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똥고집 ⑴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오랜만에 열린 회의의 분위기는 무 거 웠다.
이규한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변 호사 송성문’의 시나리오 책을 물끄 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때, 황진호가 길었던 침묵을 깨트렸다.
“이 대표,아니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작품 말이야. 진짜 제작할 생 각은 아니지?”
“확률은 반반입니다.”
“반반… 이라고? 절대 안 돼.”
이규한의 대답을 들은 황진호가 결 사반대를 외쳤다.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이유는 이 대표도 잘 알잖아? 정 치색이 너무 강해. 이런 영화는 고 생고생해서 제작해 봐야 흥행이 안 돼. 또,좋은 소리도 못 들으니 고 생한 보람도 없고.”
이규한이 팔짱을 꼈다.
이규한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변 호사 송성문’의 흥행 성적.
약 100만 명 수준이었다.
결국 손익 분기점을 넘기는데 실패 했고,영화도 혹평 세례를 받았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대답을 미루고 김미주를 바라보았다.
“미주 씨 생각은 어때?”
“재미없어요.”
이규한의 질문을 받은 김미주가 일 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재미가 없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 어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재미가 없 어요. 나라면 극장을 찾아가서 영화 를 본 후에 욕하고 나올 것 같아 요.”
김미주의 의견을 들은 이규한이 마 지막으로 백진엽을 바라보았다.
“백 피디 의견은 어때?”
“제 생각에 황 피디님은 전혀 쓸데 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요.”
“무슨 뜻이야?”
“어차피 이 작품은 투자가 안 붙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당연히 제작
에 들어가지도 못할 테죠.”
백진엽이 대답한 순간,황진호가 아까에 비해 한층 표정이 밝아진 채 끼어들었다.
“이 대표,잘 들었지? 다 반대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제작할 생각을 접 고……
“아니요.”
? ‘?”
“그래서 더 제작해야겠습니다.”
황진호의 낯빛이 다시 어둡게 변한 순간,이규한이 한숨을 내쉬며 덧붙 였다.
람이 없을 것 같아서요.”
“똥고집이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창 밖을 바라보던 이규한의 입가로 쓰 디쓴 미소가 떠올랐다.
아까 회의 중에 ‘변호사 송성문’을 제작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 을 때, 김미주는 똥고집이란 표현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이규한은 그녀를 탓하지 못 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규한이 ‘변호사 송성문’ 을 제작하려는 이유는 똥고집이나 불뚝 솟구친 반발심 때문이 아니었 다.
“나 때문에 제작이 무산됐어.”
만약 이규한이 ‘수상한 여자’를 제 작하지 않았다면?
‘젊어진 그녀’라는 작품의 제작을 준비하던 반딧불이 영화사는 자금난 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반딧불이 영화사에서 ‘변호사 송성 문’이란 작품을 제작해서 개봉까지 했을 터였다.
그래서일까.
양우섭 감독과 ‘변호사 송성문’이 란 작품에게 이규한은 내심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또,양우섭 감독이 블루문 엔터테 인먼트로 찾아왔을 때,운명이란 것 이 작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이규한이 ‘변호사 송성문’ 을 제작하려는 첫 번째 이유.
그리고 하나의 이유가 더 있었다.
“좋은 작품이야.”
이규한은 ‘변호사 송성문’이란 작 품을 극장에서 직접 보았었다.
좋은 작품이라고 판단했다.
작품 내에 정치색이 짙게 드리웠던 탓에 관객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혹 평 세례를 받았지만,결코 졸작은 아니었다.
한번은 되짚어 봐야 할 이전 시대 의 아픈 사건을 다뤘던 무척 괜찮은 작품이라고 이규한은 판단했다.
그런데 자신으로 인해 좋은 소재를 다뤘던,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화 가 개봉조차 못 한 것이 이규한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이규한이 변명하듯 혼잣 말을 꺼냈다.
“똥고집을 부리는 게 아냐. 나 때 문에 좋은 영화가 개봉하지 못했으 니까,내가 책임을 지려는 거야.”
커피 전문점 블루문에서 양우섭 감 독을 다시 만났다.
“결과가 나왔습니까?”
양우섭 감독은 이규한에게 기대에 찬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또,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기 때 문이야!’
‘변호사 송성문’이라는 작품을 만 들어서 세상에 내놓기 위해서 양우 섭 감독은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가 했던 노력 들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한차례 제작이 무산됐고,그 후 여 러 제작사들을 찾아가 봤지만,계속 거절을 당하는 수모 아닌 수모를 겪 었으리라.
그런 그가 마지막 기대를 품고 찾 아온 곳이 바로 블루문 엔터테인먼 트였다.
만약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마저 거 절한다면?
양우섭 감독은 더 이상 찾아갈 곳 이 없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양우섭 감독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제작사 내부에서 회의를 거쳤습니 다. 우선 황진호 피디는 ‘변호사 송 성문’ 제작에 반대 의사를 피력했습 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변호사 송성문’이란 작품의 정치 색이 너무 짙다는 이유 때문입니 다.”
이미 비슷한 의견을 여러 차례 들
었기 때문일까.
양우섭 감독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표정은 어둡게 바뀌어 있 었다.
“다음으로 백진엽 피디는 투자를 받기 어려울 거란 예측을 했습니 다.”
이런 경험 역시 많기 때문일까.
양우섭 감독은 반박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경리와 기획 피디 역 할을 겸하고 있는 김미주 씨는 시나 리오 책이 재미가 없다는 평가를 내 렸습니다.” 문 엔터테인먼트 직원들의 의견을 취합해서 알려 준 후,양우섭 감독 을 살폈다.
마지막 희망마저 물거품이 됐다고 판단한 걸까.
양우섭 감독은 낙담한 기색이 역력 했다.
“그럼… 제작이 어렵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입니까?”
잠시 후,양우섭 감독이 질문했다.
“아직 결론은 나오지 않은 상태입 니다.”
이규한이 대답하자 양우섭 감독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아까 말씀대로라면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내부 회의에서 ‘변호 사 송성문’의 제작 반대 의견이 압 도적으로 많았던 것이 사실이지 않 습니까?”
“그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는 저 이니까요.”
? …?"
“직원들의 의견은 결국 참고 사항 일 뿐입니다. 제작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은 대표인 저에게 있습니다.”
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양우섭 감독 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규한 대표님에게 결정권이 있는 데,왜 아직 ‘변호사 송성문’의 제작 에 대한 결정이 내려지지 않은 겁니 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 역시 아직 이 작품을 제작해야 할지에 대 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 다.”
이규한이 덧붙였다.
“제가 이 작품을 꼭 제작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 보십시오.”
“날 설득해 봐라.”
이런 의미가 담겨 있는 이규한의 제안을 들은 양우섭 감독은 바로 입 을 떼지 못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비로소 말했 다.
“많은 사람들이 ‘변호사 송성문’이 라는 작품을 정치색이 너무 짙다는 이유로 우려를 표하고 있다는 사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 작품을 기획한 의도는 정치 적인 이념이나 성향을 드러내기 위 함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부끄럽지만, 절대 잊혀져서는 안 될 사건을 재조명하는 것이 이 작품의 진짜 기획 의도입니다. 굳이 덧붙이 자면 사명감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명감… 이요?”
“큰아버지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건의 피해자였습니다.”
양우섭 감독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규한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필사적이었구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이규한이 잠시 후 입을 뗐다.
“이렇게 하시죠.”
“어떻게 말입니까?”
양우섭 감독이 두 눈을 빛내며 물 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작품의 제작 을 결정할 권한은 제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함께 일하고 있는 직 원들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 해 그들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
“그래서 ‘변호사 송성문’이란 작품 에서 정치색을 최대한 지울 겁니다. 대신 재미를 유발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을 포함시킬 겁니다. 그래야 투자를 받아서 개봉할 수 있을 테니 까요. 여기에 동의하실 수 있습니 까?”
양우섭 감독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 고 머뭇거렸다.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며 ‘변호사 송성문’의 시나리오 책을 집어 들었다.
잠시 후,이규한의 눈앞에 숫자가 떠올랐다.
-495,811.
‘갈 길이 멀다.’
‘변호사 송성문’의 예상 관객수를 확인한 이규한이 떠올린 생각이었 다.
저절로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변호사 송성문’의 예상 관객수는 적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입을 뗐다.
“한 가지 꼭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 다.” “무엇입니까?’ “저는 상업 영화를 제작하는 영화 제작자입니다. 그런 만큼 가장 우선 순위는 작품을 흥행시켜서 수익을 거두는 것입니다. 감독님도 마찬가 지입니다. 상업 영화를 제작하는 감 독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십 시오.”
이규한의 이야기를 들은 양우섭 감 독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그가 물었다.
“이 대표님께서 원하시는 게 정확 히 뭡니까?”
“작품 수정의 전권을 제게 주십시
예상치 못했던 제안이기 때문일까.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양우섭 감 독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이규한 이 덧붙였다.
“이게 제가 ‘변호사 송성문’이란 작품을 제작하는 첫 번째 조건입니 다.” 내키지 않는 표정이긴 했지만,양 우섭 감독은 결국 이규한이 꺼낸 첫 번째 조건을 수락했다.
그런 그가 물었다.
“아까 첫 번째 조건이라고 말씀하 셨습니까? 다른 조건도 있습니까?”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최 악의 경우에는 감독을 교체하는 상 황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변호사 송성문’의 연출을 맡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일 까.
양우섭 감독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 다.
그 반응을 확인하고 나자,이규한 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솔직하게 말해 주는 편이 나아.’ 예방 주사를 괜히 맞는 것이 아니 었다.
전혀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는 이편 이 충격이 덜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규한은 솔직히 상황을 알 려 준 것이었다.
“이유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미 감독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변호사 송성문’이란 작품은 투자를 유치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 이 높습니다. 따라서 제작자인 제 입장에서는 투자를 유치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강구할 수밖에 없습니 다. 그 방안 가운데 연출을 맡을 감 독을 교체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