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오디션 심사 위원 (1) “앞으로도 쭉 성공하길 빌게.”
“결혼 생활,행복하길 빈다.”
서로에게 덕담을 나누면서 송아현 과 웃으며 헤어졌다. 그렇지만 이규 한은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느낌이었 다.
송아현과 함께했던 시간.
결코 짧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좋았던 시간보다 안 좋았던 시간이 훨씬 더 길었지만,그것 역시 추억 이라 부를 수 있는 기억이었다.
그런데 송아현이 다른 사람과 결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그 추 억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 다.
“서로를 위해서… 이게 최선이야.”
소주잔을 비운 이규한이 혼잣말을 꺼냈다.
쪼르륵.
다시 소주병을 들어 올린 이규한이 잔을 채울 때였다.
계십니까?”
선술집에 도착한 안유천이 물었다.
“왔어?”
이규한이 안유천과 김단비 작가에 게 인사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김단비가 걱정스레 물었다.
“별일 없어.”
“그런데 왜……?”
“청승맞게 혼자 술을 마시고 있냐 고? 그냥 술 생각이 난 게 다야.”
이규한이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대 답했다.
두 사람에게 굳이 이유를 밝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혹시 저희 때문입니까?”
그때,안유천이 물었다.
“무슨 뜻이야?”
“시나리오 각색이 형편없이 된 게 아닐까? 이런 걱정 때문에 혼자 술 을 드시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그 질문을 받은 이규한이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여기까지.’
슬퍼하거나 아쉬워할 시간조차도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영화 제작자 이규한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그 정도로 형편없이 나왔어?”
이규한이 마음을 다잡고 질문을 던 졌다.
“최선을 다하긴 했는데… 솔직히 자신은 없네요.”
안유천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의 아한 시선을 던졌다.
항상 자신감이 차 있던 안유천의 평소 모습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 다.
그렇지만 충분히 이해가 갔다.
안유천과 김단비 작가가 맡은 ‘우 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의 각색
워낙 어려운 프로젝트였다는 사실 을 이규한도 알고 있어서였다.
“일단 시나리오 책을 줘 봐.”
이규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유 천이 가방에서 시나리오 책을 건넸 다.
‘얼마나 달라졌을까?’
자신의 앞에 내밀어져 있는 ‘우리 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의 시나리 오 책을 향해 이규한은 바로 손을 뻗지 못했다.
기대보다 우려가 컸기 때문이었다.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규한의 눈앞 에 새로운 숫자가 떠올랐다.
-770,156.
‘늘었다.’
각색 전과 각색 후.
예상 관객수가 늘어 있었다.
그렇지만 예상 관객수가 늘어날 것 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 에 딱히 놀랍지 않았다.
이규한이 주목한 것은 예상 관객수 의 증가폭이었다.
20,857에서 770,156으로.
약 75만 명가량 예상 관객수가 늘 어나 있었다.
두 작가가 해 온 결과물의 감정을 마친 후,이규한이 새삼스러운 시선 을 던졌다.
‘괜히 업계 톱클래스 작가들이 아 니구나.’
각색을 통해서 이렇게 확 달라진 결과물을 만들어 왔다는 것이 안유 천과 김단비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이렇게 괜찮은 결 과물을 만들어 왔음에도 두 작가들 이 불안한 시선을 던지는 이유도 짐 작이 갔다.
‘수상한 여자’와 ‘변호사’.
본인들이 참여했던 천만 관객을 넘 겼던 영화들과 비교하면,‘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의 각색고가 한참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 어서였다.
“어떠세요?”
그때,안유천이 물었다.
“유천아.”
“네.”
“나한테 시나리오 각색고 건넨 지 십 분도 안 지났다. 아직 읽지도 못 했는데 어떠냐고 물으면 어떡해?”
이규한의 핀잔을 들은 안유천이 멋 쩍은 표정을 지은 채 대답했다.
“저도 알죠.”
“그런데 왜 물었어?”
“이 대표님은 시나리오 책을 딱 들 면 흥행할지 못할지 알 수 있는 특 별한 능력을 갖고 계시잖아요.”
“나쁘지 않아.”
이규한이 웃으며 대답하자,안유천 과 김단비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 괜찮습니까?”
“그래.”
이규한이 대답했지만, 안유천은 불 안한 기색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혹시… 이번에도 천만입니까?” 그 질문을 받은 이규한이 대답했 다.
“일단 목표는 백만이다.”
770,156명의 예상 관객수.
이규한에게 안도감과 불안감을 동 시에 느끼게 만들었다.
일단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 다’가 손익 분기점을 넘길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안도했 지만,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점에서 불안감을 느낀 것이었다.
“흥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남은 요소들은 제목과 캐스팅,그리고 개 봉 시기 정도다.” 이규한이 사무실에서 관객을 더 불 러 모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고 민하고 있을 때였다.
지이엉. 지이잉.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전혜수?’
전혜수에게서 걸려 온 전화임을 확 인한 이규한이 표정을 굳혔다.
‘혹시 마음이 바뀐 게 아닐까?’
‘암살자,보이지 않는 총구’라는 작 품에 출연하며 복귀하기로 했던 전 혜수의 마음이 갑자기 바뀐 게 아닐 까 하는 우려가 문득 들었기 때문이 었다.
‘혜수 씨,무슨 일로 전화하셨어 그래서 이규한이 긴장한 목소리로 입을 땐 순간,수화기 너머로 전혜 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운해요.”
다짜고짜 서운하단 말을 꺼내는 전 혜수로 인해 이규한이 당황했다.
“갑자기 왜 서운하다는 겁니까?”
“잡은 물고기라서 이제 미끼를 안 주는 건가요?”
“네?"
“공동 제작자로서 책임을 너무 방 기하시는 것 아닌가요? 경국지색 모 임 이후에 한 번도 얼굴을 안 내비 치시네요.”
전혜수가 서운한 목소리로 꺼낸 이 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쓴웃음을 지 었다.
‘암살자,보이지 않는 총구’라는 작 품의 공동 제작자로 참여하긴 했지 만,이규한의 역할은 전혜수의 캐스 팅까지 였다.
더 할 일이 없는데 굳이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규한이 나서지 않는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사공이 많으면 결국 배가 산으로 가는 법.
공동 제작의 경우,제작 과정에서 혼선이 발생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 래서 제작을 주도하는 주체가 있는 것이 필요했다.
‘김평주 대표가 주체가 되는 게 맞 아.’
이렇게 판단한 이규한은 ‘암살자, 보이지 않는 총구’의 제작 과정에서 혼선이나 잡음이 불거지는 것을 방 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더 모습을 드 러내지 않은 측면이 컸다.
그렇지만 전혜수를 탓하기는 어려 웠다.
자세한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는 전혜수 입장에서는 충분히 서운함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세심하게 신 경을 썼어야 했는데.”
그래서 이규한이 사과하자,전혜수 가 기다렸다는 둣이 말했다.
“그럼 신경 써 주세요.”
“네?”
“오늘 오디션이 있는 것,아시죠?”
“오디션… 이요?”
오디션이 열린다는 사실을 전혀 알 지 못했던 이규한이 반문하자,전혜 수가 황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색이 공동 제작자인데 그것도 몰랐어요?”
오디션이 열리는 장소는 대학로에 위치한 극단이었다.
미리 도착해 있는 전혜수에게 인사 를 건넨 후 이규한이 변명을 꺼냈 다.
“오디션이 있다는 것을 깜박했습니 다.”
구구절절 사연을 설명하는 게 귀찮 았다. 그래서 이규한이 깜박했다고 변명하자,전혜수가 쌍심지를 켰다.
구’라는 작품에 관심이 없는지를 알 려 주는 증거죠.”
“그게 아니라……
이규한이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 전혜수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대충 알아요.”
“네? 뭘 안단 말씀이십니까?”
“이 대표님이 일부러 나서지 않는 이유 말이에요. 저도 경력이 있는데 그 정도는 알고 있거든요.”
전혜수의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수가 자신을 오디션이 열리는 장소 로 호출한 이유를 파악하기 어려워 서였다.
그때,전혜수가 불쑥 한마디를 더 했다.
“보고 싶었어요.”
“제가요?”
예상치 못했던 말을 들은 이규한이 크게 당황했다.
그 반응을 살피던 전혜수의 입가로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왜 그렇게 놀라요?”
“그게……
안 되나요?”
“꼭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이혼녀라서 부담스러운 건가요?”
전혜수가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 내며 추궁했다.
그로 인해 이규한이 당혹스러워하 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였 다.
“매력 있네요.”
“네?”
“그렇다고요. 물론 제 스타일은 아 니지만.”
이규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들어가죠.”
전혜수가 시간이 다 됐으니 오디션 장으로 빨리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전혜수는 물론이고,이규한도 오늘 오디션의 심사 위원을 엉겁결에 맡 은 상황.
해서 이규한도 서둘러 오디션장 안 으로 걸음을 옮겼다.
“혜수 씨,왔어요? 이 대표도 왔 네.”
미리 도착해 있던 김태훈이 인사를 건넸다.
“자,앉아. 바로 시작할 거야.” 을 꼈다.
오늘 오디션은 ‘암살자, 보이지 않 는 총구’의 주연급 조연인 ‘미옥’ 배 역을 맡을 여배우를 뽑는 것이었다.
잠시 후,오디션이 시작됐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제대로 오디션 에 집중하지 못했다.
‘누가 좋을까?’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는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의 각색 시나리오가 나온 상황.
이제 본격적으로 캐스팅을 시작해 야 했다.
에 배우의 개런티에도 많은 예산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출연료 대비 연기력과 티켓 파워가 뛰어난 배우.
즉,가성비가 뛰어난 배우를 캐스 팅해야 하는데 적임자를 찾기 어려 웠다. 그래서 이규한의 고민이 깊어 졌을 때였다.
“18번,남지유입니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와서 이규한 이 무대 위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 고 오디션에 참가한 남지유를 발견 한 이규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유 씨가 왜 지금 나오는 겁니 까?” 전혜수가 대답했다.
“내가 오디션 정보를 알려 줬거든 요.”
“내가 단단히 착각했어. 너 같은 건 예전에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어울리지도 않는 정 때문에 널 살려 뒀던 내가 미친년이다,미친년이야. 그래서 이제라도 그때의 실수를 만 회하려고.”
남지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 며 연기를 마쳤다.
그녀의 무대 위에서 펼치는 연기를 지켜보던 이규한이 심사 위원장으로 참석한 김태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선배가 보기에는 어떤 것 같아 “곧잘 하네.”
김태훈에게서 돌아온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디션에 참가한 남지유가 무대 위 에서 펼친 연기.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잘하네.’가 아니라 ‘곧잘 하네.’라는 김태훈의 평가대로였다.
심사 위원과 대중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 실력 은 아니었다.
잠시 후, 이규한이 전혜수에게 물 “혜수 씨는 어떻게 보셨어요?”
“흥미롭게 봤어요.”
“어떤 부분이 흥미로웠습니까?”
“제가 막연하게 짐작했던 것보다는 지유가 연기를 잘하네요.”
전혜수가 칭찬한 순간,이규한이 의심쩍은 시선을 던졌다.
“혹시 비리를 저지르려는 건 아니 “비리… 라뇨?”
“공정하게 심사하지 않고 지유 씨 에게 가점을 주는 것 말입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