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위로주 (2)
배지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리고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은 황진호 도 마찬가지였다.
“이 대표,아직 정산 안 끝났잖 아?”
“정산 끝나려면 아직 한참 남았
죠
‘그런데 왜?”
“이게 맞으니까요.”
“하지만……
“아니,이것도 틀렸네요.”
이규한이 쓰게 웃으며 백팩에서 서 류 봉투를 꺼냈다.
“이거 한번 봐 주세요.”
황진호가 그 서류 봉투를 건네받으 며 물었다.
“이건 또 뭔데?”
“새로 만든 계약서입니다.”
“무슨 계약서?”
황진호가 서둘러 서류 봉투 속 계 약서 초안을 꺼내서 살폈다.
잠시 후,그의 두 눈이 커졌다.
“이 대표,이거 뭐야?”
“어떻습니까?”
“그게……
“형도 제작자 출신이란 걸 깜박했 네요. 이건 지열이한테 보여 주고 평가를 들어보는 게 더 맞겠네요.”
황진호의 손에 들린 계약서 초안을 빼앗은 이규한이 배지열에게 내밀었 다.
“이거 한번 살펴봐.”
계약서 초안을 받아서 살피던 배지 열도 황진호 못지않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충 봤어? 어때?”
“스태프들의 계약서가 맞습니까?”
“맞아. 대충 살펴봤으니 알겠지만, 투자가 확정됐을 때 잔금까지 모두 지급하는 게 정산 후에 잔금을 지급 하기로 했던 이전 계약과 가장 큰 차이점이야. 그리고 또 하나 다른 점은 하루에 작업 시간을 열 시간 이내로 제한한 거야. 물론 작업 시 간은 아직 확정된 게 아냐. 여기서 한두 시간 더 줄어들거나 늘어날 수 도 있어.”
이규한이 설명을 마친 순간 배지열 이 물었다.
“이걸 왜 만드신 겁니까?” “계약서를 왜 만들었겠어? 이런 식 으로 계약하려고 만들었지.”
“진심이십니까?”
“마음 같아서는 모든 영화 촬영 현 장에서 이런 식의 계약서를 사용했 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어. 그렇지만 그건 내 개인적인 바람일 뿐이지. 내게 그만한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 는 부분부터 바꿔 나가려 해.”
? <……?"
“앞으로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제 작을 하거나,제작에 관여하는 영화 의 경우에는 모두 이 계약서로 스태 프들과 계약을 맺을 거야. 당장 ‘스
파이들’부터 시작할 생각이야.”
이규한이 계획을 밝힌 후 배지열에 게 물었다.
“혹시 더 보완했으면 하는 부분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 봐.”
“없습니다.”
“진짜 없어?”
“이렇게만 계약할 수 있다면 앞으 로 영화 할 맛이 날 것 같습니다.” 배지열이 상기된 표정으로 대답한 후 덧붙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계약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무슨 뜻이야?”
“대표님에게 너무 부담이 되지 않 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계약서를 변경하면 제 작사가 안아야 하는 리스크가 커진 다.
또,제작 기간이 길어지면서 제작 비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판단했기에 배지열이 던진 질문이었다.
“제작자인 내 부담이 늘어나는 것 은 사실이야.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는 이게 맞다고 판단하고 있어.”
제작사가 떠안아야 할 리스크가 커 지고,제작비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 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 다.
그렇지만 장점도 분명히 존재했다.
스태프들의 처우가 개선되면 촬영 장의 분위기가 좋아질 것이었기 때 문이었다.
그럼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분위 기가 촬영 현장에 자연스레 형성될 것이었고,이것은 영화의 완성도 측 면에서 플러스 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하나 더.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 는 영화의 경우,스태프들에 대한 처우가 더 좋다.” 이런 소문이 퍼지게 되면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는 영화들 에 실력이 더 뛰어난 스태프들이 몰 려들게 될 것이었다.
이것이 이규한이 장기적으로는 더 유리할 거라고 판단한 이유였다.
그때 강윤희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 다.
그것을 확인한 이규한이 서둘러 화 제를 돌렸다.
“자,재미없는 일 이야기는 이쯤하 죠. 형,인생 선배로서 결혼을 앞두 고 있는 지열이와 제수씨에게 조언 좀 해 주세요.” 그 부탁을 받은 황진호가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비운 후 입을 됐다.
“내 생각에 결혼은 방금 마신 소주 와 비슷해.”
“소주… 요?”
배지열과 강윤희가 흥미를 드러낸 순간 배지열이 설명을 더했다.
“아주 가끔씩 소주가 달 때도 있지 만,대부분은 쓰잖아. 달콤한 순간은 아주 가끔이고,결혼 생활의 대부분 은 지독히 쓰다. 이런 뜻이지.”
‘이 형도 참.’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이규한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결혼을 앞두고 기대에 가득 차 있 는 배지열과 강윤희에게 건네기에는 적절치 않은 조언이란 생각이 들어 서였다.
그렇지만 황진호를 탓하지는 못했 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니까.’
이규한도 결혼 생활을 이미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방금 황진 호의 비유가 무척 적절했다는 생각 이 들었다.
그때,황진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안 늦었어. 아닌가? 너무 늦 었나?” 배지열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황진 호가 소주잔을 들며 덧붙였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 리면 살 수 있다.”
“네?”
“피할 수 없으면 즐기기라도 해.” 호텔 지하에 위치한 단골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던 김기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위스키가 더 독하게 느껴 졌기 때문이었다.
‘쓰네.’
김기현이 위스키가 유난히 쓰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바 테이블 옆 좌 석에 앉아 있던 서지연을 힐끗 살폈 다.
칵테일을 시켰지만 입에도 대지 않 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보던 김기현이 참지 못 하고 질문을 던졌다.
“왜 나한테 말 안 하고 혼자 찾아 갔던 거야?”
“그냥요.”
“그냥?”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김기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이 아니라 불편해서겠지. 내 가 곁에 있으면 이규한과 편하게 대 화를 나눌 수 없다. 이렇게 판단했 기 때문에 일부러 내게 말을 안 하 고 찾아갔던 것 아냐?” “아마 내가 거기 찾아갈 줄은 꿈에 도 몰랐겠지. 이규한에게 잇따라 물 을 제대로 먹었는데 설마 거길 찾아 오겠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넌 이렇게 판단했을 거야. 그래서 거기서 날 만나고 난 후 더 당황했던 거고. 맞아?” 서지연은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 다.
“왜? 그 자식이 보고 싶었어? 그 래서 찾아갔던 거야?”
김기현이 재차 추궁하고 나서야 서 지연이 마침내 대답을 꺼냈다.
“네,만나고 싶었어요.”
“뭐라고?”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뭘 확인하고 싶었다는 거지?”
“내가 내렸던 선택이 과연 옳았는 지 확신이 서질 않았어요. 그래서 내 선택이 맞는가를 확인해 보고 싶 었어요.”
그 대답을 끝으로 서지연이 가방을 챙겼다.
“더 할 말 없으면 먼저 일어날게 요.”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또 뭐가 남았어요?”
“이거 받아.”
김기현이 안주머니에서 보석함을 꺼내서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백화점에 들렀다가 네 생각이 나 서 하나 샀어.”
서지연이 이 선물을 받고 기뻐해 주길 기대했는데.
김기현의 예상은 빗나갔다.
“필요 없어요.”
서지연은 보석함을 열어 보지도 않 았다.
무심한 한마디를 남긴 후 바를 빠 져나갔다.
과악.
혼자 남겨진 김기현이 보석함을 힘 껏 움켜쥐었다.
“필요… 없다고?”
아버지,그리고 서지연까지.
더 이상 그들에게 필요 없는 존재 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든 순 간,김기현이 위스키 잔을 들어 단
숨에 비웠다.
그런 김기현이 떠올린 것은 이규한 이었다.
“그 자식 때문이야.”
이 모든 것이 이규한 때문인 것처 럼 느껴졌다.
“더 늦기 전에 바로잡아야 해.” 김기현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열등감이라는 단어.
자신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단어라 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김기현은 이규한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실이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화가 났다.
또,기분이 더러웠다.
“날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 주 지.”
김기현이 이를 악물고 혼잣말을 꺼 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새 사무실.
기존에 사용했던 사무실과는 몇 가 지 차이점이 있었다.
우선 임대료를 낼 필요가 없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의 새 사무실 이 들어선 청월빌딩의 주인이 이규 한이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 차이점은 사무실의 넓이였 다.
기존에 사용했던 사무실에 비해서 새로 이전한 사무실은 약 세 배 이 상 넓어졌다.
황진호와 백진엽을 새로 직원으로 들인 후,네 명이 함께 기존의 사무 실을 사용할 때는 복작복작한 느낌 이 들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휑하단 느낌이 들 정도였다.
마지막 차이점은 대표실의 유무였 다.
이규한은 리모델링 과정에서 대표 실을 새로 만들었다.
드르륵.
대표실 책상 앞에 앉은 이규한이 서랍을 열었다.
“이제 ‘스파이들’에 집중할 때이 다.”
‘사관,왕을 만든 남자’와 ‘스파이 들’의 연출을 모두 양도윤 감독에게 맡기기로 결정하면서,‘스파이들’의 제작 일정은 자연스레 뒤로 미뤄졌 다.
그렇지만 이제 더 미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주연 배우 중 한 명인 송강오의 촬영 스케줄을 감안해야 했기 때문 이었다.
서랍에서 메모지를 꺼낸 이규한이 적혀 있는 숫자들을 바라보았다.
-2,783,428.
-4,351,239.
-4,351,158.
“총 세 번이군:
메모지에 적혀 있는 숫자는 셋이었 다.
즉,이규한이 ‘스파이들’이란 작품 에 특수한 능력인 감정을 사용해서 예상 관객수를 확인한 횟수가 세 번 이란 뜻이었다.
가장 위에 적힌 2,783,428이란 숫 자는 배정훈 감독이 가져왔던 초고 를 감정했을 때의 예상 관객수.
그 아래 적힌 4,351,239라는 숫자 는 박한정 작가가 수정한 시나리오 를 감정했을 때의 예상 관객수.
가장 아래쪽에 적힌 4,351,158이란 숫자는 같은 조건에서 배정훈 감독 의 이름을 지웠을 경우의 예상 관객
수였다.
“상황이 또 변했어.”
‘스파이들’의 제작이 뒤로 미뤄진 사이,두 가지 상황이 변해 있었다.
우선 배정훈 감독 대신 양도윤 감 독이 연출을 맡게 됐다.
또,임동완이 ‘스파이들’ 출연을 고 사하면서 투톱 주연 가운데 한 자리 가 비어 있었다.
“감정은… 일단 뒤로 미루자.”
만약 예전이었다면 새롭게 변한 상 황에 맞춰서 감정을 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감정을 조금 뒤 로 미루기로 결심했다.
그 이유는 ‘사관,왕을 만든 남자’ 를 제작하던 과정에서의 경험에서 일종의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작품당 감정 횟수는 총 일곱 차례 뿐이야. 가능한 아낄 필요가 있어.”
이규한이 혼잣말을 꺼낸 후,30대 초중반 남자 배우들의 리스트가 적 혀 있는 서류를 펼쳤다.
유아현, 이승규,그리고 임동완.
황진호가 작성한 ‘스파이들’에서 송강오와 투톱 주연을 맡기에 적합 하다고 판단한 남자 배우들의 리스 트에 적혀 있는 이름이었다.
그 명단을 확인한 이규한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명단에 적힌 임동완의 이름을 확인 했기 때문이었다.
“왜 임동완의 이름이 여기 적혀 있 는 거지?”
호기심을 느낀 이규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실을 빠져나간 이규한이 명단 을 작성한 황진호를 찾아갔다.
“형,왜 여기 임동완의 이름이 적 혀 있는 겁니까?”
“아,그거. 임동완 측에서 먼저 연 락이 왔어.”
“어떤 연락이요?” “다시 ‘스파이들’에 출연하고 싶다 더군.”
황진호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팔 짱을 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