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개봉 타이밍이요?”
“경쟁작이 없을 때 개봉하면 더 홍 행할 수 있어. 비록 성수기가 아닌 비수기라고 해도 틈새시장을 노리려 는 거지.”
이규한이 빨리 촬영에 돌입하라고 지시한 이유.
개봉 시기는 흥행에 큰 영향을 미 칠 수 있는 요인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촬영과 편집까지 미리 마쳐 둔 후에,개봉 예정작들의 눈치를 보면서 최고의 개봉 시기를 선택하 기 위함이었다.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최호인이 납득한 표정으로 대답하 자,이규한이 말했다.
“일단 촬영에만 집중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대표님만 믿겠습니다.”
“최 감독.”
“네.”
“오늘은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도
돼. 가족 행사니까.”
“알겠습니다,형님.”
이규한이 최호인과 대화를 마쳤을 때,이규리가 어머니의 생신 선물을 꺼냈다.
“엄마,생신 축하해요.”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래서 비싼 건 못 샀어. 화장품 이야. 우리 엄마 빨리 늙지 말라고.”
“고맙다.”
이규리에 이어서 이규한이 생신 선 물을 건넸다.
“이거 받으세요. 상품권입니다.”
“상품권?” “백화점 상품권입니다.”
어머니는 이규한이 준비한 선물에 만족한 기색이었다. 그렇지만 아버 지는 달랐다.
“얼마나 넣었는지 확인해 봐.”
“나중에 집에 가서 확인해 볼게 요.”
“그러지 말고 지금 확인해 봐. 궁 금하잖아.”
아버지의 성화를 이기지 못한 어머 니가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때까지 참지 못하고 기 어이 봉투를 빼앗아 상품권의 액수 를 직접 확인했다.
“적당히 넣었네. 그런데 그냥 현금 으로 넣었으면 더 좋았을걸.”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이규한이 실 소를 머금었다.
이규한이 준비한 선물이 백화점 상 품권이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아버 지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셨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용돈을 받아 내시려고 하신 거야.’
그렇지만 이규한은 이미 그런 상황 을 예상했다. 그래서 어머니 생신 선물을 현금이 아닌 백화점 상품권 으로 준비한 것이었고.
‘용돈 좀 드려야겠네.’ 예전과 지금은 달랐다.
이규한은 부모님께 넉넉하게 용돈 을 드릴 여유가 있었다.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에 이규한이 자책하고 있을 때,아버지가 다시 입을 뗐다.
“이게 다냐?”
“네?”
“준비한 선물이 이게 전부냐고?”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어머니가 팔 을 쳤다.
“이걸로도 넘치는구만. 주책맞게 왜 자꾸 그래요?”
“왜긴, 선물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지. 네 엄마와 내가 원하는 진 짜 선물이 뭔지 몰라?”
“…모르겠습니다.”
이규한이 대답하자,아버지가 한심 하다는 둣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차셨 다.
“일전에 알려 줬는데 기억 안 나?”
" ‘……?"
“이렇게 머리가 나쁜데 영화는 어 떻게 만들어?”
진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규한이 두 눈을 낌벅이고 있을 때, 아버지가 덧붙였다.
“새 식구 데려오라고 했잖아.” 지나간 아버지의 생신 때 식사 자 리에서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셨 다. 그렇지만 워낙 경황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설령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 해도 달 라질 것은 없었다.
이규한은 오늘 식사 자리에 함께 데려올 사람이 없었으니까.
“이제 자리도 어느 정도 잡았으니 결혼해.”
“아직은… 너무 이릅니다.”
“이르긴 뭘 일러? 네 나이가 얼만 데.” 아버지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타박 하셨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 있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 지만,영화 제작자의 삶은 불확실했 다.
언제 실패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실패한 영화 제작자가 가정 을 꾸리면 얼마나 불행해지는지 이 미 경험해 보았기에 이규한은 자신 이 없는 것이었다.
그때 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종업원이 들어왔 다.
“손님이 한 분 더 오셨습니다.”
‘누구지?’
이규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때 였다.
“안녕하세요?”
손님이 룸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남지유?’
그 손님의 정체를 확인한 이규한이 깜짝 놀랐다. 그녀가 예고도 없이 이곳을 찾아올 거라고는 꿈에도 예 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 직 놀랄 일은 끝이 아니었다.
“대표님,저도 왔어요.”
“저도요.”
“어머님,생신 축하드립니다.”
남지유에 이어서 박보연과 전혜수, 그리고 ‘우주 걸스’의 멤버인 제아 까지 차례로 룸 안으로 들어섰다.
“여긴 어떻게……?”
당황한 이규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며 물었다.
“경국지색 모임을 로터스 호텔에서
하는 날이랍니다. 그런데 지유가 오 늘 로터스 호텔에서 이 대표님 어머 님 생신 파티를 한다고 알려 줬어 요. 그래서 인사를 드릴 겸해서 찾 아왔죠.”
전혜수가 대표로 대답한 순간,이 규한이 남지유를 보며 물었다.
“지유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요?”
그 질문에 답한 것은 남지유가 아 니었다.
최호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제가 알려 줬습니다.”
“지유 씨가 오늘 촬영을 쉬는 이유 가 뭔지 물어봐서 제가 어머님 생신 때문이라고 알려 줬습니다.”
‘그랬구나.’
비로소 상황을 파악한 이규한이 엉 거주춤하게 서 있을 때였다.
“이리 앉아요. 빈자리 많으니까.” 아버지가 자리를 권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우리가 인심이 그리 박하지 않아 요. 그리고 생일상은 사람들이 북적 이는 편이 더 좋고.”
“감사합니다.”
네 여인들이 합석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아버 지가 다시 입을 뗐다.
“이제야 아들 녀석이 영화 일을 하 는 게 실감이 나는구만.”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리가 물었 다.
“아빠도 알아요?”
“당연히 알지.”
“정말요? 그럼 이름도 알아요?”
“전혜수, 박보연, 남지유, 그리 고 ”
“그리고요?”
“우주 걸스 제아,맞지?”
“헐,대박.”
이규리는 깜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아셨지?’
그리고 놀란 것은 이규한도 마찬가 지였다.
그때,제아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아버님이 아드님보다 낫네요.”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이규한 대표님은 제가 누군지도 몰랐거든요.”
“그랬어?”
“우주 걸스도 몰랐답니다.”
제아가 고자질하듯 하소연하자,아 버지가 껄껄 웃으며 덧붙였다.
“어떻게 우주 걸스를 모를 수가 있 어?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 는데 무슨 영화를 만든다고.”
만약 다른 사람이 비난했다면?
이규한은 참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말씀이었기에 이 규한은 그냥 쓰게 웃고 말았다.
‘좋네.’
잠시 후,이규한이 속으로 생각했 다.
했던 가족들의 오붓한 식사 자리는 떠들썩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척 즐거운 표정이셨다.
그래서 오히려 이 편이 낫다는 생 각을 이규한이 했을 때였다.
“두 분은 좋으시겠어요.”
전혜수가 웃으며 입을 뗐다.
“왜 좋다는 건가?”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으니까요.”
전혜수가 이규한을 힐끗 살핀 후 덧붙였다.
“한국 영화계에서 배우들이 가장
신뢰하고, 또 가장 함께 일하고 싶 은 제작자가 바로 아드님입니다.”
“그래?”
“정말이요?” “네,제작자로서의 실력도 뛰어나 지만,인간적으로도 무척 매력적인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배우들의 신 뢰를 얻을 수 있었죠.”
전혜수가 말을 마친 후 이규한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역시 다르네.’
그것을 확인한 이규한이 속으로 생 각했다.
경국지색 모임의 맏언니답게 전혜
수는 연륜이 있었다.
‘실력 있는 영화 제작자.’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이규한이 제 작한 영화들에 대해 알고 계셨다.
또, 그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했다 는 사실도.
그래서 이규한이 실력 있는 영화 제작자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는 알고 계셨다.
그렇지만 인지도가 있는 여배우인 전혜수의 입으로 영화 제작자 이규 한에 대해서 듣는 것은 느낌이 또 다를 터.
그리고 자식 칭찬을 싫어할 부모는
세상에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혜수가 일부러 이런 말을 꺼낸 것 이었다.
이규한이 휴대 전화를 식탁 아래로 내린 후 메시지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제가 없는 말 한 것도 아닌데요, 뭘.
-그래도 감사합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이규한 대 표님 덕분에 다시 행복해질 수 있었 으니까요. 그나저나 밥값은 한 건가 -충분히 하셨습니다.
-그럼 많이 먹을 거예요.
-마음껏 드셔도 됩니다.
메시지로 짤막한 대화를 나눈 후, 이규한이 전혜수와 의미심장한 눈빛 을 교환했다.
잠시 후,전혜수가 말했다.
“너희도 밥값 해야지.”
그 이야기를 들은 남지유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도라니요? 그럼 언니는 밥값 을 하셨다는 말씀이세요?”
“언제요?”
“조금 전에.”
전후사정을 모르는 남지유가 고개 를 갸웃할 때,전혜수가 덧붙였다. “난 미모가 되잖아.”
“네?”
“이 자리에 참석해서 자리를 빛낸 것만으로도 이미 밥값을 한 셈이지. 아버님,제 말이 맞죠?”
“암,그렇고말고.”
‘아버지도 참.,
평소의 근엄함은 잃어버리고 아까
부터 허허 웃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 보던 이규한이 쓴웃음을 입가에 머 금었다.
잠시 후,이규한이 전혜수를 바라 보며 두 눈을 빛냈다.
‘암살자,보이지 않는 총구’에 출연 하기 전과 후의 전혜수의 모습은 바 뀌어 있었다.
웃음이 더 많아졌고, 자신감도 되 찾았다.
그 모습이 무척 보기 좋다는 생각 을 하고 있을 때,남지유가 벌떡 일 어났다.
“왜 일어나?” “저도 밥값 해야죠.”
다짜고짜 룸을 나갔던 남지유는 얼 마 지나지 않아 통기타를 들고 돌아 왔다.
“노래하려고?”
“미모가 안 되니 밥값 하려면 노래 라도 해야죠.”
남지유가 통기타를 꺼내며 말했다.
“그럼 밥값 시작하겠습니다.”
팅. 팅. 티잉.
잔잔한 통기타 선율과 함께 남지유 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랑을 받기 위해서 이 세상으로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는 노래 가 사에 귀를 기울이던 이규한이 고개 를 돌렸다.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중 한 명인 남지유가 직접 불러 주는 노래에 귀 를 기울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무척 행복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 다.
“잘 모셔다 드려.”
이규한이 부모님을 배웅하며 부탁 하자,최호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안전하게 모셔 드 리겠습니다.”
그때,어머니가 아쉬운 기색으로 입을 뗐다.
“같이 집에 가면 좋을 텐데.”
“죄송해요. 선약이 있어서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아들, 오늘 고마웠어.”
“네,푹 주무세요.”
최호인이 운전하는 승용차가 출발 했다.
이규한이 멀어져 가는 차량을 바라 보다가 몸을 돌렸다.
마침 로터스 호텔을 빠져나오는 남 지유를 발견한 이규한이 다가갔다. “지유 씨,오늘 고마웠어요.”
“에이,밥값 한 게 다인데요,뭘.”
남지유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고개를 흔들었 다.
남지유는 프로 가수.
그녀가 어머니를 위해서 기꺼이 노 래를 불러 준 것이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그래서 이규한이 말하자,남지유가 두 눈을 빛냈다.
“그럼 술 한잔 사 주세요.”
“알겠습니다.”
“오늘이요.”
“네?”
이규한이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술을 사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 만,선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요? 바쁘세요?”
“오늘은 선약이 있습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