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화
블라인드 테스트 (1) “벌써부터 그런 말씀은 좀……
“나만 이렇게 판단하는 게 아냐.”
“ <……?"
“네가 존경하는 김대환 대표도 같 은 생각이야.”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의 김대환 대 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야 기를 듣자 최호인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라는 작품에 투자를 한 겁니 까?”
“설명하자면 복잡해.”
“네?”
“가장 큰 이유는 나 때문이야.”
당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 고 있는 최호인에게 현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해서 설명했다.
그 설명을 모두 들은 최호인의 낯 빛은 어둡게 변해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라는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 라, 대표님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서 사거리 픽처스에서 저와 연출 계 약을 맺었다는 겁니까?”
“얼추 맞아.”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편하게 말해 봐.”
“저는 대표님이 하신 말씀을 못 믿 겠습니다.”
최호인이 꺼낸 이야기를 들은 이규 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첫 과제라고 판단 한 주제 파악을 시키는 것부터 난관 에 봉착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주제 파악을 시킬 수 있을까?’
그로 인해 고민하던 이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그럼 이렇게 하자.”
“어떻게요?”
이규한이 대답했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 보는 거 지.” 정확히 일주일 후.
이규한과 최호인이 다시 만났다.
강남구청 역 인근 커피 전문점에 도착한 최호인은 긴장한 표정을 짓 고 있었다.
“형님,아니 대표님. 이제 심사 위 원들이 누군지 알려 주시죠.”
“조금만 더 기다려. 곧 알게 될 테 니까.”
“하지만……
“저기 오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던 이규한이 양도윤 감독을 발견하고 입을 뗐다.
잠시 후 양도윤 감독이 커피 전문 점으로 들어와 이규한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 대표님,오랜만입니다.”
“여전하시네요.”
“네?”
“오늘도 정장을 입고 계시네요.”
“하하,습관이 돼서요.”
멋쩍게 웃음을 터트리는 양도윤 감 독에게 이규한이 물었다.
“작품 준비는 잘돼 가십니까?”
“이 대표님 덕분에 좋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었습니다.”
‘사관,왕을 만든 남자’와 ‘스파이
양도윤 감독이 블루문 엔터테인먼 트 소속 감독으로 연출했던 두 작품 모두 흥행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성 측면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 았다. 그래서 양도윤 감독은 훨씬 더 좋은 조건으로 다른 제작사와 계 약을 맺고 작품을 준비 증인 상황이 었다.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열심히 해 볼 생각입니다. 그래야 다시 이 대 표님이 불러 주실 테니까요.”
“죄송합니다.”
“이제 더 이상 절 찾아 주시지 않 으시겠다는 뜻입니까?”
양도윤 감독이 서운한 기색을 드러
내자 이규한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죄송하 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작품 준비를 하느라 바쁘실 텐데 귀찮게 해 드린 것 같아서입니다.”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대표님이 하신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이규한과 대화를 나누던 양도윤 감 독이 최호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누굽니까?”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직원입니 다.”
이규한은 최호인을 블루문 엔터테인 먼트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그 이유는 블라인드 테스트의 취지 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만약 최호인이 이규한이 보냈던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의 시나리오를 직접 쓴 감독이란 사실 을 알게 된다면?
양도윤 감독은 솔직한 감상 평을 꺼내기 어려울 터였으니까.
“신입 사원이니 신경 쓰실 필요 없 습니다. 그보다 차는 뭘로 드시겠습 니까?”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하겠습니 다.” 이규한이 지갑에서 신용 카드를 꺼 내서 최호인에게 내밀었다.
“들었지?”
“네?”
“양 감독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드시겠다고 했어.”
?
“대표인 내가 가는 게 맞아? 신입 사원이 가는 게 맞아?”
“…알겠습니다.”
졸지에 커피 심부름까지 떠맡게 된 최호인이 두 뺨을 부풀린 채 카운터 로 향했다.
최호인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 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두 번째와 세 번째 심사 위원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대표님?”
김단비 작가가 먼저 공손하게 인사 를 건넸다.
“저 왔습니다.”
양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안유 천도 인사했다.
“어깨에 힘 좀 풀지 그래?”
“명색이 쌍천만 작가인데 어깨에 힘 좀 줄 자격 있지 않습니까?”
당당하게 대꾸하는 안유천을 확인 한 이규한이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변호사’는 며칠 전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규한이 제작한 영화 가운데 ‘수 상한 여자’에 이어서 두 번째 천만 영화.
그리고 공교롭게도 안유천 역시 두 작품에 모두 작가로 참여했다.
‘수상한 여자’에는 각본 작가로.
또,‘변호사’는 윤색 작가로.
그러니 쌍천만 작가라는 표현이 틀 리지 않았다.
그리고 쌍천만 작가인 것은 김단비 도 마찬가지.
해서 이규한이 장난스런 표정을 지 은 채 물었다.
“쌍천만 작가님들은 차를 뭘로 드 시겠습니까?”
안유천도 웃으며 물었다.
“쌍천만 제작자께서 사 주시는 겁 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더블샷으 로 마시겠습니다. 그리고 단비는 바 닐라 라떼를 마실 겁니다.”
“분부대로 행하겠습니다.”
이규한이 최호인에게 눈짓했다.
“들었지?”
“또요?”
“그럼 내가 갈까?”
“제가 갑니다. 제가 가요.”
최호인이 다시 카운터로 향하자 안 유천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누굽니까?”
“신입 사원이야.”
“그래요? 신입 사원 뽑았다는 얘기 는 못 들었는데?”
“내가 그것까지 너한테 알려 줘야 해?”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안유천이 머리를 긁적일 때,이규 한이 양도윤 감독을 소개했다.
“인사드려. ‘사관,왕을 만든 남자’ 와 ‘스파이들’을 연출하셨던 양도윤 감독님이야. 감독님,안유천 작가와 김단비 작가입니다. 아까 쌍천만 작 가라고 본인 입으로 떠드는 것 들으 셨죠? ‘수상한 여자’와 ‘변호사’에 참여했던 작가들입니다.”
서로 이름은 들어봤던 사이지만, 직접 얼굴을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 었다.
그렇지만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일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친근함 이 깃들어 있었다.
“양도윤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쌍천만 작 가 안유천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단비입니 다.”
그들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최호인 이 주문한 음료를 갖고 돌아왔다.
그 순간,이규한이 입을 뗐다.
“이제 본격적으로 감상 평을 들어 볼까요?”
“어느 분이 먼저 시작하시겠습니 까?”
이규한이 운을 뗐지만 먼저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중 양도윤 감 독이 먼저 입을 뗐다.
“작품에 대한 감상 평을 하기 전에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혹시 계약이 된 작품입니까?”
양도윤 감독이 ‘우리의 복수는 범 죄가 아니다’라는 작품명을 입에 올 리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철저하게 블라인드 테스트를 받길 원했던 이규한은 이번 테스트의 심 사 위원이라고 할 수 있는 양우섭 감독과 안유천,김단비 작가에게 작 품을 건넬 때 최호인의 이름은 물론 이고 작품명도 알려 주지 않았다.
즉,양도윤 감독은 본인이 읽은 작 품의 제목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작 품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었다.
“네,계약이 돼 있습니다.”
“연출 계약이 이미 되어 있는 작품 이란 뜻입니까?”
양도윤 감독이 놀란 표정으로 재차 물은 순간 이규한이 덧붙였다.
“연출 계약뿐만 아니라,투자 계약 도 끝난 상태입니다.”
그 대답을 들은 양도윤의 표정은 놀람을 넘어 경악으로 물들었다.
“대체 그 정신 나간 제작사와 투자 사가 어디입니까?”
‘그 정신 나간 제작사가 바로 블루 문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이규한이 속으로 대답하면서 쓴웃 음을 머금었다.
“그건 나중에 밝히겠습니다. 그 전 에 왜 이런 질문을 하신 겁니까?”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했습 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작품이 계약이 된 것은 설마 아니겠지? 시나리오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거 든요.”
그래서 이규한은 차분한 안색을 유 지할 수 있었지만,최호인은 달랐다.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는 최호인에게 자식이나 다름없는 작 품.
그런데 시작부터 혹평 세례가 쏟아 지자,최호인의 표정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그 반응을 살피던 이규한이 입을 뗐다.
“뭐 하고 있어?”
“네?”
“귀한 시간을 내서 작품을 읽고 해 주시는 평가야. 하나도 빼 놓지 않
고 기록해야지.”
그 이야기를 듣고서 최호인이 펼치 고 있던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 작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이규한이 질문하자 양도윤 감독이 바로 대답했다.
“일단 스릴러 장르의 영화인데 반 전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르 적으로 설계나 플롯이 조밀하게 잘 짜여진 것도 아닙니다. 코미디와 스 릴러의 중간선상에 있다고 해도 좋 을 정도로 허술합니다. 더 큰 문제 는 코미디 요소조차 전혀 재미가 없 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인 대답이 돌아오자 이규한 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만약 감독님께 이 작품을 연출하 라고 제안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 까?”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안 할 겁니 다.”
“이유는요?”
“제 커리어를 망치고 싶지 않으니 까요.”
이규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힐끗 최호인을 살폈다.
톡. 톡. 토독.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던 손놀림을 멈출 정도로 최호인은 충격에 휩싸 인 표정이었다.
‘아직 멀었어.’
지금까지는 영화감독 양도윤의 평 가였다.
이제부터는 작가들의 평가를 들을 차례였다.
“다음은 안 작가가 할까?”
이규한이 제안하자 안유천 작가가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힘들었습니다.”
그런 그는 하소연부터 시작했다.
“뭐가 힘들었다는 거야?”
“가독성이 너무 떨어져서 끝까지
읽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 서 자꾸 잡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잡생각을 했어?”
“이규한 대표님이 왜 이런 쓰레기 같은 작품을 읽고 나서 평가를 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을까? 이런 의문이 들자,자꾸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더군요.”
꿈틀.
쓰레기라는 표현을 들은 최호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존심이 상하겠지.’
조금 안쓰럽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규한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이것 역시 최호인이 진짜 감독이 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 중 하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안유천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혹시 날 골탕 먹이려고 부탁한 게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었을 정도였 습니다. 그리고 설마 블루문 엔터테 인먼트에서 이 작품을 제작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런 의심도 들었습니 다. 그럼 앞으로 이규한 대표님과의 인연을 끊어야 하나에 대해서도 고 민했고요.”
“왜 그런 고민을 했어?”
“만약 그 설마가 사실이라면 작품 을 보는 눈이 꽝이니까요.”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