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똥고집 (2)
“저보다 경력이 풍부한 기성 감독 으로 세팅하는 게 투자를 유치하는 데 있어 용이하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양우섭 감독은 아직 입봉하지 못한 신인 감독.
신인 감독보다 기성 감독에게 연출 을 맡기는 편이 투자 유치에 용이하 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 “두 번째 조건도 수용하실 수 있겠 습니까?”
이번에는 아까처럼 빨리 대답이 돌 아오지 않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거듭하던 양우섭 감독이 한참 만에 입을 됐 다.
“…수용하겠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다.
어떻게든 ‘변호사 송성문’이란 작 품을 세상에 내놓고 싶다는 양우섭 감독의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제가 내건 조건 들을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 신 ‘변호사 송성문’이란 작품이 세 상에 빛을 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그 의지를 확인한 이규한이 양우섭 감독에게 약속했다.
로터스 엔터테인먼트 투자팀 사무 실.
이규한이 들어서자마자 권지영 팀
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대표님!”
반갑게 손을 들고 앞으로 다가오던 권지영이 잠시 후 표정을 굳혔다.
“서운합니다.”
불쑥 서운하단 말을 꺼내는 권지영 을 확인한 이규한이 픽 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권 팀장,하나만 하자.”
“네?”
“반가워하다가 서운해하다가 하지 말고 둘 중 하나만 하자고.”
이규한이 핀잔을 건네자 권지영이 멋쩍은 표정으로 변명했다.
“반갑긴 한데, 서운하기도 한 걸 어쩌겠어요.”
“이유는?”
“투자 문제 때문에 저희 로터스 엔 터테인먼트를 찾아 준 게 반갑기는 한데,‘스파이들’ 때문에 서운하기도 합니다.”
“‘스파이들’ 때문에 서운하다고? 왜?”
“제가 아까 확인해 보니까,‘스파 이들’의 관객수가 칠백만을 넘었더 라고요.”
“간신히 넘겼지.”
이규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개봉 첫날부터 다른 작품들과 압도 적으로 격차를 벌리면서 박스 오피 스 1위를 질주했던 ‘스파이들’은 어 제 700만 관객 동원을 돌파했다.
이규한이 심히 우려했던 것이 멋쩍 게 느껴질 정도의 흥행세.
“저희와 작업했던 ‘사관,왕을 만 든 남자’보다 NEXT 엔터테인먼트 와 작업한 ‘스파이들’의 흥행 성적 이 더 좋은데 제가 어찌 서운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비로소 권지영이 서운한 기색을 감 추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간파한 이 규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몰랐어.” “뭘 몰랐단 말씀이세요?”
“내가 신도 아닌데 어느 작품이 더 흥행할지 어찌 알 수 있겠어?”
“그렇긴 하지만……
못내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권지영에게 이규한이 재빨리 덧붙였 다.
“나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어. 그래서 이렇게 권 팀장을 찾아온 거 잖아.”
“NEXT 엔터테인먼트보다 로터스 엔터테인먼트를 먼저 찾아왔다는 말 씀이시죠?” “잘하셨어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조강지처가 최고거든요.”
“조강지처란 표현은 좀……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이규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탁했다.
“커피 한 잔 줘.”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 커피는 물 론이고 케이크까지 준비해 뒀으니까 회의실로 들어가시죠.”
“아까 권 팀장이 한 말이 맞네.”
“ …?"
“조강지처가 최고란 이야기 말이 야.”
잠시 후,이규한과 권지영은 회의 실에 마주 앉았다.
권지영이 양손을 모은 채 말했다.
“과연 어떤 작품을 주실지 기대가 무척 큽니다.”
“너무 기대하지 마.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니까.”
이규한이 밑밥을 깐 후,백팩에서 ‘변호사 송성문’의 시나리오 책을 꺼내서 권지영의 앞으로 내밀었다. 시나리오 책의 앞장에 적힌 ‘변호
사 송성문’이란 제목을 확인한 권지 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설마… 이 작품인가요?”
“맞아. 일단 보고 나서……
“볼 필요도 없어요.”
권지영이 딱 잘라 말했다.
“왜 볼 필요가 없다는 거야?”
“이미 봤거든요.”
“ ‘……?"
“저희 투자팀에 들어왔던 적 있는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이미 시나리 오 책을 검토해 봤습니다.”
‘후우!’ 이미 ‘변호사 송성문’ 시나리오 책 을 읽어 본 적이 있다는 권지영의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속으로 한 숨을 내쉬었다.
‘변호사 송성문’은 아직 제작 전이 었다.
즉,로터스 엔터테인먼트 투자 심 사에서 물을 먹었다는 뜻이었다. 그 리고 투자 심사에서 물을 먹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존재할 터였다.
“개인적으로는 말리고 싶네요.”
예상대로 권지영은 ‘변호사 송성 문’을 제작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 규한에게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 다.
“말리는 이유는?”
“정치색이 너무 짙어요.”
이것 역시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 답이었기에,이규한은 당황하는 대 신 미리 준비해 온 대답을 꺼냈다.
“시나리오 수정 과정에서 정치색은 최대한 걷어 낼 거야.”
“그게 가능할까요?”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송성문 변호사에 대해서 다루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치색이 묻어날 수밖에 없어요. 그분이 변호사 생활 을 그만두고 정치인으로 생을 마감 했으니까요. 게다가 송성문 변호사 가 예전에 맡았던 당시 사건을 집중 해서 다루다 보니,시나리오의 가독 성과 재미도 현저히 떨어져요. 한마 디로 상업 영화로서는 낙제점이란 뜻이죠.”
‘낙제점이라.’
권지영은 평소 이규한의 앞에서 극 단적인 단어의 사용을 자제하는 편 이었다.
그런 그녀가 ‘변호사 송성문’이란 작품은 상업 영화로서 낙제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
투자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증거였 다.
“일단 이유나 들어 보죠.' “무슨 이유?”
“‘변호사 송성문’이란 작품이 위험 하다는 것,그래서 제작하더라도 흥 행에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 이 대표님도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 요? 그런데 대체 왜 이 작품을 제 작하시려는 건데요?”
“방금 권 팀장이 한 말에 답이 있 어.”
" ……?"
“소재가 위험하고 흥행 가능성이 낮아서 어느 누구도 이 작품의 제작 에 선뜻 나서지 않아. 그래서 내가 제작해 보려는 거야. 불편하고 위험 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누군가는 한 번쯤 해야 하는 이야기라고 판단 했거든.”
“위험 부담을 감수할 정도로요?”
“맞아.”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 다.
“어렵겠지?”
“무슨 말씀이세요?”
“권 팀장이 나와 위험 부담을 나눠 지는 것 말이야.”
권지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던 그녀는 한참 후에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번 작품은 어렵겠습니
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이 대표님의 능력을 믿지 못 해서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변호 사 송성문’이란 작품이 너무 위험하 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는 다른 작품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결국 투자를 거절한 거지.’
이규한과 로터스 엔터테인먼트 사 이의 관계의 깊이.
결코 얕지 않았다.
‘수상한 여자’와 ‘사관,왕을 만든 남자’,그리고 ‘과속 삼대 스캔들’까 지.
여러 흥행작들을 협업해 왔기 때문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지영이 ‘변호 사 송성문’이란 작품의 투자를 단칼 에 잘라 거절한 것이 내심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이게 현실이야.’
잠시 후,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 다.
밀월 관계는 영원할 수 없듯이,제 작사와 투자 배급사 사이의 돈독한 관계도 영원할 수 없었다.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변호사 송성문’의 투자를 거절당한 순간, 이규한은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이미 투자를 거절당한 상황.
더 길게 얘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 고 판단한 이규한이 자리에서 일어 선 순간이었다.
“이 대표님,다시 한 번 말씀드릴 게요. 이번 작품을 제작하시는 것, 말리고 싶어요. 재고해 보시면 안 될까요?”
“권 팀장,이미 난 마음을 정했어.”
“그렇군요.,”
권지영 팀장이 안타까운 시선을 던 질 때,이규한이 다시 말했다.
하려는 건 아냐. 두고 봐. 내가 이 영화 꼭 흥행시키고 말 테니까.”
“이 대표,정말 미안한데 이번 작 품 투자는 어려울 것 같다. 미안해.” NEXT 엔터테인먼트 투자팀장 김 태훈과의 통화를 마친 이규한이 한 숨을 내쉬었다.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와 NEXT 엔 터테인먼트.
두 곳의 메이저 투자 배급사들은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와 이미 협업을
했던 경험이 있었다.
또,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투자 유치에 대한 기대를 내심 갖고 있었는데.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와 NEXT 엔 터테인먼트 모두 ‘변호사 송성문’의 투자에 난색을 드러내며 거절했다.
물론 아직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 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와 빅박스를 포함한 다른 투자 배급사들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 코 낙관적인 상황이라고는 볼 수 없 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두 곳의 메이저 투자 배급사에서 투자를 거절당한 상황이 니, 다른 투자 배급사들에게서 ‘변 호사 송성문’의 투자를 받는 것은 더욱 어려워져 있었다.
“투자 유치가 쉽지 않은가 보네 요.”
김태훈과 통화하던 이규한의 반응 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양우섭 감독 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쉽지는 않네요. 아니,어렵네요.”
이규한이 솔직하게 대답한 순간, 양우섭 감독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 다.
“그럼 포기해야 하는……?”
“그래서 순서를 바꾸기로 했습니 다.”
양우섭 감독의 말을 도중에 자르며 이규한이 입을 뗐다.
“현재 나와 있는 ‘변호사 송성문’ 의 시나리오 책으로는 투자를 받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래 서 일단 시나리오 수정 작업을 거친 후에 다시 투자 배급사의 문을 두드 리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 다.”
이규한이 바꾼 전략에 대해서 간단 하게 설명했다.
“어떤 식으로 수정을 하실 생각입 니까?”
양우섭 감독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큰 틀은 하나입니다. 일전에도 말 씀드렸듯이 정치색을 최대한 배제시 키는 겁니다. 그래서 우선 제목부터 바꿀 생각입니다.”
“제목을 어떻게 바꾸실 생각입니
까?”
“‘송성문’이라는 이름을 작품의 제 목에서 렐 겁니다.”
이규한의 대답을 들은 양우섭 감독 이 마뜩잖은 기색을 표정에 드러냈 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왜 곤란하다는 겁니까?”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건에 직접 참여했 던 송성문 변호사의 이름이 제목에 들어가야만, 대중들이 ‘변호사 송성 문’이란 작품이 그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 다.”
양우섭 감독이 대답한 순간, 이규 한이 틀렸다는 둣 고개를 흔들었다.
“송성문이라는 고인의 실명을 제목 에 포함시키는 것,저는 오히려 역 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합니 다.”
“영화에 대한 흥미를 반감시키니까
요.”
" …?"
“‘변호사 송성문’이라는 제목을 사 용한다면,송성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영화에 관심을 가질 겁 니다. 그렇지만 송성문이라는 이름 을 빼고 ‘변호사’라는 제목을 사용 한다면,대중들은 단순히 변호사가 주인공인 작품이라고 판단하고,영 화를 보기 위해서 더 많이 찾아올 겁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