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불의의 사고? (3)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기현이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이규한이 대답하자 김대환이 흥미 를 드러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세.”
“알겠습니다.”
“차는?”
“차는 됐습니다. 일단 이걸 보고 나서 말씀을 나누시죠.”
백팩에서 노트북을 꺼낸 이규한이 배지열의 사고가 발생할 당시의 영 상을 재생했다.
“검정 티셔츠를 입고 있는 남자를 잘 지켜봐 주십시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노트 북 화면을 바라보던 김대환이 잠시 후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검정색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의도 적으로 발을 뻗어 사다리를 걷어찼 고,그 충격으로 사다리가 쓰러지며 배지열이 부상을 입는 모습을 확인 했기 때문이리라.
그런 김대환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 던 이규한이 질문했다.
“어떻게 보이십니까?”
“고의성이 짙은 것 같군.”
“제 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규한이 말한 순간 김대환이 노트 북 화면에 닿아 있던 시선을 떼며 입을 열었다.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 같군. 이 걸 갖고 날 찾아올 게 아니라 경찰 서로 찾아갔어야 맞지 않은가?”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생각을 바꾸었습니 다. 한 번 기회를 드리기로.” “무슨 기회를 준단 말인가?”
“기현이를 위한 기회입니다.”
" ……?"
“한때 친구였기 때문에 이런 기회 를 드리려는 겁니다.”
이규한이 말을 마친 순간 김대환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기현이가 이 사고의 배후에 있다 는 뜻인가?”
“아직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렇 지만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고작 추측만으로……
“경찰에 신고를 하면 머잖아 배후 를 밝혀 낼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기현이를 구할 기회조차 없을 겁니 다.”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단숨에 말뜻을 이해한 김대환의 표 정은 굳어져 있었다.
“기회를 줘서… 고맙군.”
잠시 후 김대환이 감사를 표했다. 그런 그는 눈치가 빨랐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물었다.
“이런 기회를 준 대가로 내게 바라 는 게 뭔가?”
“두 가지 약속을 해 주십시오.”
“어떤 약속을 해 주길 원하는 거 지?”
“우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이규한이 알고 있는 김기현의 심계 는 무서웠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게 김기현의 본모습이었다. 그리고 이규한이 판 단하기에 김기현을 컨트롤할 수 있 는 유일한 인물은 바로 지금 마주 앉아 있는 김대환이었다.
이것이 김대환에게 이런 부탁을 꺼 낸 이유였다
“다음으로 ‘스파이들’을 제자리로 돌려주십시오.” “무슨 뜻인가?”
“이걸 보시죠.”
이규한이 미리 준비해 온 ‘스파이 들’ 촬영 현장에서 벌어진 사고 이 후 쏟아진 기사들과 댓글들을 출력 한 것을 김대환에게 건넸다.
“이건……
“기현이가 기자들을 움직인 것 같 습니다. ‘스파이들’에 비난 여론이 쏠리게 만들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내게 여론을 돌리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여론 을 돌릴 방법까지는…… “이걸 보시면 방법이 떠오르실 겁 니다.”
이규한이 김대환에게 건넨 것은 ‘스파이들’부터 새로 시작한 스태프 들과의 계약서 복사본이었다.
의아한 시선을 던지던 김대환의 두 눈에 이내 놀람이란 감정이 깃들었 다.
“‘스파이들’ 스태프들과 계약을 맺 을 때 이 계약서를 사용한 건가?”
“그렇습니다.”
“여러모로 부담이 컸을 텐데?”
“부담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런데 왜 이 계약서를 사용한 건
“부담이 생기더라도 또 조금 손해 를 보더라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습 니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가 제 신조 중 하나거든요.”
김대환이 놀란 시선을 던지고 있을 때 이규한이 물었다.
“이제 방법이 떠오르셨습니까?”
“그래.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 군.”
“그럼 제가 드린 두 가지 부탁을 들어주시는 걸로 믿고 이만 돌아가 겠습니다.”
김대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이규한이 대표실을 막 빠져나가려 한 순간이었다.
“기현이와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 까?”
이규한의 등 뒤로 김대환이 던진 질문이 따라붙었다. 그로 인해 걸음 을 멈춘 이규한이 고개를 돌리지 않 은 채 대답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후두두둑.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로비를 나온 이규한이 걸음을 멈추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양손을 주머니에 꽂고 쏟아지는 비 를 바라보며 이규한이 혼잣말을 꺼 냈다.
“잘한 선택인가?”
이번 일의 배후에 김기현이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양도윤 감독의 말처럼 경찰에 수사를 의뢰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무 죄가 없는 배지열에게 부상을
입히면서까지 자신이 제작하는 ‘스 파이들’에 타격을 주려 한 악행을 저지른 것에 대한 법의 심판을 받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규한은 결국 경찰에 수사 의뢰를 하지 않았다.
대신 김기현의 아버지인 김대환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규한이 김대환 을 찾아온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 었다.
한때 친구였던 김기현과의 친분? 의리?
그딴 이유들이 아니었다.
김대환과 만나서 담판을 짓는 것이 비난 여론의 중심에 서 있는 ‘스파 이들’이란 작품을 살릴 수 있는 유 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김기현이 법의 잣대에 의해 벌을 받는다면?
분명히 속은 후련할 터였다.
그렇지만 그사이에도 시간은 흐를 터였다. 그리고 ‘스파이들’은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으며 개봉해서 흥행에 참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김대환과 담판을 짓는다면?
김기현은 법의 잣대에 의한 심판을 피할 것이었다.
대신 ‘스파이들’은 비난 여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이사 인 김대환은 그만한 힘을 갖고 있었 으니까.
“이게… 맞아.”
이규한이 아까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입 밖으로 꺼냈을 때 쏟아지던 빗줄기가 언제 그랬냐 는 듯 잦아들었다.
한바탕 퍼부은 소나기가 그친 순간 이규한이 백팩을 맨 채 힘차게 걸음 을 옮겼다.
“멍청한 녀석.”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흐린 창 밖을 바라보던 김대환이 나직한 목 소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김기현은 이규한을 이길 자신이 있 다며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간청 했다.
내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 탁을 들어준 이유는 김기현이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김대환은 씨제스 엔터테인먼트 대 표 이사이기 이전에 자식을 둔 아버 지였다.
못난 자식이라고 해도 매정하게 손 을 놓아 버릴 수는 없었다.
천륜으로 이어진 관계였기 때문이 었다.
그렇지만 김기현이 이렇게 한심하 고 치졸한 방법까지 사용할 것은 예 상치 못했기에 더욱 실망감이 컸다.
잠시 후 김대환의 시선이 로비를 빠져나가 걸음을 옮기고 있는 이규 한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반만이라도 따라갔으면 좋았을 것 으 ” 그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화 제작사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다.
그래서 호기심과 기대가 무척 컸었 는데.
직접 만난 이규한은 김대환의 기대 를 져 버리지 않았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사적인 감정을 제어할 줄 안다?’
이규한은 아직 젊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제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김대환을 놀라 게 만든 것이었다.
점점 작아지는 이규한의 등을 바라 보던 김대환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
은 채 한마디를 더했다.
“오랜만에 욕심이 생기는군.”
〈영화 ‘스파이들’ 촬영 현장에서 발생한 사고. 무리한 촬영 일정 때 문이 아니라 단순 사고로 밝혀지 다.〉
〈영화 ‘스파이들’의 주연 배우 송 강오가 밝히는 사고 발생 당시 상 황,“무리한 일정 때문은 절대 아니 었다.”〉
〈영화 스태프들의 열악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새로운 계약서를 도 입한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이규한 대표를 만나다.〉 〈스태프들 처우 개선에 앞장선 블 루문 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한 ‘스파 이들’을 응원하는 이유〉
포털 사이트에 쏟아진 기사들의 제 목을 확인하던 이규한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파워가 있네.”
이렇게 많은 기자들을 한꺼번에 움 직일 수 있다는 것이 씨제스 엔터테 인먼트의 대표인 김대환의 영향력이 무척 크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기자 들이 움직이자 여론의 향방도 바뀌 기 시작했다.
-기사 보고 급호감 생겼음.
-다 같이 ‘스파이들’ 보러 가즈아.
-‘스파이들’ 꼭 봅시다. 이 영화가 성공해야 개선된 계약서가 현장에 정착해서 열악한 스태프들의 처우가 개선될 수 있습니다.
-하여간 기레기들이 문제야. 사실 확인도 안 하고 막 싸질러서 엄한 영화 한 편 죽일 뻔했음.
이규한이 ‘스파이들’에 호의적으로 바뀐 댓글들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 다.
NEXT 엔터테인먼트 투자팀장 김 태훈이 다가왔다.
“선배님이 촬영 현장에서 어쩐 일 이십니까?”
“촬영 재개하는 날인데 나도 얼굴 은 비춰야지. 그나저나 이 대표 너 도 참 대단하다.”
“뭐가 대단하단 겁니까?”
“뚝심이 대단해. 손실이 눈덩이처 럼 늘어나는 데도 눈도 꿈쩍하지 않 고,지열이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는 걸 보고 혀를 내둘렀다.”
“한심해서 혀를 내두르셨어요?”
“솔직히 답답했지. 굳이 저렇게까 지 할 필요가 뭐가 있나? 투자팀장 입장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뚝 심 있게 밀어붙여서 기어이 반전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존경스러울 정 도야.”
김태훈이 감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이규한이 입을 됐다.
“확신이 있었습니다.”
“어떤 확신이 있었단 거야?”
“이게 옳다는 확신이요. 또,제작비 손실을 만회하고도 남을 자신이요.”
“결과적으로는 이 대표 생각대로
됐네. 여론이 반전됐으니까.”
김태훈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촬영장에 갑자기 환호성이 터져 나 갔다.
“와아!”
“휘이익!”
이규한이 고개를 돌리자 오른팔에 깁스를 한 채 촬영장에 다시 돌아온 배지열의 모습이 보였다.
“대표님.”
“지열아,다시 돌아온 걸 환영한 다.”
이규한이 웃으며 반겨주자 배지열 이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말
했다.
“안 믿었습니다.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셨지만,정말 기다려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배지열, 아직도 날 그렇게 몰라? 다른 건 몰라도 한번 한 약속은 꼭 지키는 편이다.”
“이렇게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 다.”
“오히려 내가 고맙다.”
“ 9”
“무사히 돌아와 줘서, 또 너무 늦 지 않게 돌아와 줘서 고맙다.” 이규한이 배지열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져 주었다.
“흑흑.”
그 순간 배지열이 참고 있던 울음 을 터트렸다.
“꼭 이번 작품에 참여하고 싶었습 니다. 마지막까지 저를 포기하지 않 고, 좋은 작품에 참여할 수 있는 기 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촬영장 에 모여 있는 스태프들을 향해 외쳤 다.
“자,지열이도 돌아왔으니까 다시 촬영을 재개하겠습니다. 그동안 촬 영을 못 했던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라도 모두 똘똘 뭉쳐서 즐겁게 촬영 을 했으면 합니다. 또,다시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 경을 써 주시고요. 그럼 잘 부탁드 리겠습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