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마지막 기회 (1) “내가 해 주고 싶은 말이다. 해외 여행 가느라 이번 작업 놓치고 나서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지 마.” 이규한은 안유천을 다루는 법을 알 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떼자,안유 천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제가 왜 후회할 거란 겁니까?”
“이 작품,천만 영화가 될 거거든.”
“천만 영화에 윤색 작가로 참여했 다는 이력,분명히 네 작가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런데 네가 그 기회를 놓치게 되는 셈이니 후회할 거라고 말한 거지.”
안유천은 식탐만 많은 것이 아니었 다.
무명작가 생활이 길어서일까.
작가로서 명예욕도 큰 편이었다. 그리고 천만 영화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작가 인생에 흔치 않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안유천 은 갈등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안유천의 반응을 살피던 이규 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왜 일어나 십니까?”
“얘기 끝난 것 아냐? 넌 해외여행 간다고 했으니까,빨리 다른 작가 구해야지.”
“하여간 참 극단적이시라니까요. 아직 얘기 안 끝났습니다. 커피도 남았으니까 마저 이야기하시죠.”
“무슨 얘길 더해?”
“이번 작품, 진짜 천만 영화 됩니 까?” ‘나 못 믿어?”
“물론 이 대표님은 믿죠.”
“그럼 더 길게 설명할 필요 없겠 네.”
이규한이 딱 잘라 말하자 안유천이 크게 숨을 내쉰 후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원하던 대답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이규한이 애써 새어 나오려는 웃음 을 참은 채 물었다.
“왜 마음이 바뀐 거야?”
“해외여행은 언제든지 갈 수 있지 만,천만 영화에 참여할 수 있는 기 회는 자주 오지 않으니까요.”
“잘 생각했다.”
“대신 약속은 지키셔야 합니다.”
“약속? 어떤 약속?”
“위약금 대신 내 주기로 하셨던 약 속이요.”
“고민해 볼게.”
이규한의 대답을 들은 안유천이 황 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화장실 가기 전이랑 가고 난 후에 사람 마음이 달라지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방금 전에 위약금 대신 내 주겠다고 약속하시더니,그새 말이 달라지면 곤란하죠.”
당당한 표정을 견지했다.
“말이 달라진 게 아냐.”
“역시 경력이 무섭네요.”
“그건 또 무슨 뜻이야?”
“예전에 없던 뻔뻔함 스킬까지 장 착하셨네요.”
안유천이 비아냥댄 순간,이규한이 충고했다.
“너,요새 게임하냐?”
“어떻게 아셨습니까?”
“스킬 타령하는 것 보고 눈치겠 지.”
“그런데 그 얘긴 왜 하시는 겁니 까? 남들 다 하는 게임,저도 좀 하 면 안 됩니까?”
“응,안 돼.”
이규한이 대답하자 안유천이 억울 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안 된다는 겁니까?”
“년 작가니까.”
“작가랑 게임이랑 대체 무슨 상관 이 있는 건데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규한이 되레 질문을 던졌다.
“작가에게 제일 많은 게 뭐야?”
“그야… 시간이죠.”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작가는 시간이 많아. 게다가 딴짓 못 하게
감시하는 상사도 없어. 그러니까 게 임 같은 취미 활동에 빠지게 되면 스스로 조절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 취미 활동에 빠져서 작가 생 활 접은 작가들이 부지기수야. 그래 서 넌 게임을 하면 안 된다는 거 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안유천은 여전히 불만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 다.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다 시 말했다.
“게임하느라 좋은 작품 제안이 들 어와도 시간이 없다고 계속 거절하 면 어떻게 될까? 요새 불경기인 것, 너도 알지? 그래서 초기 자본이 거
의 안 드는 작가가 되려는 지망생들 이 엄청나게 늘었어. 넌 자꾸 작품 제안 거절하는 콧대 높은 작가로 낙 인이 찍힐 테고,다른 작가 지망생 들한테 작품 제안이 돌아갈 거야. 그러다 보면 작가 안유천의 존재는 점점 잊혀지게 될 거고,그때는 아 무도 널 찾지 않을걸. 그럼 안유천 은 명색만 작가일 뿐,백수나 마찬 가지 신세가 될 거고,능력 없는 남 자를 계속 좋아해 주는 여자는 세상 에 많지 않아. 그러니 김단비 작가 도 네 곁을 떠나게 되겠지.”
“진짜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극단적 이세요?”
“극단적인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시나리오를 알려 준 거 야.”
“알았습니다. 게임 접을게요. 접으 면 되잖아요?”
콧김을 거칠게 내뿜으며 대답하던 안유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아까 분명히 위 약금 이야기를 하고 있었었는데.”
안유천의 볼멘소리를 들은 이규한 이 쓴웃음을 지었다.
대화 도중에 삼천포로 빠졌다는 사 실을 뒤늦게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다 너 때문이잖아.”
그래서 이규한이 탓하자,안유천이 다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왜 저 때문입니까?”
“다른 사람이랑은 안 그런데 이상 하게 너와 대화하면 도중에 자꾸 이 야기가 삼천포로 빠지거든.”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안유천과 대화할 때만, 자꾸 이야기가 핵심을 벗어나서 삼 천포로 빠지는 경우가 잦았다.
“이런 식이라면 요새 경기가 어려 운 것도 제 탓이라고 하시겠네요.”
규한이 다시 대화를 본론으로 돌렸 다.
“아까 위약금 얘기도 게임 얘기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아.”
“그건 또 무슨 궤변입니까?”
“최대한 작업을 서둘러야 하거든. 쉽게 말해 작업을 서둘러 끝내면 굳 이 취소하지 않고 해외여행을 가도 될 것 아냐?”
“보름도 안 남았는데요?”
“그럼 열홀 안에 윤색을 끝내면 되 잖아.”
이규한이 바로 대답하자 안유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게 말처럼 쉽습니까?”
“전에도 했잖아?”
“언제요?”
“‘변호사’ 시나리오 각색도 보름이 안 걸려서 끝냈었잖아? 그리고 이번 엔 각색이 아니라 윤색이야. 그러니 까 충분히 열흘 안에 끝낼 수 있지 않을까?”
“그때는 신기가 내렸던 거라니까 요.”
“이번에도 신기가 내릴 수도 있잖 아?”
“신기가 그렇게 자주 내리는 게 아 니라니까요.”
답답하단 표정을 짓던 안유천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진짜 어이가 없을 지경이네.”
그 말을 들은 이규한이 기회를 놓 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어이가 뭔지는 알고 그런 표현을 쓰는 거야?”
“어이… 요?”
“그래. 어이.”
“모르겠는데요.”
어이가 없다는 표현은 일상생활에 서도 자주 사용했다. 그렇지만 정작 어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 었다.
안유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를 위해서 이규한이 설명을 더했다.
“어이가 없다는 말이 생긴 유래는, 맷돌은 있는데 맷돌을 돌릴 손잡이 가 없어서 황당하단 거야.”
“그럼 어이가 맷돌의 손잡이란 뜻 인가요?”
“맞아.”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를 습득한 안유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 이걸 제가 왜 알아야 하는 겁니까?” “윤색 과정에서 이 대사가 꼭 들어 가야 하거든.”
“이 대사가요?”
“그래. 극중 악역을 맡은 재벌 2세 주인공이 이 대사를 사용해. 나중에 보면 알 수 있겠지만,설교하는 식 이지.”
“설교… 요?”
“다른 사람들,쉽게 말해 일반인들 을 깔보는 오만방자한 재벌 2세거
드 ”
“재수 없는 놈이네요.”
안유천이 눈살을 찌푸린 순간 이규 한이 덧붙였다.
“혹시 스카이 엔터테인먼트 김기현 대표,알아?”
“물론 알죠.”
“어떻게 알아?”
“김기현 대표 아버지가 씨제스 엔 터테인먼트 김대환 대표잖아요. 저 도 김기현 대표에 대한 소문을 들어 봤죠.”
“어떤 소문을 들었는데?”
“엄청 재수 없다는 소문이요.”
이규한이 픽 하고 실소를 터트린 순간 안유천이 다시 미간을 찌푸린 채 지적했다.
는 것 같은데요?”
“이번엔 삼천포로 빠지는 것 아냐. 의도적으로 김기현 대표 이야기를 꺼낸 거야.”
‘베테랑들’이란 작품에서 유아현이 맡아서 연기해야 할 극중 배역인 재 벌 2세에 대해 안유천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이런 고민을 한 끝에 이규한이 퍼 뜩 떠올린 것이 김기현이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김기현과 비 숫한 면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네 말대로 재수 없는 놈이야. 어 떤 일이 있었느냐면…… 이규한이 김기현과의 사이에 있었 던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듣고 있던 안유천의 낯 빛이 점점 달아올랐다.
“그냥 재수 없는 놈이 아니라,인 간 말종인데요.”
안유천의 평가를 들은 이규한의 입 가로 미소가 번졌다.
“비슷하게 그릴 수 있겠어?”
“막 열정이 불타오르는데요.”
“응?”
“인간 말종이 아주 처절하리만치 당하도록 한번 써 보고 싶다는 열정 이 생겼단 말씀입니다.”
“오케이, 너만 믿는다.”
“맡겨 두십시오. 그런데 분명히 뭐 가 빠진 것 같은데,뭘 빠트렸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나네요.”
안유천이 빠트린 것은 위약금과 관 련된 약속이었다.
‘역시 허술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이런 면이 안유천의 단점이자 매력이라고 판단하며 이규한이 덧붙였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잘 고쳐야 한 다.” 이규한이 우중완 감독을 만난 장 소.
지난번과 똑같은 호프집이었다.
약 보름 만에 다시 만난 우중완 감독은 그때보다 좀 더 표정이 어두 워진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대로 였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이규한이 묻자 우중완 감독이 한숨 을 내쉬며 대답했다.
“재미없는 영화들을 보면서 지냈습 니다.”
없었습니까?”
“‘데스매치,카운트 다운’과 ‘죽어 야 산다’,그리고 ‘생존의 법칙’이란 영화들입니다.”
? ……?"
“제가 봐도 참 재미없더군요.”
셀프 디스를 하던 우중완 감독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를 향해 이규한이 독설을 퍼부었다.
“괜히 망한 게 아니죠.”
만약 예전의 우중완 감독이었다면?
이런 독설을 듣고 참지 않았으리 라.
그렇지만 오늘 우중완 감독은 달랐 다.
“대표님 말처럼 망한 데는 다 이유 가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순히 인정하고 있는 우중완 감독 을 바라보던 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 다.
‘진짜 정신 차렸네.’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우중완 감독이 꾸벅 인사했 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그 인사를 받은 이규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갑자기 제게 감사하다는 겁니 까?”
“그날 이후, 제게 먼저 연락한 사 람. 이규한 대표님이 유일하거든요. 이렇게 위로주를 사기 위해서 연락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은 위로주를 사기 위해서 감 독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왜 저를 만나자고 하신 겁니 까?”
“기회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중완이 천재 감독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기회를 드리겠다는 뜻입니 다.”
이규한이 말을 마친 순간 탁자 아 래로 고개를 멸구고 있던 우중완 감 독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말씀은… 제게 감독으로 재기 할 기회를 주시겠단 뜻입니까?”
“조건만 맞는다면 그럴 예정입니 다.”
마음이 급하기 때문일까.
우중완 감독이 서둘러 물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