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억 관객 제작자-120화 (120/272)

120화

사무실 이전 (2) ‘내가 이규한보다 못하다?’

김기현이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증명할 기회를 한 번 더 달라?”

“네.”

“한 번 더 기회를 준다고 해도 달 라질 게 없을 것 같은데?”

“분명히 달라질 겁니다.”

김기현이 힘주어 대답한 순간 김대 환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 다.

후르릅.

차를 한 모금 마신 김대환이 입을 뗐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마.”

“감사합니다.”

“만약 이번에도 패한다면 인정하거 라.” “알겠습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에 김기현이 안도하고 있을 때,김대환 이 충고를 건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겨 라.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이니까.” -영화 제작사 블루문 엔터테인먼

트.

새로 제작한 간판이 청월빌딩 2층

에 걸렸다.

이규한이 그 간판을 올려다보고 있 을 때 장준경이 옆으로 다가왔다.

“사무실 이전 축하한다.”

“고마워.”

“어쩌다 보니 이웃사촌이 됐네.” 장준경의 말대로였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이전한 새 사무실.

원래 헤어팡팡이란 미용실이 입점 해 있었던 사무실이었다. 그리고 빅 스빅 픽처스의 바로 옆 사무실이기 도 했다.

임대료 못 받을까 봐 걱정돼서 사

무실 이전한 거야. 지근거리에서 감 시하려고.”

이규한이 농담을 건네자 장준경도 웃으며 화답했다.

“독한 놈. 괜히 건물주가 된 게 아 니네.”

“앞으로 이웃사촌이 더 많이 늘어 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좋은 영화를 제작할 역량을 갖추 고 있지만,형편이 어려운 영화 제 작자들에게 사무실을 임대해 줄 생 각이 거든.”

를 장준경에게 밝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멋진 놈 이네.”

장준경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한 순 간 이규한이 멋쩍게 웃었다.

“그걸 이제야 알았어?”

장준경에게 대꾸한 이규한이 손님 을 맞이하기 위해서 2층으로 올라갔 다.

새로 이전한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의 사무실 앞에는 축하 화환과 화분 들이 잔뜩 도착해 있었다.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와 NEXT 엔 터테인먼트를 비롯한 국내외 투자 배급사들은 모두 축하 화환을 보내 주었다.

그중 이규한의 시선을 잡아 끈 것 은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의 김대환 대표가 보낸 화환이었다.

‘광안리’와 ‘사랑이 운다’.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와 배급을 맡았던 두 작품은 블루문 엔 터테인먼트가 제작했던 ‘수상한 여 자’와 ‘사관,왕을 만든 남자’와의 맞대결에서 패하면서 홍행 부진을 겪었다.

투자팀 직원들의 인사이동이 발생 했을 정도의 흥행 참패.

화환을 보내지 않을 거라고 막연히 짐작했었는데.

그 예상이 빗나간 셈이었다.

이규한이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보낸 화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 을 때였다.

“서운합니다.”

권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권 팀장이 여긴 어쩐 일이야?”

이규한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지만 권지영은 오히려 되물었다.

“제가 여기 온 게 이상한가요?”

“당연히 이상하지.”

이규한이 대답했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메이저 투자 배급사의 팀장인 권지영이 일개 제 작사가 사무실을 이전한 곳에 찾아 오는 것.

극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안 바빠?”

“당연히 바쁘죠.”

“그런데 왜 왔어?”

“아무리 바빠도 블루문 엔터테인먼 트가 사무실을 이전하는 날인데 당 연히 찾아와서 축하해 드려야죠.”

“좀 부담스러운데?”

“그럼 감시 차원이라고 생각하세 요.” “감시… 차원이라니?”

“이 대표님이 또 바람을 피울 수도 있으니까요.”

“바람은 무슨.”

이규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 지만 권지영은 날카로운 시선을 던 지며 추궁했다.

“애틋하시던데요.”

“갑자기 무슨 소리요?”

“씨제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보낸 화 환을 바라보던 이 대표님의 눈빛이 무척 애틋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까 서운하다고 말했던 거야?”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보낸 화 환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잖아요.”

이규한이 속으로 혀를 내두를 때였 다.

“이 대표.”

NEXT 엔터테인먼트 투자팀장 김 태훈도 도착했다.

“선배님께서는 여기 어떻게……?”

“어떻게 오긴. 사무실 이전했다는 소식 듣고 축하해 주려고 왔지.”

김태훈과 반갑게 악수를 나누던 이 규한이 자신에게 닿아 있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싸늘 한 눈빛을 쏘아 내고 있는 권지영을 발견하고 움찔했을 때 그녀가 말했 다.

“드디어 삼자대면이 이뤄졌네요.”

영화판은 좁았다.

당연히 권지영과 김태훈은 구면이 었다.

가벼운 안부 인사조차 건너뛴 두 사람은 눈싸움을 벌이듯 서로를 바 라보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엉덩이 무겁기로 소문난 권 팀장 이 여기까지 무슨 일로 찾아왔어?”

“김 팀장님도 소문이 자자하시던데 요.” ‘무슨 소문?” “투자팀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 면서 아예 살고 계시다는 소문이요. 그렇게 사무실을 좋아하시는 분이 어쩐 일로 여기까지 찾아오셨어요?” “겸사겸사 찾아왔지.”

“겸사겸사요?”

“이 대표 사무실 이전한 것 축하도 해 줄 겸,작품 이야기도 나눌 겸 해서 찾아왔어.”

“‘스파이들’이요?”

“‘스파이들’ 말고 다른 작품.”

“어떤 작품이요? 설마 이규한 대표 님이 NEXT 엔터테인먼트와 다른 작품도 투자 계약을 체결하셨나요?”

“아직 아냐. 그래서 오늘 만난 김 에 얘기해 보려고.”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거야?”

“저희가 먼저거든요.”

“대기표라도 미리 받아 뒀어?”

“그건 아니지만……

“경쟁은 공정하게 하자고.”

김태훈과 권지영은 팽팽하게 대치 했다.

이규한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난감 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이 대표님이 말씀해 보세요.”

권지영이 도움을 요청했다.

“내가 뭘 말하란 거야?”

“다음 작품. 당연히 로터스 엔터테 인먼트와 같이하실 거죠?”

“다음… 작품?”

이규한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스파이들’과 ‘베테랑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준비하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스파이들’은 이미 NEXT 엔터테 인먼트와 투자 계약이 체결되어 있 는 상황이었고,‘베테랑들’도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와 투자 계약이 체결되 어 있었다.

그런데 권지영과 김태훈은 다음 작 품을 각각 자신이 근무하는 투자 배 급사와 계약해야 한다고 앞다투어 말하고 있었다.

‘따로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없는 데 어떻게 투자 계약을 체결한단 말 인가?’

이것이 이규한이 난감한 표정을 지 은 이유였다.

그러나 권지영과 김태훈은 이런 이 규한의 속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왜 대답이 없으세요? 저희랑 하실 거죠?”

“이 대표,우리랑 할 거지?”

권지영과 김태훈이 앞다투어 대답 을 재촉했다.

그로 인해 이규한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복도로 걸어 나오는 백진엽의 모습 이 보였다.

그 순간,이규한의 머릿속에 하나 의 작품이 떠올랐다.

“아까 경쟁은 공정하게 해야 한다 는 선배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저 는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쪽과 투자 계약을 체결하는 게 맞다고 생 각합니다.”

제발 내가 준비하고 있는 작품에 투자 좀 해 달라고 투자사로 찾아가 서 매달리던 게 잊그제 일 같은데.

지금은 투자 배급사를 고르는 입장 으로 바뀌어 있었다.

‘인생 몰라!’

이규한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다시 입을 뗐다.

“참고로 저희가 준비하는 다음 작 품은 ‘부산행 열차’입니다.”

그 말이 끝난 순간 권지영과 김태 훈이 동시에 말했다.

“그 작품은 절대 안 됩니다.” “이 대표,딴 건 없어?”

‘인천행 버스’.

백진엽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맡았던 단편 영화였다.

그 단편 영화를 보고 난 후,이규 한은 백진엽에게 두 가지 충고를 건 넸다.

“왜 버스입니까? 왜 하필 공간 배 경으로 버스를 선택했느냐고 물은 겁니다. 기차가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한 번 출발하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 급행 기 차를 탔다고 가정하면 더 긴박함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럼 엔진 과열 로 시동이 꺼져서 인류가 멸망하는 ‘인천행 버스’처럼 허무한 결말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꼭 인천행일 필요는 없죠. 너무 빨리 도착하니까요.”

당시 이규한이 던졌던 두 가지 충 고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백진엽은 그 충고들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작품의 공간 배경이 버스에 서 기차로 바뀌었고,목적지도 인천 에서 부산으로 바뀌었다.

자연스레 제목도 ‘인천행 버스’에 서 ‘부산행 열차’로 바뀌었다.

그리고 바뀐 것은 제목과 설정만이 아니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한 후 백진엽은 이규한과 자주 대화하면서 ‘부산행 열차’의 시나리오를 꾸준히 수정했다.

단편 영화에서 장편 영화로 탈바꿈 한 ‘부산행 열차’의 시나리오 초고 가 완성된 순간 이규한은 감정을 했 었다.

-2,159,443.

당시 이규한의 눈앞에 떠올랐던 숫 자였다.

2,159,443명의 예상 관객수를 확인 한 순간,이규한은 짙은 아쉬움을 느꼈다.

이규한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부 산행 열차’의 관객수.

천만 관객을 훌쩍 넘겼었기 때문이 었다.

그에 비해 예상 관객수가 약 1/5 밖에 되지 않았기에 이규한은 무척 아쉬움을 느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실망하기는 일렀다.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여러 변 수들로 인해 예상 관객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래서 이규한은 ‘부산행 열차’의 시나리오 초고를 로터스 엔터테인먼 트와 NEXT 엔터테인먼트에 보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권지영과 김태 훈은 모두 ‘부산행 열차’의 시나리 오 초고를 본 상황이었다.

“아까는 분명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에서 제작을 준비하고 있는 후속작 과 투자 계약을 체결하고 싶다고 했 었잖아?” 이규한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하자, 권지영이 바로 손사래를 쳤다.

“‘부산행 열차’는 절대 안 됩니다.” 단호한 권지영을 확인한 이규한이 고개를 돌려서 김태훈을 바라보았

다.

“이 대표, ‘부산행 열차’는 진짜 아 니다.”

김태훈 역시 뜻을 굽히지 않았다.

“후우.”

그 반응들을 확인한 이규한이 한숨 을 내쉬었다.

‘부산행 열차’는 천만 영화가 될 가능성이 무척 높은 작품이었다. 그 런데 메이저 투자 배급사들인 로터 스 엔터테인먼트와 NEXT 엔터테인 먼트는 약속이라도 한 둣 투자에 난 색을 표하고 있었다.

‘줘도 못 먹네., 이규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권지영과 김태훈을 탓하 기도 어려웠다.

그들이 ‘부산행 열차’의 투자에 난 색을 표하는 이유가 짐작이 갔기 때 문이었다.

‘부산행 열차’의 주요 소재는 좀비.

그리고 충무로에는 인간 이외의 생 명체가 등장하면 대부분 망한다는 속설 아닌 속설이 존재했다.

좀비도 엄연히 인간이 아닌 생명 체.

이것이 권지영과 김태훈이 ‘부산행 열차’에 투자를 꺼리는 첫 번째 이 유였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제작비였다.

좀비 영화인 만큼 단역 배우 및 엑스트라들이 많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또,CG도 많이 필요했다.

그런 만큼 제작비가 사극 못지않게 많이 든다는 점이 권지영과 김태훈 이 ‘부산행 열차’ 투자를 꺼리는 두 번째 이유였다.

1억 관객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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