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노이즈 마케팅 (2)
“일상의 히어로요?”
“쉽게 말해 우리 이웃에 살고 있는 히어로죠. 예를 들면 마트 점원이나 문구점 사장 혹은 경비 아저씨 정도 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규한이 설명해 주었지만,우중완 감독은 제대로 이해한 기색이 아니 었다. 그래서 이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진짜 활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냥 감초 역할 정도로 존재감만 드러 내는 셈이죠. 재벌 2세라고 해서 너 무 날뛰지 마라. 내 한주먹감도 안 되는 놈일 뿐이다. 이렇게 슬쩍 존 재감만 드러내고 빠지면 관객들에게 웃음과 통쾌함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요?”
이규한이 부연 설명을 한 후에야 우중완 감독이 비로소 두 눈을 빛냈 다.
“그런 의도라면 누가 연기하느냐가 중요하겠네요.”
“카메오를 쓰죠.”
으십니까?”
“한 명 떠오르는 배우가 있습니 다.”
“마 씨 성을 가진 배우가 맞습니 까?”
“오랜만에 의견 일치를 본 것 같네 요.”
이규한이 웃으며 대답하자 우증완 감독의 입가에도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순간 이규한이 제안했다.
“지금 바로 수정하시죠.”
“여기서요?”
습니까?”
“생각해 보니 안 될 건 없네요.”
우중완 감독이 노트북을 꺼냈다. 한글 파일을 연 그가 물었다.
“직업은 뭘로 하는 게 좋겠습니 까?”
“아까 말이 나온 김에 문구점 주인 으로 하시죠. 음, 예술상자라는 문구 점은 감독님도 알고 계시죠?”
“물론 알고 있습니다.”
“예술상자 주인으로 하시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던 우중완 감 독이 물었다.
“그런데 굳이 예술상자 주인으로
하려는 이유가 있습니까?”
“협찬 좀 받으려고요.”
“협찬을… 과연 받을 수 있을까 요?”
우중완 감독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질문하는 것을 들은 이규한이 대답 했다.
“천만 영화에 상호명을 언급해 주 는데,당연히 협찬해 주지 않겠습니 까? 협찬은 제가 받아 낼 테니 감 독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만… 영화요?”
“왜요? 안 믿기십니까?”
“솔직히 믿기 어렵네요.” 전작들이 모두 흥행에 실패했기 때 문일까.
우중완 감독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순간 이규한이 되물었다.
“안 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우중완 감독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 은 채 본격적으로 수정 작업에 돌입 했다.
톡. 톡,토도독.
약 반 시간 후,노트북 자판을 두 드리던 우중완 감독의 손이 멈추었 다.
“끝났습니다.” 우중완 감독에게서 노트북을 건네 받은 이규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중완 감독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왜 바로 확인하지 않고 일어서시 는 겁니까?”
“저는 출력한 시나리오만 봅니다. 그래서 출력부터 하려는 겁니다.” 이규한이 거짓말을 했다.
우중완 감독이 수정한 시나리오를 노트북 화면으로 확인하지 않고,따 로 출력해서 확인하려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감정을 하기 위함이었다.
잠시 후,출력한 시나리오 책을 집 어 든 이규한의 눈앞에 새로운 숫자 가 떠올랐다.
-11,164,593.
그 숫자를 확인한 이규한이 환하게 웃으며 혼잣말을 꺼냈다.
“마 씨 성을 가진 예술상자 주인의 영향력이 예상보다 대단하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실.
“‘민란’의 현재까지 관객수는 420 만 명입니다.”
김덕원의 보고를 듣던 김대환이 슬 쩍 눈살을 찌푸렸다.
“기대했던 것보다 스코어가 많이 저조하군.”
“죄송합니다.”
“손익 분기점은 넘길 수 있을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민란’의 좌석 점유율은 10%대 중 반까지 하락했다. 그로 인해 한때 1,1??개를 넘겼던 ‘민란’의 현재 상 영관은 300개 언저리에 불과했다.
상영관이 1/4 수준으로 줄어든 만 큼,관객수가 상승하는 속도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것이 ‘민란’이 손익 분기점을 넘 기지 못할 것이라고 김덕원이 판단 한 이유였다.
반면 100개도 되지 않는 상영관 수로 개봉했던 ‘변호사’의 현재 상 영관 개수는 800개를 넘겼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크게 둘.
우선 좌석 점유율 면에서 워낙 차 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좌석 점유율 이 하락한 반면,‘변호사’는 정치색 논란이 오히려 흥보 측면에서 득이 되어 좌석 점유율이 더욱 상승했다.
현재 ‘변호사’가 60%대 중반의 높 은 좌석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것 이,정치색 논란이 홍보에 득이 된 증거였다.
그리고 한 명의 관객이라도 더 들 어와야 많은 수익을 올리는 극장주 입장에서는 좌석 점유율이 낮은 ‘민 란’ 대신 좌석 점유율이 무척 높은 ‘변호사’에게 더 많은 상영관을 배 정하는 게 당연히 이득이었다.
독과점을 비난하는 여론에 극장주들 이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악수를 뒀군.”
김대환이 꺼낸 이야기를 듣고, 김 덕원이 상념에서 깨어났을 때였다.
“‘변호사’의 정치색을 꼬투리 삼아 논란을 일으킨 것 말일세.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거라고 내가 경고하지 않았었나?”
김대환의 질책을 들은 김덕원이 변 명을 꺼냈다.
“이길주 전무의 지시였습니다.”
“이 전무가 지시했다? 자네가 말렸 어야지?” “재고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허사였 습니다.”
“그랬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대환 이 질문했다.
“지금 ‘변호사’는 관객이 얼마나 들었지?”
“어제 확인한 바로는 600만 명이 넘는 관객들을 동원했습니다.”
“보기 좋게 당했군.”
“네?”
“우리를 비롯한 메이저 투자 배급 사들이 겨울 극장 성수기 시즌을 노 리고 모두 대작을 준비했지 않은가?
그런데 정작 승자가 된 것은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변호사’가 됐으니 말일세.”
“저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입니 다.”
김덕원이 의견을 덧붙였다.
“‘변호사’를 제작한 블루문 엔터테 인먼트 이규한 대표의 역량이 제 짐 작보다 더 뛰어난 것 같습니다.”
“내가 그랬지 않은가? 재밌는 친구 라고.”
바로 대답하는 김대환을 살피던 김 덕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과 투자,배급까지 맡았던 기대작 ‘민 란’이 ‘변호사’에 참패했음에도 불구 하고,김대환의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 거지?’
그래서 김덕원이 의구심을 품었을 때였다.
드르륵.
김대환이 서랍을 열고 한 권의 시 나리오 책을 꺼냈다.
“이 시나리오를 쓴 감독과 계약을 맺으라고 투자팀에 지시하게.”
김덕원이 다가가서 시나리오 책을 건네 받았다.
‘우리의 복수는 범죄가 아니다.’
시나리오 책 앞장에 적혀 있는 작 품의 제목이었다. 그리고 각본을 쓴 것은 최호인 감독이었다.
‘누구지?’
김덕원이 재빨리 기억을 더듬어 보 았지만,최호인이란 이름은 전혀 들 어 본 적이 없었다.
‘누구기에 대표님이 관심을 가지신 거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김덕원이 결 국 질문했다.
“실력 있는 신인 감독입니까?”
“반대일세.” “실력 없는 신인 감독이란 뜻일 세.”
김덕원이 제대로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김대환이 다시 입을 뗐다.
“투자팀에서 내부적으로 검토를 거 친 결과,만장일치로 투자를 거절하 자는 의견이 나온 작품이야.”
“그런데 왜 이 작품을 쓴 최호인 감독과 계약하시려는 겁니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네.”
“무엇을 확인하고 싶으신 겁니까?”
김대환이 웃으며 대답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이규한 대표 의 진짜 능력을 확인해 보고 싶네.” 〈정치색 논란을 이겨 낸 진정성, ‘변호사’가 이룬 값진 결실〉
〈‘변호사’의 기적,최약체에서 겨울 극장가 승자로 거듭나다〉
포털 사이트에 떠올라 있는 기사들 을 바라보던 이규한의 입가로 미소 가 떠올랐다.
클릭 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기자들 의 자극적인 단어를 제목에 배치한 다는 사실은 이규한도 잘 알고 있었 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전혀 과하지 않 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저 투자 배급사들의 각축전이 펼쳐진 올 겨울 극장 성수기 시즌에 서 ‘변호사’가 최종 승자가 된 것.
말 그대로 기적이나 다름없는 결과 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메이저 투자 배급사가 아닌 케이 컴퍼니의 투자를 받아서 배급 의 어려움을 이겨 내고 이룬 결과라 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는 부분이었 다.
“우리가… 이겼다.”
다윗과 골리앗들의 싸옴.
그래서 모두가 무모하다고 말렸지 만,이규한은 고집을 꺾지 않고 ‘변 호사’의 겨울 개봉을 밀어붙였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이기고 싶었던 승부에서 승리를 거두었기에 더욱 기쁜 감정이 컸다.
“이 대표도 참 대단하다.”
황진호가 꺼낸 말을 듣고 이규한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요?”
“그 두둑한 배짱과 뚝심이 대단하 다고. 내가 형이긴 하지만,이 대표
한테 많이 배우고 있어. 그리고 제 작자로 돌아가는 것이 무서워졌다.”
“왜 무서워졌습니까?”
“난 이 대표처럼 해 낼 자신이 없 거든.”
황진호가 감탄한 표정으로 말한 순 간 이규한이 웃었다.
“다행이네요. 제 입장에서는 형이 필요하거든요.”
“말이라도 고맙다. 그나저나 이제 는 ‘베테랑들’ 차례인가?”
황진호도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베테랑들’의 공동 제작에 뛰어들었 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
그래서 그가 질문한 순간 이규한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제 역할은 끝났습니다.”
“응?”
“이제 빅스빅 픽처스 장준경 대표 가 작품을 맡아서 마무리할 겁니 다.”
빈말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이규한은 ‘베테랑들’이란 작품의 제작 단계에서 공동 제작자로서 역 할을 충분히 했다.
‘넘치게 했지.’
었을 때였다.
“그럼 이제 뭘 하려고?”
황진호가 물었다.
그 질문을 받은 이규한이 생각을 정리했다.
딱히 급한 것은 없었다.
‘변호사’가 역주행하면서 관객수가 이미 800만 명을 돌파한 상황.
게다가 아직까지도 ‘변호사’는 박 스 오피스 순위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또 좌석 점유율도 40%대 중반을 유지하고 있는 만큼,천만 관객을 돌파할 가능성이 유력했다.
정산이 끝나고 나면 ‘수상한 여자’ 때와 엇비슷한 수익을 거둘 터였기 때문에 차기작 제작을 서두를 필요 는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규한이 대 답했다.
“슬슬 약속을 지킬 준비를 해야
죠
“무슨 약속?”
“두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우선 박한정 작가와 계약을 할 때 3년 안에 감독 입봉을 시켜 주기로 했습 니다. 머잖아 박한정 작가가 각본 작업을 마칠 테니,제작 준비를 해 야죠. 또,백 피디와의 약속도 지켜
야죠.”
“진 엽이?”
“네. 백 피디를 처음 만났을 때 제 가 했던 약속,혹시 기억 안 나십니 까?”
이규한이 묻자 황진호가 두 눈을 가늘게 좁힌 채 기억을 더듬었다.
잠시 후,황진호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인천행 버스’를 제작하겠다는 약 속을 말하는 거야?”
“지금은 ‘부산행 열차’로 제목이 바뀌었죠.”
루문 엔터테인먼트로 영입하기 위해 서 꺼냈던 감언이설 아니었어?”
“진심이었습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