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억 관객 제작자-121화 (121/272)

121 화

‘예상보다 훨씬 어렵네.’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와 NEXT 엔 터테인먼트.

두 곳 모두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메 이저 투자 배급사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행 열차’

라는 작품에 투자하는 데 난색을 표 하고 있었다.

아마 다른 투자 배급사를 찾아간다 해도 마찬가지 상황이리라.

‘답답하네.’

이규한은 ‘부산행 열차’가 흥행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상황.

그럼에도 투자를 유치하는 것에 어 려움을 겪자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 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어.’

이규한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였다.

“규한 오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규한의 머릿속 생각이 딱 멈추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서지연을 발견한 이규한이 놀란 목 소리로 물었다.

“왜요? 제가 찾아오면 안 되는 자 리예요?”

“그건 아니지만……

“사무실 이전했다는 소식 듣고 축 하해 드리려고 왔어요. 이거 받으세 요.” “고맙다.”

손을 뻗어 그 화분을 건네받은 이 규한이 서지연을 빤히 바라보며 입 을 뗐다.

“소식 들었다.”

“어떤 소식이요?”

“기현이와 만난다는 소식.”

“그랬… 어요?”

“기현이가 잘해 줘?”

“네,잘해 줘요.”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

이규한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왜 하필이면 김기현이야?’

이규한은 김기현이 얼마나 치졸한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지연이 김기현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이규한이 지금 할 수 있 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속내를 감 춘 채 애써 웃고 있을 때였다.

“지연아. 네가 여기 어쩐 일이야?”

김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예고 없이 등장한 김기현을 발견한 서지연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어쩐 일이냐니까?”

“규한 오빠 사무실 이전했다는 소 식 듣고 축하해 주러 왔어요.”

서지연이 대답하자,김기현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미리 말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같이 왔을 텐데.” 김기현이 다가와 서지연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 순간 서지연이 난 감한 표정으로 움찔하는 모습이 이 규한의 눈에 들어왔다.

“축하한다.”

“찾아올지 몰랐는데?”

“명색이 친구인데 찾아와야지.”

“어쨌든 고맙다.”

이규한이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채 대답했다.

서지연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거 만하게 웃고 있는 김기현의 모습이 신경에 거슬려서가 아니었다.

마치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핏기 없는 얼굴로 서 있는 서지연의 모습 이 이규한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 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이규한이 출근하자마자 황진호가 다가왔다.

“이 대표,이거 받아.”

그가 하얀색 봉투를 건넸다.

“이게 뭡니까?”

“청첩장이야.”

“청첩장… 이요?”

이규한이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져 있는 봉투를 받아 들 생각도 못 하 고 황진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아니죠?”

“무슨 뜻이야?”

“재혼하시는 것 아니죠?”

이규한이 묻자 황진호가 비로소 말 뜻을 이해하고 픽 웃었다.

“이 대표,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 는 명언을 몸소 체험하고 돌아온 지 아직 삼 년도 안 됐다. 이제야 겨우 적응했는데 내가 다시 제 발로 무덤 으로 걸어 들어가겠어?”

“그럼 이 청첩장은 누구 건데요?”

“지열이 알지?”

“배 지열이요?”

“그래. 지열이가 결혼해. 너한테 청

첩장 전해 달라고 부탁하더라.”

배지열은 ‘사관,왕을 만든 남자’에 연출부로 참여했던 스태프였다. 그 리고 이규한이 배지열을 안 지는 꽤 오래됐다.

이규한이 막 피디로 일을 시작했을 때 배지열은 연출부 막내로 영화판 에 뛰어들었었다.

‘그게 벌써 7년 전이구나.’

기억을 더듬던 이규한이 청첩장이 들어 있는 봉투를 받아들었을 때 황 진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청첩장 전해 주시면서 왜 한숨을 쉬세요?” “속이 상해서.”

“왜 속이 상하시는데요?”

“내가 최선을 다해 말렸는데도 이 결혼을 결국 못 막았거든.”

황진호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왜 말리셨어요?”

“내가 지열이를 많이 아낀다는 것, 이 대표도 알잖아. 아끼는 후배가 제 발로 무덤으로 걸어 들어가려고 하는데,인생 선배로서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이규한이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 고 강조하는 황진호의 말에 반박하 지 못하고 쓰게 웃었다.

이미 한차례 겪어 봤기에 이규한도 알았다.

결혼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를.

“갈 거지?”

“당연히 가야죠.”

청첩장에 적혀 있는 날짜를 확인한 이규한이 대답했을 때였다.

“부조금 넉넉히 챙겨 줘.”

“축의금이 아니라 부조금이요?”

“결혼은 인생의 무덤에 들어가는 거라니까.”

황진호가 재차 강조하는 것을 들은 이규한이 참지 못하고 실소를 흘렸 을 때였다.

“특히 우리처럼 영화하는 사람은 더 그래.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으니 까. 지열이 말이야. 돈이 없어서 신 혼여행도 건너뛰었다는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지금이야 콩깍지가 끼어 서 괜찮겠지만,콩깍지 벗겨지고 나 면 생지옥이 시작될 테니까.”

황진호가 한숨을 내쉬며 덧붙인 말 을 들은 이규한이 의아한 시선을 던 졌다.

“왜 돈이 없어요?”

“지열이가 돈이 어딨어? 예식장 비 용 아끼려고 구청에서 운영하는 예 식장에서 결혼하는 것 보면 모르겠 어?”

“이번에 연출부 스태프로 참여했던 페이 받았을 것 아닙니까?”

“아직 못 받았어.”

“네?”

“돈 못 받은 건 이 대표도 마찬가 지 아냐?”

황진호가 불쑥 던진 질문을 받은 이규한의 말문이 막혔다.

‘사관,왕을 만든 남자’의 최종 관 객수는 대략 580만 명이었다.

손익 분기점을 훌쩍 넘긴 스코어.

당연히 정산이 끝나고 나면 꽤 많 은 수익금이 제작사 몫으로 들어올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아직 정산이 끝 나지 않았기에 수익금을 구경조차 못 해 본 상태였다.

‘나와 마찬가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규한이 물 었다.

“스태프들 계약은 어떻게 했습니 까?”

“관례대로 했지.”

“관례대로라면……?”

“계약금 1/3, 촬영 끝나고 1/3, 정 산 끝나면 1/3. 이렇게 계약했어.”

영화 스태프들과 계약할 때 사용하 는 가장 일반적인 계약 방식 가운데

하나였다.

제작사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이 런 계약 방식이 어느덧 관례처럼 영 화판에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그리고 ‘사관,왕을 만든 남자’의 케이스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영화가 촬영에 들어가서 개봉했고, 흥행한 덕분에 정산이 끝나고 계약 서에 적시된 페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촬영 도중에 영화가 엎어지는 경우 나 흥행에 실패해서 정산이 끝나고 잔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 수였다.

‘내가… 잘못했네.’

이규한이 자책했다.

영화계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 분노 했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 역시 그 잘못 된 관행을 답습하고 있었다는 사실 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형,결혼식 전에 지열이 만날 수 있어요?”

“가능은 한데. 왜? 아무리 생각해 도 이건 아니다 싶어?”

“네?”

“결혼 말리려고 지열이 만나려는 거 아냐?”

으며 대답했다.

“위로주나 한잔 사 주려고요.” 삼성역 근처의 일식집에서 식사를 겸한 술자리가 마련됐다.

배지열과 결혼을 앞두고 있는 강윤 희는 선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종갓집 며느리처럼 유순하고 참한 인상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윤희라고 합 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규한입니 “지열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황진호라고 해요.”

간단한 인사가 오가는 사이,이규 한이 맞은편에 나란히 앉아 있는 배 지열과 강윤희를 유심히 바라보았 다.

강윤희의 모습과 자신의 여동생인 이규리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었 다.

그사이 배지열이 황진호에게 인사 를 건넸다.

“황 대표님,축하주 사 주시려고 이렇게 따로 자리까지 마련해 주셔 서 감사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황진호가 손사래 를 쳤다.

“다 틀렸어.”

“네?”

“우선 황 대표가 아냐. 나 요새 피 디다.”

“아,자꾸 깜박하네요. 죄송합니 다.”

“그리고 축하주 아냐. 엄연히 위로 주야.”

“위로주… 요?”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면,내가 왜 위로주라고 하는 건지 알게 될 거야.”

“……?"

“그리고 오늘 위로주는 내가 사는 거 아냐. 이 대표가 자리 한번 만들 어 달라고 부탁해서 난 연락만 한 거야.”

그제야 오늘 자리를 마련한 것이 이규한임을 알아챈 배지열이 인사했 다.

“대표님,감사합니다.”

“겨우 밥 한 번 사는 것뿐이야. 그 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먹어. 제수 씨도 편하게 드세요.”

식사와 함께 술잔이 오갔다. 그리 고 강윤희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 리를 비운 순간,이규한이 안주머니 에서 꺼낸 봉투를 배지열에게 내밀 었다.

“이거 받아.”

“이게… 뭡니까?”

배지열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인센티브야. 그걸로 신혼여행 꼭 다녀와.”

이규한이 대답하자 배지열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괜찮습니다."

“제수씨는 안 괜찮아.” “평생 한 번뿐인 신혼여행이야. 네 사정이 뻔하다는 것을 알아서 괜찮 다고 말했겠지만,신혼여행 못 가게 되면 평생 한으로 남을 거야. 그러 니까 군말하지 말고 그 돈으로 제주 도라도 갖다 와. 내 말 알아들었 지?”

이규한이 알아듣도록 설명했음에도 배지열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뭐가 마음에 걸려?”

“그게… ‘스파이들’ 촬영 준비 때 문에요.” 배지열이 대답한 순간,이규한이 황진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형,촬영 준비하는 일정이 빡빡해 요?”

“뭐,좀 급하게 촬영이 들어가는 편이라서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긴 한데……

“지열이가 없으면 안 돌아갈 정도 입니까?”

황진호는 대답 대신 되레 질문을 던졌다.

“이 대표, 군대 갔다 왔지?”

“물론입니다.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습니다.” “그럼 잘 알겠네. 내가 휴가 가거 나 전역하면 군대가 안 돌아갈 것 같지만,어때? 내가 전역한 지금도 군대는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잖아. 마찬가지야.”

“상관없다는 뜻이죠?”

“아무 상관 없어.”

황진호가 호쾌한 목소리로 대답한 순간,이규한이 배지열을 바라보았 다.

“들었지?”

“네? 네.”

“이제 마음에 걸릴 것도 없어졌으 니까 편하게 다녀와.”

“알겠습니다. 그리고… 신경 써 주 셔서 감사합니다.”

배지열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 현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고개를 흔들었 다.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

“대표님께서 왜……?”

“진즉에 스태프들 처우에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그렇게 하지 못해서. 수일 내에 잔금 입금될 거야.”

“네? 결혼 자금 때문이라면 그렇게 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 아냐. ‘사관,왕을 만든 남자’에 참여했던 모든 스태프들에게 잔금을 지급할 거야.”

1억 관객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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