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이유를 찾아라 (2)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인 이 규한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
씨제스 엔터테인먼트가 블루문 엔 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는 작품의 투 자와 배급을 맡는 것이었다.
투자 계약을 맺을 때 블루문 엔터 테인먼트에게 최대한 유리한 조건을 양보하는 것이 이규한의 마음을 얻 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사실.
과연 김대환 대표가 모를까?
그럴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법을 쓴 것이 김대환 대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이유였다.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어.”
김대환 대표를 직접 만나 얻은 소 득 중 하나는 그가 이규한과 최호인 의 사적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해.”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이
‘최호인이 직접 쓴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라는 작품이 흥행하 기 힘들다는 사실을 과연 김대환 대 표가 모를까?’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오랫동안 영화계에 몸담았고,영화 투자의 귀재라 불리우며 씨제스 엔 터테인먼트 대표직까지 오른 그의 안목은 뛰어났다.
분명히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 니다’라는 작품이 흥행 부진을 겪을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거리 픽처스 와 최호인이 연출 계약을 맺도록 만
들고,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투 자와 배급을 맡은 진짜 이유.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 다’라는 작품이 이대로 촬영을 마치 고 개봉을 한다면?’
결과는 분명히 처참할 터였다. 그 리고 입봉작을 거하게 말아먹은 최 호인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훤히 그려졌다.
‘퇴물 감독.’
재활용조차 불가능한 쓰레기 감독 이란 평가를 받게 될 터였고,당연 히 재기를 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즉,영화감독으로서 최호인의 인생 은 끝나는 셈이었다.
차라리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 니다’의 흥행 부진을 겪고 난 후에 최호인이 영화계를 떠난다면 그나마 괜찮을 텐데.
이규한이 직접 만난 최호인은 영화 계를 떠나지 못할 인물이었다.
‘한 번은 다시 기회가 올 거야.’
이렇게 판단하면서 기대를 품은 채 영화계 주변을 떠돌 것이다.
그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흐를 터였 고,이규리는 생계에 어려움을 겪으 면서 불행해질 것이다.
“김대환 대표가 바라는 게 설마 이 건가?”
잔뜩 표정을 굳히고 있던 이규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막아야 해.”
시간이 많지 않았다.
최악의 결과로 치달아 가기 전에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판단한 이 규한은 서둘러 커피숍을 빠져나갔 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최호인이 들어서는 것을 확인하고, 이규한은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저 왔습니다.”
“왔어?”
이규한이 최호인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을 때 김미주가 흥미를 드러 냈다.
“누구세요?”
‘어떻게 소개할까?’
잠시 고민하던 이규한이 솔직히 대 답했다.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라 는 작품을 쓰고 연출을 맡기로 한 최호인 감독이야.” 최호인이 바로 ‘우리의 복수는 범 죄가 아니다’라는 작품을 직접 쓴 감독이란 사실을 알게 된 김미주의 표정에서 호기심이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황진호와 백진엽도 마찬가 지였다.
그때 이규한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커피 전문점 블루문 사장의 남자 친구이기도 하고.”
그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김미주의 표정이 급변했다.
“규리 씨,더 열심히 일해야겠네.”
두 눈을 치켜뜨고 있던 김미주가 꺼낸 말이었다.
“커피집 여사장 앞날이 어둡네.” 백진엽이 한 말이었고.
“얼마나 깊은 사이야? 설마 결혼까 지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마지막으로 황진호가 안타까운 시 선을 던지며 꺼낸 반응이었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규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 는 최호인에게 제안했다.
“나가자. 술 한잔하면서 얘기해.”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인근에 위치 한 일식집.
이규한이 아르바이트생에게 가게를 맡기고 술자리에 동석한 이규리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다.
“넌 왜 따라왔어?”
“바늘 가는데 실 따라가는 건 당연 한 것 아냐?”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하는 이규리 를 바라보던 이규한이 물었다.
“이 녀석이 그렇게 좋아?”
“응. 좋아.”
일 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돌아온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속으로 한숨
을 내쉬었다.
그사이에 뜨겁던 사랑이 식었기를 바랐는데.
최호인을 바라보는 이규리의 눈빛 에는 여전히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 다.
그렇지만 이규리를 탓할 문제는 아 니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것은 의지대로 되 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한 잔 받아.”
이규한이 소주병을 들어 올리며 말 했다.
“넌 뭐가 그렇게 좋아?”
“제 꿈을 이룰 날이 머지않았으니 까요.”
‘입봉과 함께 감독 인생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이렇게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것 을 이규한은 꾹 참았다.
현재 최호인은 오랜 꿈이었던 영화 감독이 될 기회를 잡은 상황.
당연히 연출을 맡은 작품이 망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은 꿈에 한 발짝 다가갔다는 사실로 인해 잔뜩 들떠 있기 때문이
‘이 녀석을 탓할 게재가 아냐.’
이규리와 마찬가지였다.
최호인을 탓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화가 치밀 어 오르는 이유는 이규리 때문이었 다.
‘너 혼자 망하는 게 아냐. 내 여동 생의 인생도 너한테 달려 있거든.’
그때 최호인이 물었다.
“시나리오 평가 좀 부탁드리겠습니 다.”
요새 충무로에서 가장 잘나가는 영 화 제작자가 바로 이규한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최호인 은 이규한에게 시나리오에 대한 조 언을 구하려는 것이었다.
“술맛 떨어지기 전에 일단 술부터 좀 마시자.”
“네?”
최호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더 자세히 설명 하는 대신,몇 잔의 술을 연거푸 마 신 후 입을 뗐다.
“총제적인 난국이야. 그래서 어디 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조차도 감이 안 올 정도야.”
“그 정도로 안 좋습니까?” 기대했던 것과 한참 다른 대답이기 때문일까.
최호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 다.
“만약 나라면 제작 안 할 거야.”
이규한이 덧붙인 말을 들은 최호인 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잠시 후 최호인이 살짝 언성을 높 였다.
“그럼 왜 사거리 픽처스에서 저와 연출 계약을 맺었을까요? 또,국내 최대 메이저 투자 배급사인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왜 투자와 배급 을 맡았을까요?”
“나도 그게 궁금해 죽겠다.”
“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계약서 갖고 왔지?”
이규한은 최호인에게 계약서를 갖 고 사무실로 찾아오라고 지시했다.
“네,갖고 왔습니다.”
“빨리 줘 봐.”
“그런데 계약서는 왜 갖고 오시라 고 한 겁니까?”
“독소 조항이 있는지 확인해 보려 고.” “네?”
“제작사에서 순진한 신인 감독 뒤 통수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 없거든.”
최호인에게서 계약서를 건네받은 이규한이 신중한 표정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이규한이 눈살을 찌푸렸 다.
‘계약금이… 1억?’
보통 신인 감독에게 책정된 연출료 는 오천만 원 정도였다.
그조차도 한 번에 주는 경우는 드 물었다.
일반적으로 두 차례 혹은 세 차례
에 나눠 지급했다.
쉽게 말해,연출료 총액이 오천만 원이라고 해도,계약금으로 이천만 원가량을 지급하고 나머지 잔금인 삼천만 원은 촬영이 시작되거나,촬 영을 마치고 난 후에 지급하는 경우 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최호인의 계약서 내용은 달 랐다.
우선 신인 감독인 최호인과 연출 계약을 맺었음에도 연출료가 너무 많았다.
보통 신인 감독과 계약할 때보다 연출료로 책정된 액수가 두 배가량 많은 셈이었다.
또, 단계별로 분산해서 지급하지도 않았다.
계약금 명목으로 일억 원을 일시불 로 모두 지급했다.
‘최고 수준의 계약.’
연출료의 액수와 지급 방식만 놓고 보자면,신인 감독으로서 최고 수준 의 계약인 셈이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입맛이 개운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왜 이렇게 조건이 좋은 거지?”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의문을 표출 한 순간이었다.
아니겠습니까?”
최호인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 답했다.
그런 그를 상대하는 대신 이규한이 다시 계약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이규한이 미간을 좁혔다. 독소 조항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을이 계약의 의무를 다하지 않거 나,심대한 잘못을 한 경우 계약은 종료된다. 이 경우,을은 갑에게 계 약금의 열 배를 배상한다.
‘계약금의… 열 배?’
이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경우,계약금의 두 배 혹은 세 배 정도를 위약금으로 책정하기 때문이었다.
“언제 계약했어?”
“대략 한 달 전에 했습니다.”
“계약금은 받았어?”
“네,받았습니다.”
최호인이 힘주어 대답한 순간 이규 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내게 말 안 했어?”
“뭘 말입니까?”
“계약하기 전에 나하고 먼저 상의 했어야지.”
이규한이 질책하자 최호인이 머리 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원래는 상의를 드리려고 했습니 다.”
“그런데?”
“도중에 마음을 바꿨습니다. 일단 계약을 마치고 난 후에 형님께 말씀 드리는 편이 더 떳떳할 것 같아서 요.”
“한마디로 서프라이즈를 하고 싶었 단 뜻이야?”
“그런 셈입니다.”
‘돌겠네.’ 이규한의 한숨이 깊어졌다.
최호인의 마음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규한도 영화 제작자.
그것도 최근 충무로에서 가장 핫한 제작자였다.
그렇지만 최호인은 이규한에게 먼 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아마 스스로의 힘으로 입봉하고 싶 었기 때문이리라.
그런 그는 보란 둣이 연출 계약을 마치고 난 후에 이규한에게 그 사실 을 알리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그게 패착이었다.
“이 조항은 확인했어?”
이규한이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할 당시에 확인했습니다.”
“확인을 했다고?”
“네,
“그런데도 계약을 했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거든 요.”
“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거 지?”
“계약상의 의무를 다해서 입봉할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최호인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 한 순간 이규한이 고개를 흔들었다.
“당한 거야.”
“당했다니 요?”
최호인은 제대로 말뜻을 이해한 기 색이 아니었다.
그런 그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 규한이 설명을 덧붙였다.
“만약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사거리 픽처스에서 말도 안 되는 트 집을 일부러 잡으면 어떻게 할 거 야?”
“설마 일부러 그렇게까지 하겠습니 까? 다 같이 힘을 합쳐서 좋은 영 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뭉쳤
는데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최호인의 대답 을 들은 이규한의 한숨이 깊어졌다.
제작사에서 연출자를 교체하려는 경우, 계약서대로라면 위약금을 지 불해야 했다. 그러나 자금 사정이 열악한 제작사에서 억 단위의 위약 금을 지불하면서 연출자를 교체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잘못된 관행이기는 하지만 제작사 는 연출자가 버티지 못하고 먼저 그 만두겠다는 말이 나오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때 사용하는 방법이 갖은 트집을 잡아서 연출자를 흔드는 것이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