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구조 요청 (1)
쿵.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 틀거리던 박태혁이 가로수에 어깨를 부딪치고 바닥에 쓰러졌다.
“대표님,괜찮으세요?”
하태열이 재빨리 다가가 부축했다. 혼자서는 힘들 거란 생각이 들어서 이규한이 합류해서 박태혁의 오른팔
을 잡았을 때였다.
“이 대표,아니,규한아.”
“왜요?”
“못난 형 좀 살려 줘라.”
“못났고,조잔하고,치사한 형이란 거 알지만,그래도 좀 도와줘라. 내 가… 이 박태혁이가 지금 기댈 데가 너밖에 없다.”
덥석.
박태혁이 이규한의 손을 움켜쥐었 다.
잠시 후,박태혁을 택시에 태우는 하태열에게 이규한이 말했다.
“잘 부탁해요.”
“그래,연락할게.”
부우옹.
배기음과 함께 출발하는 택시를 이 규한이 바라보고 있을 때,김미주가 곁으로 다가왔다.
“어쩌실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
“마음 같아서는 확 망하게 내버려 뒀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좀 안됐긴 하네요.”
“그래서 미운 정이 무섭다는 거
이규한이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입 을 뗐다.
“내가 어떻게 램프 엔터테인먼트에 서 근무하게 됐는 줄 알아?”
“이력서 내고 면접 봐서 합격했던 것 아닌가요?”
“이력서 냈으면 서류에서 떨어졌을 걸.”
“왜요?”
“줄줄이 망한 영화에만 참여한 피 디 겸 제작자를 누가 채용하고 싶겠 어?”
덧붙였다.
“무작정 램프 엔터테인먼트를 찾아 갔어. 램프 엔터테인먼트의 박태혁 대표가 영화판을 잘 모른다는 이야 길 들었거든. 이 사람은 나에 대해 잘 모르겠구나. 이렇게 판단했던 거 지. 그리고 박태혁 대표를 찾아가서 살려 달라고 부탁했어.”
“그래서 램프 엔터테인먼트에 입사 했던 거였어요?”
“응.”
“사기를 친 거네요. 그리고 박태혁 대표는 그때도 사기를 당했으니 순 진했네요.”
“사기를 당한 게 아니야.” “그럼요?”
“이미 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모른 척하고 받아 줬던 거 였어.”
“왜 다 알면서도 대표님을 받아 줬 던 건데요?”
“무서웠다고 하더라.”
" ‘……?"
“내가 진짜 죽을까 봐.”
이규한이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다시 말했다.
“그래서 살려 주려고. 그냥 모른 척 외면하면 박태혁 대표가 극단적 인 선택을 내릴까 봐 무서워졌거
드 ”
“설마요. 소심해서 죽을 용기도 없 을걸요?”
“이거 봐.”
이규한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 김 미주의 앞으로 내밀었다.
“멍들었네요.”
“응,아까 박태혁 대표가 내 손을 잡았을 때 든 멍이야. 그만큼 절박 하단 거지.”
손등의 멍을 바라보며 이규한이 덧 붙였다.
“소심하긴 하지만 자존심이 센 양 반이야. 그 자존심을 다 내던지고 내게 구조 요청을 보냈는데,차마 외면할 수가 없네.”
“대표님은 마음이 너무 약해요.”
“그게 내 유일한 약점이지?”
“그 약점 때문에 내가 대표님을 좋 아하죠.”
진지한 얼굴로 대답한 김미주가 물 었다.
“그런데 어떻게 살려 줄 건데요?” 다음 날 아침.
이규한이 램프 엔터테인먼트 사무 실로 찾아갔다.
딩동. 딩동.
벨이 울리고 한참 후, 부스스한 얼 굴의 박태혁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규한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한 박태 혁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대표가 여기 웬일이야?”
“치료비 청구하려고요.”
“치료비? 혹시… 내가 어제 때렸 어?”
“기억 안 나세요?”
“그게… 너무 급하게 마셔서 필름 이 끊겼어.” 머리를 긁적이던 박태혁이 이규한 의 얼굴을 유심히 살핀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얼굴은 안 때렸나 보네.”
“고맙게도요.”
“그럼 내가 어딜 때렸어?”
“여기요.”
이규한이 멍든 손등을 앞으로 내밀 었다.
“겨우 멍든 것 때문에 여기까지 찾 아왔어?”
박태혁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순간, 이규한이 대답했다.
“형한테 배웠습니다.” “뭘 나한테 배워?”
“절대 손해는 보면 안 된다. 형이 저한테 이렇게 가르치셨잖아요.”
이규한의 대답을 듣고 픽 웃던 박 태혁이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왜 박 대표가 아니라 형이 라고 부르는 거야?”
“그래서 싫어요?”
“꼭 싫다기보단……
“어차피 램프 엔터테인먼트 곧 망 할 거라서 대표님이란 호칭 대신 형 이라고 불렀어요.”
이규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태 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꼭 그렇게 아픈 데를 쿡쿡 찔러야 겠냐?”
“없는 말을 한 건 아니잖아요.”
“나쁜 놈.”
박태혁이 인상을 와락 구기자,이 규한이 말했다.
“밥 사 주시죠.”
“날더러 밥을 사라고?”
“치료비요.”
이규한이 다시 멍든 손등을 앞으로 내밀자,박태혁이 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부자가 더 무섭단 말이 사실이 네.” “야,고작 해장국 먹으러 가는데 이렇게 멀리 오는 법이 어딨어? 택 시비가 밥값보다 더 나오겠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박태혁이 불 만을 토해 냈다.
“택시비 제가 냈잖아요.”
“그렇긴 해도……
“해장국 기가 막히게 하는 집이 있 다니까요.”
박태혁과 더 실랑이를 벌이는 대 신,이규한이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 잠시 후,해장국 한 그릇씩을 먹고 나온 박태혁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 었다.
“유명한 집이라 맛있긴 하네.”
“이제 커피 마시러 가죠.”
“커피는… 네가 사는 거지?”
“제가 삽니다.”
“빨리 가자. 입이 텁텁해 죽겠다.” 이규한이 다시 앞장서서 걸음을 옮 겼다. 그리고 커피 전문점 불루문 앞에 도착한 순간,박태혁이 걸음을 멈추었다.
“커피 전문점 이름이… 블루문?” 간판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박태 혁에게 이규한이 말했다.
“여기 커피 맛이 괜찮아요.”
“커피 맛이야 다 거기서 거기지. 그런데 왜 가게 이름이 블루문이야? 혹시 이 대표,돈 벌어서 커피 전문 점 연 거야?”
박태혁이 부러운 시선을 던지며 물 었다.
그런 그에게 이규한이 말했다.
“이 층을 보세요.”
“이 층?”
시키는 대로 고개를 들었던 박태혁 대표가 잠시 후 눈을 크게 떴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의 간판을 보 았기 때문이었다.
“이 대표,사무실 옮겼어?”
“네,얼마 전에요.”
“왜 나한테 소식 안 알렸어?”
“깜박했어요.”
“깜박할 게 따로 있지.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내게 알렸어야지.”
박태혁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방금 깜박하고 박태혁에 게 사무실 이전 소식을 알리지 못했 다고 했던 이규한의 대답은 거짓말 이었다.
구입해서 사무실을 이전한 소식을 알리지 않은 진짜 이유.
박태혁을 위해서였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 게 사람 심리.
박태혁은 원래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배 아파하고 부러워하는 편이 었다.
그런데 램프 엔터테인먼트를 퇴사 하고 독립했던 이규한이 번듯한 건 물을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면?
박태혁은 배가 너무 아파서 한동안 잠도 못 자며 건강을 해칠 수도 있 다고 판단했던 것이었다.
그때,박태혁이 두 눈을 빛내며 말 했다.
“빅스빅 픽처스 사무실도 여기 있 네?”
뒤늦게 빅스빅 픽처스의 간판을 발 견한 박태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빅스빅 픽처스를 아세요?”
“장준경 대표가 운영하는 제작사잖 아.”
“제가 여기로 오라고 제안했어요.”
“왜?”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와 빅스빅 픽 처스가 공동 제작을 하는 작품이 있 거든요. 가까이 있는 편이 공동 제
작을 하기 더 편할 것 같아서요.”
이규한의 대답을 들은 박태혁이 흥 미를 드러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와 빅스빅 픽 처스가 공동 제작하는 작품 제목이 뭔데?”
“‘베테랑들’이란 작품입니다.”
“얼마나 진행됐어?”
“NEXT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받 았고,올 겨울 개봉을 목표로 진행 중입니다.”
“큰 산은 다 넘었네.”
박태혁이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장준경 대표도 그동안 어지간히 일이 안 풀리더니 드디어 빛을 보는 건가? 여기가 터가 좋나?”
마치 지관처럼 주변을 살피는 박태 혁에게 이규한이 제안했다.
“램프 엔터테인먼트도 여기로 사무 실 옮기세요. 비어 있는 사무실이 꽤 있거든요.”
“사무실을 이전하라고? 여기 임대 료가 얼마나 하는데?”
“공짜입니다.”
“방금 뭐라고 했어?”
“공짜라고 했습니다.”
이규한이 재차 확인해 주었지만, 박태혁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 “어떻게 임대료가 공짜일 수 있어? 그 정신 나간 건물주가 대체 누군 데?”
이규한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신 나간 건물주,접니다.” ‘커피 맛있네.’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신 이규한 이 박태혁의 앞에 놓인 잔을 힐끗 살폈다.
전혀 줄어들지 않는 커피를 확인한
이규한이 물었다.
“왜 안 드세요?”
“그게……
“배 아프세요?”
“응?”
“제가 건물주가 된 걸 알고 나니 배 아프신 것 아닙니까?”
정곡을 찔린 박태혁이 멋쩍게 웃으 며 대답했다.
“갑자기 배가 좀 아프긴 하네.”
그런 그에게 이규한이 충고했다.
“좋게 생각하세요. 제가 성공해서 건물주가 된 덕분에 사무실 공짜로 쓸 수 있게 됐으니까요.”
“그렇긴 한데… 이 대표에게 하나 궁금한 게 있어.”
“뭐가 궁금하신데요?”
잠시 망설이던 박태혁이 물었다.
“내가 알립지 않아?”
“조금 얄미운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줘?”
박태혁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잘못한 건 알고 있네.’
속으로 생각하며 픽 웃은 이규한이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 이 대표에게 하나 궁금한 게 있어.”
“뭐가 궁금하신데요?”
잠시 망설이던 박태혁이 물었다.
“내가 얄립지 않아?”
“조금 알미운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줘?”
박태혁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잘못한 건 알고 있네.’
속으로 생각하며 픽 웃은 이규한이 대답했다.
뭐라 그랬어?”
“판권료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게 ‘은밀하면서 위 대하게’의 판권을 팔겠다는 뜻이 지?”
“그렇습니다.”
박태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 다.
구명줄이 내려왔다고 판단했기 때 문이리라.
“어제는 판권 안 판다고 했잖아?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
“살려 달라고 부탁하셔서요. 그래 서 살려 드리려는 겁니다.”
“이 대표,아니 규한아. 고맙다. 고 마워.”
박태혁이 덥석 이규한의 손을 움켜 잡으려 했다.
슬그머니 손을 뒤로 빼며 이규한이 입을 뗐다.
“제게 감사 인사를 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 ……?"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의 판권을 넘기는 대신 조건이 있으니까요.”
“어떤 조건?”
이규한이 대답했다.
을 하셔야 합니다.”
“공동 제작을 하자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제안이기 때문 일까.
박태혁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규한이 판권을 넘긴 대가로 내건 조건이 본인에게 유리한 건지 불리 한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해서 박태혁 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박태혁이 질문을 던졌다.
“왜 공동 제작을 하자는 거야?”
“걱정이 돼서요.”
“내가 걱정이 돼서 도와주려는 거 야?”
“박 대표님이 아니라 ‘은밀하면서 도 위대하게’라는 작품이 걱정이 되 는 겁니다.”
이규한이 정정하자,박태혁이 다시 물었다.
“왜 작품이 걱정이 된다는 거야?”
“이대로 돈만 받고 램프 엔터테인 먼트에 판권을 넘기면,제대로 영화 로 만들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었거든요.”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