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불의의 사고? (2)
“후우.”
이규한의 결심을 바꾸기 어렵다고 판단한 걸까.
긴 한숨을 내쉰 양도윤 감독이 조 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촬영을 최대한 빨리 재개하 는 게 어떨까요? 새로운 스태프를 구해서 빨리 재촬영에 돌입하면,촬 영 중단으로 인한 제작비 손해를 최
소한으로 줄일 수 있으니까요.”
촬영을 중단한 시기가 하루 늘어나 면 그만큼 손해가 늘어나는 구조.
최소한으로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 는 배지열이 맡고 있던 역할을 대신 맡을 새 스태프를 구해서 하루라도 빨리 촬영을 재개하는 것이 최선이 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내키지 않았다.
배지열이 부상 치료를 마치고 촬영 현장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서였다.
그때 였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양도윤 감독이 석연찮은 표정으로 입을 뗐다.
“무슨 말씀입니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이번 사고 에 대해서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것 이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 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영화 관련 기자들에게 연락을 해 봤 는데,어느 누구도 연락을 받지 않 더군요.”
양도윤 감독 역시 이규한과 비슷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혹시 어떤 배후가 있는 게 아닐까 잠시 후 양도윤 감독이 덧붙인 질 문을 들은 이규한의 표정이 굳어졌 다.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아닐까?’
아까 퍼뜩 의심을 품었을 때 이규 한은 이렇게 판단했다.
그러나 양도윤 감독 역시 비슷한 의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이규한의 생각이 조금 달라졌 다.
‘진짜 배후가 있을 수도 있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이규한 이 떠올린 것은 김기현이었다.
‘확인해 볼 가치가 있어.’
이렇게 판단한 이규한이 서둘러 입 을 뗐다.
“감독님,혹시 사고가 발생한 당시 현장을 찍은 카메라가 있습니까?” 똑똑.
이규한이 병실 문을 노크한 후 안 으로 들어갔다.
“대표님.”
침상에 누워서 TV를 보고 있던 배
지열이 이규한이 들어선 것을 발견 하고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 다.
“그대로 있어.”
손을 들어 만류한 후 이규한이 침 상 앞으로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배지열이 인사했다.
“왜 감사하다는 거야?”
“수술비를 포함한 병원비 전액을 이미 납부하셨다는 것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한 겁니다.”
“그건 당연한 거야.”
“아니요. 당연한 게 아니란 것 알 고 있습니다.”
배지열은 현장 경험이 풍부한 편이 기에 방금 이규한이 당연하다고 말 한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가 사고로 부 상을 입더라도 정작 책임자라 할 수 있는 감독과 제작사 대표는 모른 척 외면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로 인해 사비를 들여 치료비를 감당하는 경우도 잦은 편이었고,심 지어 계약서에 적시된 잔금조차 받 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촬영이 중단되는 바람에 제작비가 많이 상승하게 됐으니까요.”
“지열아.”
“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야. 그 러니까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지 금 네가 할 일은 최대한 빨리 몸을 추슬러서 널 기다리고 있는 가정으 로 돌아가는 거야. 너도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배지열이 대답한 순간 이규한이 덧 붙였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현장으로 복
그 이야기를 들은 배지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복귀 안 할 생각이었어?”
“제 역할을 대신할 대체 인력을 구 하시는 것 아닙니까?”
배지열의 질문을 받은 이규한이 고 개를 흔들었다.
“만약 그러려고 했으면 진즉에 구 했을 거야.”
"
“끝까지 함께 가자.” “배지열을 대신할 대체 인력을 구 해서 최대한 빨리 촬영을 재개해야 합니다.”
‘스파이들’의 촬영이 중단되는 시 간이 늘어나면 늘수록 제작비가 기 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상황이기 때 문일까.
양도윤 감독은 물론이고 황진호와 다른 스태프들까지 모두 대체 인력 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선뜻 결정을 내 리지 못하고 계속 망설였다.
그사이에도 계속 시간은 흘렀고, 황진호는 더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새로운 스태프 후보를 구해 왔다.
“이름은 유지광. 현장 경험은 물론 이고 조감독 경험도 풍부해.”
황진호의 이야기대로 유지광의 이 력은 풍부했다.
배지열의 빈자리를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실력 있는 인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규한은 이상 하리만치 내키지 않았다.
제작자의 직감이랄까.
이건 옳은 결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든 것이었다.
그렇지만 직감에만 의존할 수는 없 는 노릇.
이규한은 ‘스파이들’의 시나리오 책을 꺼냈다.
그리고 배지열의 이름을 빼고 유지 광의 이름을 적은 후 ‘스파이들’의 시나리오 책을 집어 들었다.
이번이 마지막 감정.
잠시 후, 이규한의 눈앞에 새로운 숫자가 떠올랐다.
-571,515.
5,223,476에서 571,515로.
예상 관객수는 확 줄어들었다.
약 1/10로 줄어든 예상 관객수를 확인한 이규한은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예상 관객수가 큰 폭으로 줄어든 이유.
작품성이나 완성도의 문제가 아니 었다.
다른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규한이 판단한 다른 요인 은 영화 ‘스파이들’에 대한 부정적 인 이미지였다.
-영화도 사람이 만드는 예술입니 다. 사람을 아끼지 않는데 어떻게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요? -사람 있고 영화 있는 법이다.
-돈독이 올라서 스태프들이 죽어 나가도 모른 척하는 나쁜 제작자 새 끼. 이런 영화는 절대 봐 주면 안 됨.
-‘스파이들’이란 영화,우리 절대 보지 맙시다 배지열의 사고가 발생한 후 영화 스태프들이 처해 있는 열악한 환경 에 대해 고발하는 기사 하단에 달려 있는 댓글들이었다.
면이 분명히 존재했다.
‘스파이들’에 참여하는 영화 스태 프들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 로 좋은 조건들이 포함된 새 계약서 로 작성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계약서를 확인했던 스태프 들이 충격을 받았을 정도로 좋은 조 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배지열의 사고가 발생하 고,기사가 이런 식으로 쏟아지면서 이규한의 노력은 전혀 부각되지 못 하고 있었다.
“결국… 여론을 돌려야 해.”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면서 위기에 처한 ‘스파이들’을 살리기 위한 방 법을 고심하던 이규한이 내린 결론 이었다.
이것이 제작비가 상승되는 부담을 감수하고,배지열이 촬영 현장에 복 귀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한 이 유였다.
“꼭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양도윤 감독이 전화를 걸어온 것은 그날 저녁 무렵이었다.
잔뜩 상기된 양도윤 감독의 목소리 를 듣고서 이규한은 가벼운 사안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래서 이규한이 퇴근을 미루고 기다리고 있자,양도 윤 감독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무 실에 도착했다.
“사고 현장을 촬영한 카메라가 있 었습니다. 이게 당시 영상입니다.”
양도윤 감독은 인사도 건너뛰고 이 동식 디스크를 이규한에게 내밀었 다.
그 이동식 디스크를 받아 든 이규 한이 컴퓨터에 연결했다.
잠시 후,모니터에 사고 당시 영상 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폐공장 천장에 달려 있는 전구를 갈아 끼우기 위해서 사다리에 오르 는 배지열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사다리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면서 배지열이 바닥에 추락하는 모습도 화면에 등장했다.
눈을 질끈 감으며 피해 버리고 싶 은 장면.
그렇지만 이규한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끝까지 지켜보았다.
양도윤 감독이 이 동영상을 갖고 온 이유가 존재할 터였기 때문이었 다.
“보셨습니까?”
잠시 후 양도윤 감독이 물었다.
이규한이 고개를 흔들자 그가 마우 스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워낙 찰나의 순간이어서 놓치고 지나가셨을 수도 있습니다. 사다리 가 갑자기 균형을 잃고 쓰러지기 직
전의 장면에 주목해 주십시오.”
양도윤 감독의 말을 기억하며 이규 한이 다시 모니터에서 재생되는 영 상을 집중해서 보기 시작했다.
“저기 검정색 티셔츠를 입은 남자 보이시죠? 그 남자의 다리를 잘 보 십시오.”
‘다리?’ 이규한이 시키는 대로 검정색 티셔 츠를 입은 30대 중반 가량 되어 보 이는 남자의 다리에 집중하기 시작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규한은 양도윤 감독이 남자의 다리에 주목하라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근처를 지나던 검정색 티셔즈를 입 은 남자가 갑자기 중심을 잃은 것처 럼 비틀거리면서 사다리를 향해 다 리를 쭉 뻗는 것이 보였다.
그 충격으로 인해 사다리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장면까지 확인한 이 규한이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채 물 었다.
“누굽니까?”
“모르겠습니다.”
“모르다니 요?”
현장의 책임자는 어디까지나 감독 이었다. 그래서 이규한이 되묻자 양
도윤 감독이 역시 굳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데리고 온 스태프들에게 모 두 물어봤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
“아무래도 현장 스태프인 척하면서 몰래 들어온 것 같습니다.”
이규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양도윤 감독이 입에 올린 가능성이 가장 현실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이규한이 쓴웃음을 머금었 다.
다.
“왜 웃으십니까?”
“영화계 속설이 맞는 것 같아서
요.”
“어떤 속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작자 운명이 제목 따라 간다는 속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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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현장에 스파이가 잠입한 셈 이지 않습니까?”
비로소 말귀를 알아들은 기색이었 지만 양도윤 감독은 웃지 않았다.
여전히 굳어진 표정으로 물었다.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 동영상을 증거로 경찰에 신고를 한다면?
분명히 범인을 잡아낼 수 있을 것 이었다.
‘너무 늦지 않을까?’
그러나 이규한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경찰이 수사를 해서 범인을 잡는다 고 해서 능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 다.
또,설령 범인을 잡는 데 성공한다 고 해서 배후를 밝혀 낼 수 있을 가능성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규한이 입 을 뗐다.
“신고는 조금 미루시죠.”
“왜 신고를 미루자는 겁니까?”
“배후를 알 것 같거든요.”
“네?”
양도윤 감독이 놀란 순간 이규한이 덧붙였다.
“제게 시간을 좀 주십시오.”
올려다보던 이규한이 안으로 들어섰 다.
잠시 후,이규한이 대표 이사 비서 실 앞에 도착했다.
“이규한입니다. 김대환 대표님과 약속이 돼 있습니다.”
“네,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여비서의 뒤를 따라간 이규한이 잠 시 후 대표실로 들어섰다.
‘많이 닮았네.’
김기현과 대학 동창이었지만,씨제 스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이사인 김 대환을 직접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 음이었다.
그를 만나고 받은 첫인상은 김기현 과 많이 닮았다는 것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규한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만나고 싶었 네. 이렇게 만나서 반갑구만. 그래. 무슨 일로 날 만나자고 청했나?”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