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예전의 박 작가가 아니다 (1) 김미주가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다른 판매처가 있었던 것 아니었 어요?”
“어떻게 알았어?”
“배짱을 부리는 걸 보고 눈치겠
죠
“우리 미주 씨,역시 눈치가 빨라.” “말 돌리지 말고 빨리 얘기해 보세
“오천만 원.”
" ? ”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의 판권을 구입하려는 다른 제작사는 판권 가 격으로 오천만 원을 불렀거든.”
쉽게 말해 ‘은밀하면서도 위대하 게’의 판권을 일억 원에 구입하겠다 는 백기원 팀장의 제안을 거절한 탓 에, 앉은 자리에서 오천만 원을 손 해 본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김미주가 황당하 단 시선을 던졌다.
“왜 그랬어요?”
“음,그냥.”
“그냥… 이요?”
“굳이 이유를 꼽자면 일단 빅박스 백기원 팀장이 마음에 안 들었어. 그 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정 때문이야.” “정… 이요?”
“그래,내가 정에 약한 편이잖아.”
“그거 자랑 아니거든요.”
답답한 표정을 짓던 김미주가 물었 다.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의 판권을 구입하려는 다른 제작사가 어딘데 “미주 씨도 잘 아는 곳이야.’
이규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램프 엔터테인먼트.”
하태열 피디에게서 오래간만에 걸 려 왔던 전화.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해서 전화한 게 아니었다.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의 판권을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헐.”
판권을 구입하려는 다른 제작사가 바로 램프 엔터테인먼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 김미주는 놀란 기색을 드러 냈다.
“박태혁 대표치고는 엄청 많이 불 렸네요.”
이미 박태혁 대표가 짠돌이란 사실 을 잘 알고 있는 김미주였기에 이런 평가를 내놓은 것이었다.
“그렇지?”
“왜 이렇게 많이 불렀을까요?”
“작품이 좋으니까.”
박태혁 대표만이 아니었다.
빅박스 투자팀장인 백기원 역시 업 계에서 관돌이로 유명했다.
그가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의 판권을 구입하기 위해서 일억 원을 제안한 것.
작품이 그만큼 매력적이고,영화로 제작해서 개봉했을 때 흥행할 가능 성이 높다고 점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까 정 때문에 손해를 감 수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랬지.”
“박태혁 대표와 아직 남은 정이 있 어요?”
“미운 정도 정이니까.”
이규한이 대답하자,김미주가 또 한 번 엄지를 추켜세웠다.
“대표님은 세상 따뜻한 남자네요.”
“칭찬이지?”
“알아서 해석하세요.” 이규한이 픽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 다.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냐.’
백기원 팀장이 판권료로 일억을 제 시한 것을 거절하고,램프 엔터테인 먼트 측에 판권을 넘기려는 진짜 이 유는 따로 있었다.
빅박스의 속셈이 훤히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으로 제작에 뛰어들려는 거 야.’
씨제스 엔터테인먼트가 자회사 개 념인 사거리 픽처스를 통해서 눈속 임을 하면서 영화 제작에 뛰어든 것 처럼 빅박스도 비슷한 방식으로 영 화 제작에 뛰어들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규한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투자와 배급.
두 가지 권한을 손에 쥔 것만으로 도 이미 공룡이 된 메이저 투자 배 급사들이 었다.
그런 그들이 제작까지 뛰어든다면?
중소 규모의 영화 제작사들은 더 이상 설 곳이 없어지게 될 터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대기업이 분식집 사업까지 뛰어든 셈이나 마찬가지였
이규한도 영화 제작사 대표. 그것만큼은 꼭 막고 싶었다.
“백 피디는 왜 아무 말이 없어?” 잠시 후,이규한이 백진엽에게 물 었다.
“지금 제 머릿속에는 ‘부산행 열 차’밖에 없거든요.”
그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쓰게 웃 었다.
“그래서 물었던 거야.”
“네?”
“아까 백기원 팀장과 미팅을 하는 과정에서 ‘부산행 열차’의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떠올랐거
드 ”
이규한이 말했지만,백진엽은 불신 어린 시선을 던졌다.
“반대 아닙니까?”
“무슨 뜻이야?”
“빅박스를 적으로 돌렸잖습니까? 그러니 ‘부산행 열차’의 투자를 받 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줄었잖습니 까?”
‘부산행 열차’는 제작비 규모가 큰 작품.
결국 메이저 투자 배급사들 가운데 한 곳에서 투자를 받아야만 제작이
가능했다.
그런데 네 곳의 메이저 투자 배급 사들 가운데 한 곳인 빅박스를 방금 적으로 돌렸으니, ‘부산행 열차’의 제작 확률이 더 줄어든 것 아니냐?
방금 백진엽이 한 말에 담긴 의미 였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분석.
그렇지만 이규한이 주목한 것은 다 른 부분이었다.
“순서를 바꾸자.”
“무슨 순서를 어떻게 바꾸자는 겁 니까?”
“‘부산행 열차’의 시나리오 책을 투자 배급사에 넣었지만,지금까지 는 모두 투자에 난색을 드러냈어.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거야… 재미가 없어서겠죠.”
백진엽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 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단호하게 고개 를 흔들었다.
“재미는 있어.”
“재밌는데 왜 투자가 안 되는 걸까 “확신이 없어서야.”
? 그
“충무로에서 금기시되고 있는 좀비 물이 과연 먹힐까? 이 부분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보수적인 투자 배급 사에서 투자를 꺼리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메이저 투자 배급사 투자팀장들 불러 모아 놓고 프리젠테이션이라도 한번 할까 요?”
“프레젠테이션 해서 설득할 자신은 있고?”
“당연히… 쉽지는 않겠죠.”
“일단 메이저 투자 배급사 투자팀 장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것부 터 불가능할걸.”
이규한이 지적하자,백진엽이 한숨 을 내쉬었다.
“그럼 결국 방법이 없는 것 아닙니 까?”
“아니,방법은 있어.”
“어떤 방법이요?”
“그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을 공략하면 돼.”
“그게 뭔데요?”
이규한이 대답했다.
“대중들의 반응.”
“‘부산행 열차’를 먼저 웹툰으로 만들자.”
이규한의 제안을 들은 백진엽이 이 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아까 내가 순서를 바꾸자고 말했 잖아?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 케 이스로 가는 게 더 빠를 거란 생각 이 들었어.”
“그러니까 왜요?”
“시대가 많이 바뀌었거든.”
이규한이 설명을 더했다.
“만약 ‘부산행 열차’를 웹툰으로 만들어서 연재했을 때,인기를 얻으 면 판권을 구입하기 위해서 제작사 가 나설 거고,투자사도 움직이게 될 거야. 아까도 말했둣이 투자 배 급사는 대중들의 반응에 민감할 수
밖에 없거든.”
“상구가 연재하는 ‘은밀하면서도 위대하게’처럼요?”
“그래,박상구 작가가 연재하는 웹 툰 작품이 영화로 제작될 거라고 예 상했었어?”
“아니요,그래서 ‘은밀하면서도 위 대하게’를 포함해 여러 웹툰 작품들 의 판권을 구입하던 대표님을 제정 신이 아니라고 판단했었죠.”
백진엽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웃 으며 물었다.
“그런데 왜 안 말렸어?”
“어차피 내 돈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생계에 어려움을 겪던,친 하게 지내던 작가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으니까요.”
“결과적으로는 내가 옳았지.”
“그렇긴 하네요.”
“그러니까 날 믿고 ‘부산행 열차’ 도 웹툰으로 먼저 만들자.”
잠시 고민하던 백진엽이 질문했다.
“만약 웹툰으로 만들었는데 인기가 없으면요?”
“분명히 인기가 있을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작품은 재밌다니까.”
“하지만…… “그리고 연재해서 실패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하나 더 만들어 뒀어.”
“무슨 안전장치요?”
“이미 검중을 마친 인기 작가에게 ‘부산행 열차’의 웹툰 연재를 맡길 거야.”
“인기 작가 누구요?”
“박상구 작가.”
이규한이 대답하자,백진엽이 못 미덤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구요?”
“박상구 작가 요새 잘나가.”
“그래도…… “예전이랑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 어. 세상이 바뀌었거든.”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백진엽에게 이규한이 충고했다.
“제발 ‘부산행 열차’를 맡아서 연 재해 달라고 사정해도 될까 말까일 걸?” 연희동에 위치한 중화요리점.
“여깁니다.”
박상구 작가가 앞장서서 안내한 식 당 앞에 도착한 순간,백진엽이 못
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와서 또 중국집이냐?”
“중국집이 아니라 중화요리점입니 다.”
“그게 그거잖아.”
“일단 들어가시죠.”
중화요리점 안으로 들어가서 박상 구 작가가 미리 예약했던 탁자에 앉 자마자 백진엽이 본론을 꺼냈다.
“나랑 일 하나 하자.”
너무 서두른다는 생각에 이규한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제 지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무슨 일이요?” “내 작품으로 웹툰 만들어서 연재 하자.”
“형,작품이요?”
“그래,‘부산행 열차’ 알지?”
“‘부산행 열차’요?”
박상구 작가가 고개를 갸웃하자, 백진엽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서 둘러 정정했다.
“제목이 바뀌어서 모르겠네. ‘인천 행 버스’는 알지?”
“그건 알죠. 그런데 ‘인천행 버스’ 를 저더러 그려서 연재하라고요?”
“‘인천행 버스’가 아니라 ‘부산행 열차’로 제목이 바뀌었다니까.” “호박에 줄 그어 봐야 수박 안 되
죠
“뭐라고?”
“형의 제안은 정중하게 거절하겠습 니다.”
박상구 작가가 거절 의사를 내비치 자, 백진엽이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 다.
“야,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제가 뭘요?”
“내 덕분에 ‘은밀하면서도 위대하 게’ 판권 팔 수 있었던 거잖아.”
“그건 인정합니다. 그래서 밥 사지
않습니까?”
“겨우 짜장면에 탕수육?”
“겨우가 아닙니다. 이 중화요리점 이염복 셰프가 운영하는 곳입니다.” “이염복 셰프가 누군데?”
“헐,이염복 셰프도 모르세요?”
박상구 작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 들 때, 주문했던 탕수육이 먼저 나 왔다.
“일단 드셔 보시죠.”
“탕수육이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 지.”
와사삭.
젓가락으로 탕수육 한 점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서 씹던 백진엽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규한도 탕수육을 한 점 입으로 가져간 후,놀란 표정을 지었다.
‘괜히 이염복 셰프가 아니구나.’
이염복은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출 연 중인 인기 중식 셰프였다. 그리 고 탕수육 한 점을 맛본 후 이규한 은 그의 명성이 괜히 대단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허명이 아니었다.
대가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 로 탕수육 맛은 기가 막혔다.
“어때요? 거기서 거기가 아니죠?” 그때,박상구 작가가 물었다.
“맛있긴 하네.”
마지못한 표정으로 인정한 백진엽 이 퉁명스레 덧붙였다.
“그래도 고작 밥 한 끼로 때우려는 건……
“고작 밥 한 끼가 아닙니다. 여기 예약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거든요. 제가 이염복 셰프님과 인연이 있어 서 간신히 예약할 수 있었습니다.”
“네가 이염복 셰프랑 어떻게 인연 이 있어?”
“저도 나름 유명인이거든요.”
“유명인은 개뿔.” “못 믿으시나 본데 직접 보시죠.”
“갑자기 뭘 보란 거야?”
박상구 작가가 손으로 가게 내부 벽 쪽을 가리켰다.
“저거 제 사인입니다.”
이염복 셰프의 캐리커처와 함께 박 상구 작가의 사인이 적혀 있는 액자 가 벽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한 백진엽이 놀라서 입을 쩍 벌 렸다.
그 순간 이규한이 말했다.
“이제 예전의 박 작가님이 아니란 내 말이 실감 나?”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