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억 관객 제작자-152화 (152/272)

152화

블라인드 테스트 (2) 안유천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쓰 게 웃으며 입을 뗐다.

“곧 연이 끊길 수도 있겠네.”

“네?”

“아냐,혼잣말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대충 얼버무린 이규한이 다음으로 김단비 작가를 바라보았다.

“김 작가에게는 다른 질문을 던질 게.”

“말씀하세요.”

“만약 이 작품을 각색하라고 하면 어떻게 각색 방향을 잡을 거야?”

잠시 고민하던 김단비 작가가 단호 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 할 겁니다.”

“각색을 안 한다고?”

“현재 시나리오 상의 문제가 너무 많아요. 각색으로 해결하는 데는 한 계가 있다는 판단이 드네요. 차라리 새로 쓰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 김단비 작가는 무척 신중한 편이었 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단호한 표현을 쓴 것이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 니다’의 시나리오 책이 형편없다는 증거였다.

‘더 들을 것도 없겠네.’

노트북 자판 위에 올려져 있던 손 을 땐 채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최호인을 힐끗 살핀 이규한이 내린 판단이었다.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 니다. 또 일부러 시간을 내서 기꺼 이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 다.”

이규한이 자리를 정리하며 인사를 하자 안유천이 물었다.

“그런데 누가 쓴 시나리오 책인지 알려 주시지 않는 겁니까?”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거야.”

이규한이 대답을 피하며 세 사람에 게 고마운 시선을 던졌다.

시나리오 책을 읽고 난 후 감상 평을 알려 주는 리뷰.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 겠지만,이들은 프로 감독이자 프로 작가들이었다.

이 리뷰를 하기 위해서 일부러 시 간을 내서 시나리오 책을 읽었고, 또 각자의 입장에서 문제점과 해결 방안까지 찾아왔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이 컸던 이규한 은 이들에게 근사한 식사라도 대접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규한은 식사 대접을 뒤로 미루었다.

최호인을 상대하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이 먼저 떠나고 두 사람만 남겨지자 이규한이 물었다.

“이제 인정해?”

“뭘 말입니까?”

“최 감독이 쓴 ‘우리의 복수는 범 죄가 아니다’가 해결할 과제가 무척 많은 작품이라는 사실 말이야.”

수긍하기 힘든 걸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던 최호 인이 잠시 후 입을 뗐다.

“극히 일부의 의견이라고 생각합니 다.”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 ‘?,’

“최 감독이 쓴 ‘우리의 복수는 범 죄가 아니다’의 시나리오 책을 읽고 리뷰를 해 준 양도윤 감독. 이미 여 러 편의 작품을 연출한 중견 감독이 야. 공신력 있는 공모전에 심사 위 원으로 참여할 정도로 경력을 인정 받고 있지. 그리고 안유천과 김단비 작가는 두 편의 천만 영화를 집필한 작가들이야. 그리고 나도 나름 인정 받고 있는 영화 제작자야. 극히 일 부의 의견이 아니라, 신뢰할 만한 의견이라고 평가하는 게 맞아.”

“하지만……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최호인의 말을 자르며 이규한이 이 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가 리뷰를 해 줄 사람들을 선택 한 데는 기준이 있었어.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리뷰를 부탁하는 게 본래 취지였지.” 연출자인 양도윤 감독.

작가인 안유천과 김단비.

제작자인 이규한.

일부러 이렇게 구성을 했던 것이었 다.

“한 분야가 빠졌습니다.”

최호인이 지적했다.

“배우는 참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 지적을 들은 이규한이 대답했 다.

“배우도 참여했어. 다만 촬영 일정 때문에 오늘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 던 거지.” “어떤 배우가 리뷰를 해 줬습니 까?”

“송강오 선배.”

이규한이 리뷰를 부탁한 것은 송강 오였다. 그리고 그는 짤막하지만 강 렬한 리뷰를 이규한에게 문자로 보 내왔다.

“송강오 선배님은 어떤 리뷰를 해 주셨습니까?”

“듣고 싶어?”

“네? 네.”

“진짜 듣고 싶어?”

최호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 인한 이규한이 입을 뗐다.

“때려 죽여도 이 영화에는 출연 안 하겠대.”

“그리고 친한 동료 배우들이 이 영 화에 출연한다고 하면 도시락 싸서 쫓아다니면서 뜯어 말리겠다는군. 이런데도 여전히 극히 일부의 의견 이라고 생각해?” “아직도 인정 못 하겠어?”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던 최호인 이 한참 만에 대답했다.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인 정하기 싫었던 것뿐입니다.” 원래 달콤한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깨어나기 싫기 마련이었다.

그 꿈에서 깨고 나면 지독하리만치 잔인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 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최호인도 마찬가지였다.

달콤한 꿈에서 깨어난 그를 기다리 는 것은 잔인한 현실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잔인한 현실에 두 발을 내디딘 최 호인이 침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이규한이 오히려 되묻자 최호인이 망설임 끝에 대답했다.

“이 작품의 연출을 맡고 싶지 않습 니다.”

“이유는?”

“아직 많이 부족하니까요.”

최호인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쓴 웃음을 머금었다.

만약 지난번 만남에서 이렇게 대답 했다면?

최호인은 연출직을 내려놓을 기회 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해서 이규 한이 물었다.

“십억,있어?”

“물론 없죠. 하지만……,”

슬그머니 말끝을 흐리는 최호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아 있는 것을 확 인한 이규한이 물었다.

“왜 그렇게 봐?”

“형님이 대신 내 주시면 안 됩니

까?”

“내가 왜 십억을 대신 내 줘?”

“지난번에는 분명히……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마음이 바뀌었다는 뜻이야.”

“왜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생각해 보니 아깝더라고.”

이규한이 딱 잘라 거절한 후 최호 인에게 물었다.

“이제 얼마나 멍청한 계약을 했는 지 알겠어?”

“네,이제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마.”

“절대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힘주어 대답한 최호인이 이내 한숨 을 내쉬었다.

“그건 나중의 일이고,지금이 문제 입니다.”

“문제가 심각하긴 하지. 하지만 세 상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어.”

일단 최호인이 주제 파악을 확실히

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판단한 이규한이 웃으며 덧붙였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해결 해 보자고.”

그 말을 들은 최호인이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혹시 염두에 두신 해결책이 있으 십니까?”

“목표를 명확히 정하는 게 우선이 야.”

“목표요?”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가 천만 영화가 돼야 한다는 계약 조건 은 없거든.”

" <……?"

“쉽게 말해서 ‘우리의 복수는 범죄 가 아니다’는 작품을 최 감독이 연 출하고 내가 제작해서 개봉만 하면 계약 조건은 완수하는 거야.”

의외로 쉽게 느껴지는 계약 조건.

그렇지만 함정 카드가 하나 숨어 있었다.

이번 영화가 폭삭 망해서 영화감독 최호인이 재기할 기회조차 없어지면 안 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내가 찾아낸 해법은 손익 분기점을 최대한 낮추는 거야.”

넘어가는 대작 영화들이 많이 늘어 났다.

뿐만 아니라,전반적인 영화들의 제작비가 상승한 추세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존재했 다.

우선 주연급 배우들의 캐스팅 경쟁 이 치열해지면서 배우들의 몸값이 상승했다.

그리고 홍보의 중요성이 강조되면 서 흥보비 지출이 늘어나 제작비도 함께 상승했다.

그 외에도 기획 개발비 상승,감독 연출료 상승,스태프 임금 상승 등 의 요인들도 전반적인 제작비 상승

추세에 일조하고 있었다.

제작비가 상승하면 당연히 손익 분 기점도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100억대 제작비가 소요되는 영화 가 증가하면서 300만 이상의 관객 이 들어야 본전을 찾는 경우도 늘어 난 것이었다.

그리고 이규한이 세운 전략은 현 추세와는 반대였다.

손익 분기점을 최대한 낮추면 관객 수가 적게 들어도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신인 감독의 평가 기준 가운데 가 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입봉작이 손익 분기점을 넘겼는가 여부.

이 전략이 먹힌다면 계약 조건을 완수하는 것을 물론이고,최호인 감 독이 다음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즉,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셈이었다.

“최 감독이 생각했던 제작비는 어 느 정도 수준이야?”

이규한이 묻자 최호인이 대답했다.

“60억입니다.”

“순제작비? 아니면, 총제작비?”

“총제작비 입니다.”

순제작비와 총제작비는 조금 달랐 다.

순제작비는 작품을 제작하는 데 들 어가는 비용을 말했고,총제작비는 순제작비에 홍보비와 각종 부대 비 용을 합한 것을 말했다.

‘많은 편은 아냐.’

순제작비가 아니라 총제작비가 60 억이라면,제작 예산이 큰 편은 아 니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만족하 지 못했다.

“더 줄이자.”

“얼마나 줄이실 겁니까?”

최호인의 질문을 받은 이규한이 대 답했다.

“40억 수준으로 낮추자.”

“총제작비를 40억 수준으로 낮추 자는 말씀입니까?”

“맞아.”

이규한이 대답한 순간 최호인의 표 정이 굳어졌다.

“왜? 너무 적다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이 돼서요.”

“어떤 걱정?”

“제대로 된 영화를 찍을 수 있을 까? 이런 우려가 들어서요.”

아까도 말했듯이 전반적인 영화 제 작 비용이 상승하는 추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총제작비 40억이라 면 상업 영화 가운데서는 거의 최소

제작비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 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최호인 은 과연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까에 대한 의구심을 품은 것이었다.

“가장 우려하는 게 뭐야?”

“배우들입니다.”

“배우들?”

“제작비 수준을 감안하면 신인급 배우들을 주연으로 쓸 수밖에 없습 니다. 신인 감독과 신인 배우의 조 합.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최호인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다면,자연스레 흥보비도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인 감독과 신인급 배우들 의 조합이라면?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라 는 작품은 대중들의 주목을 끌지 못 하고 조용히 묻혀 버릴 가능성이 높 았다.

최호인이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고개를 흔들었 다.

“걱정할 필요 없어.”

“왜 걱정한 필요가 없다는 겁니 “신인 감독과 신인 배우의 조합이 아니니까.”

“티켓 파워를 갖추고 있고,연기력 에서도 검증을 받은 배우들을 캐스 팅할 거야.”

이규한이 호언장담했지만,최호인 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총제작비가 고작 40억에 불과한데 대체 어떻게 티켓 파워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연기도 검증된 배우들 을 캐스팅할 수 있느냐?

이런 의미가 담긴 질문이었다.

그 질문을 받은 이규한이 대답했 다.

“마법을 부려 봐야지.” “마법을 부려 보겠다.”

이규한이 최호인에게 꺼냈던 대답 이었다.

그렇지만 세상에 마법 따윈 존재하 지 않았다.

이규한이 할 수 있는 것은 마치

마법을 부린 것처럼 느껴지도록 최 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이었다. 책상 서랍에서 메모지를 꺼낸 이규 한이 펜을 움켜쥐었다.

-각본료.

-각색료.

-배우 개런티.

- 흥보비.

이규한이 메모지에 적은 것은 총 네 가지 항목이었다.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의 제작비를 줄여야 한다는 미션을 완

수하기 위해서 고심한 끝에 적은 항 목들이 었다.

‘하나씩,하나씩.’

앞으로 갈 길이 너무 멀기 때문일 까.

자꾸 마음이 조급해지려 하고 있었 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서두르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애쓰며 혼잣말을 꺼냈다.

“우선은 각본이야.”

1억 관객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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