맞습니까?”
이규한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 다.
“친분도 있고,실력도 있는 제작자 에게 작품을 맡길 생각은 갖고 있었 지.” 백기원 팀장이 굳이 부정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이규한이 다시 입을 뗐 다.
“그런데 제가 판권을 넘기지 않으 면서 그 계획이 어긋나 버렸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그때 이 작 품의 투자를 받는 데 빅박스를 머릿 속에서 지웠습니다. 판권 구입 문제 로 빈정이 상할 대로 상한 빅박스 측에서는 이 작품에 투자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거든요. 그런데 그 확 신이 빗나갔습니다.”
이규한이 도중에 말을 멈추고 커피 를 마시는 백기원 팀장을 힐끗 살폈 다.
딱히 틀린 부분이 없기 때문일까.
그는 반박하는 대신 조용히 이규한 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빅박스에서 대체 왜 투자 제의를 했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 고민해 본 결과,제가 찾아낸 답은……
“자네가 찾은 답은 뭔가?”
“없습니다.”
“응?”
“모르겠습니다. 굳이 이유를 찾자 면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라는 작 품이 흥행할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투자를 한다는 건데. 과연 그게 백 기원 팀장님이 자존심을 굽힐 정도 의 가치가 있는가 여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질 않더군요.”
이규한이 말을 마친 후 백기원 팀 장을 바라볼 때였다.
“그 이유가 맞네.”
“네?”
“나는 빅박스 투자팀 팀장이네. 흥 행할 작품에 투자를 해서 수익을 거 두는 것이 내 일이지. 그리고 수익 을 거두기 위해서는 자존심 따윈 얼 마든지 버릴 수 있네.”
백기원 팀장이 대답했다.
‘정말 그럴까?’
그렇지만 이규한은 그 말을 순순히
백기원 팀장에 대한 소문, 그리고 미팅 장소를 두고 기 싸음을 펼치던 모습 등이 그의 대답을 순순히 믿기 힘든 이유였다.
그때,백기원 팀장이 다시 입을 뗐 다.
“궁금한 것은 어느 정도 해소된 듯 하니,본론으로 들어가세. 혹시나 해 서 투자 계약서를 미리 준비해서 가 져왔네. 직접 확인해 보게.”
백기원 팀장이 서류 봉투를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규한이 서류 봉투 속 내용물을 꺼내서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이규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 그러나?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이 있나?”
“투자사와 제작사의 수익 배분 비 율이 마음에 안 듭니다.”
8 대 2.
백기원 팀장이 준비해 온 계약서에 적시된 투자사와 제작사의 수익 배 분 비율이었다.
일반적인 경우,투자사와 제작사의 수익 배분 비율은 7 대 3.
그런데 이 계약서대로라면 제작사 에게 돌아오는 수익의 몫이 더 적었 “그 정도면… 적당하지 않나?”
빅박스 투자팀장인 백기원이 투자 사와 제작사가 일반적으로 7 대 3 으로 수익을 배분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모른 척 적당하지 않냐고 묻고 있었다.
“왜 적당하다는 겁니까?”
“요새 추세가 변했으니까.”
“ 9”
“예전에는 투자사와 제작사의 수익 배분 비율을 7 대 3으로 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요즘은 바뀌었네.
수익 배분 비율을 8 대 2로 하는 케이스가 늘어나고 있지. 그리고 그 이유가 다가 아닐세.”
“또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세 팅.”
백기원 팀장이 커피를 마신 후,덧 붙였다.
“현재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라는 작품은 시나리오 초고도 나오지 않 은 상황이야. 제작 과정에서 불안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지. 리스크를 안고 있는 상황이니 수익 배분 비율을 조정하는 게 맞다고 생 각하네.”
백기원 팀장의 이야기는 일리가 있 었다. 그래서 이규한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백기원 팀장이 다시 말했 다.
“수익 배분 비율을 이렇게 책정한 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네.”
“또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내 자존심값이라고 생각해 주게.”
‘자존심값이라.’
이규한이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흔 들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얼마나 필요한가?”
“보름 정도는 필요할 것 같습니
“알겠네,기다리지.”
순순히 대답한 백기원 팀장이 덧붙 였다.
“한 가지는 기억하게. 투자를 받을 수 있는 기회,그렇게 쉽게 찾아오 지 않는다는 사실 말일세.” “됐습니다. 빅박스 측에서 한 투자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백기원 팀장의 면전에서 이렇게 쏘 아붙이고 싶었다.
“그리고 하나 착각하고 계신 것 같 은데 백 팀장님의 자존심에 그만한 가치가 있지는 않습니다.”
이 말도 꼭 덧붙이고 싶었는데.
이규한은 결국 이 말들을 입 밖으 로 꺼내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박태혁 때문이었다.
만약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라는 작품을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단독 제작했다면?
이규한은 아까 하고 싶었던 말들을 백기원 팀장의 면전에 쏟아 냈으리 라.
그렇지만 공동 제작을 하고 있는 만큼,램프 엔터테인먼트 박태혁 대 표와 상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규한이 물었지만,박태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장고에 잠겼던 박태 혁은 한참 후에 입을 뗐다.
“두 사람 말이 다 맞다고 생각해.”
? …?"
“7 대 3이 아닌 8 대 2라는 수익 배분 비율이 불합리하다는 이 대표 말처럼 나도 그 부분이 마음에 걸 려. 그런데 투자를 받을 수 있는 기 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백기
원 팀장 말도 틀린 이야기가 아니거
드 ”
“좀 더 고민해 보실래요?”
“아니,내 생각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었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데요?”
“빅박스 측의 투자 제안을 받아들 이는 쪽으로.”
박태혁이 꺼낸 대답을 들은 이규한 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투자 제안을 받아들이는 방향 으로 마음이 기운 이유는 충분히 짐 작이 갔다.
‘과속 삼대 스캔들’ 이후 램프 엔 터테인먼트는 새로운 작품을 제작해 서 개봉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결국 투자를 제대로 유치하지 못한 이유가 가장 컸다.
그런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박태혁은 작품에 대한 투 자 유치가 무척 어렵다는 사실을 절 실히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7 대 3이 아니라 8 대 2로 수익을 배분한다는 제작사에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빅박스 측의 투 자 제안을 받아들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건 박태혁만의 문제가 아 니었다.
다른 영화 제작자들도 비슷한 문제 를 겪고 있었다.
점점 더 투자를 받는 것이 어려워 지면서 영화 제작자들은 경제적으 로,또 심리적으로 쫓기게 됐고, 메 이저 투자 배급사들은 이 부분을 놓 치지 않고 이용했다.
기존에 7 대 3이었던 투자사와 제 작사의 수익 배분 비율을 8 대 2, 심지어 9 대 1로 변경한 것이었다.
“박 대표님.”
“말해.”
“아직 시간이 조금 있습니다. 백기 원 팀장이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까 지 보름 정도 기다려 주기로 했거든 요.”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어?”
“ 9”
“보름 동안 딱히 달라질 것도 없잖 아. 그냥 빨리 투자 제안을 받아들 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박태혁의 목소리에서는 조급함이 묻어났다.
빨리 투자를 받아서 자금난을 해소 하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규한은 생각이 달랐다.
“보름이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 습니다.” “어떻게 달라진다는 거야?”
“다른 투자사를 찾을 수도 있습니 다.”
이규한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우선 그동안 자신이 쌓아 온 흥행 작이라는 성과들과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라는 원작의 힘을 믿었다.
또,빅박스의 백기원 팀장이 먼저 투자 제안을 했다는 것도 믿는 구석 이었다.
빅박스가 먼저 움직였다는 것을 알 게 되면,다른 투자 배급사에서도 조바심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었 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의 권지영 투 자팀장과 NEXT 엔터테인먼트 김태 훈 팀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규한 이 판단했을 때였다.
“이미 투자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 힌 빅박스가 있는데 굳이 다른 투자 배급사를 찾을 필요가 있어?”
박태혁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 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이규한이 재차 부탁하자,박태혁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의 표정은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불안하네.’
그 순간,이규한의 마음속에 정체 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깃들었다.
“아직이야?”
이규한의 재촉을 받은 이규리가 대 답했다.
“거의 다 됐어.”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이규 리를 바라보던 이규한이 한숨을 내 쉬었다.
“그냥 사서 가자니까.”
“그건 안 되지. 정성이 중요하거
드 ”
“몰랐는데 내조의 여왕이 가까운 데 있었네.”
“이 정도는 해야지. 다 됐다.”
수십 인분의 도시락 준비를 마친 이규리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극정성이네.”
미리 텐트했던 SUV 뒷좌석과 트 렁크에 도시락을 옮겨 실은 후,이 규한이 운전석에 앉았다.
“출발한다.”
“촬영장까지는 얼마나 걸려?” 이규한이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 키자,조수석에 앉은 이규리가 물었 다.
“두 시간 정도.”
‘나를 사랑한 아저씨’의 촬영이 진 행되고 있는 지방까지 걸리는 시간 에 대해 알려 준 후,이규한이 물었 다.
“요새 매출은 어때?”
“개업 초기보다는 매출이 많이 늘 었어.”
“다행이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덕을 좀 봤 지. 배우들이 자주 찾아온다는 입소 문이 퍼지면서 손님들이 부쩍 늘었 거든.”
이규리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미 소를 지었다.
커피 전문점 블루문 개업 초기,이 규리는 흥보에 대해서 고민했었다.
이규리가 전단지라도 제작해서 돌 릴까 여부에 대해서 고민할 때,이 규한이 만류했었다. 그 이유는 블루 문 엔터테인먼트와 작업하는 배우들 이 찾아가면 자연스레 흥보가 될 거 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규한의 의도는 적중했다.
송강오,전혜수,김수한,차태훈 등 등.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했던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들은 물론이 고,미팅을 하거나 인사차 들르는 배우들까지 커피 전문점 블루문을 방문하면서 자연스레 배우들이 많이 찾아오는 커피 전문점이란 입소문이 퍼진 것이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