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전투 회식 (2)
“이 대표,너무 무리하는 것 아 냐?”
메뉴판에 적힌 가격표를 이미 확인 한 황진호에게서 돌아온 반응이었 다.
“이제 마음이 조금 풀리네요. 확실 히 간짜장 사 주고 생색내던 램프 엔터테인먼트 박태혁 대표보다는 좋 은 대표님이세요.”
“자주 놀러 오세요. 조금 더 보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백진엽에게서 돌아온 반응이었다.
그 반응들을 확인한 이규한이 차례 로 대답했다.
“형. 제가 이래 봬도 조물주보다 더 대단하다는 건물주입니다. 무리 하는 것 아니니까 오늘은 마음껏 드 세요. 그리고 미주 씨,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태혁 대표랑 비교하면 내 가 좀 서운하지. 마지막으로 백 피 디,그래도 내가 명색이 블루문 엔 터테인먼트 대표인데 자주 놀러 오 라는 표현은 좀 그렇지 않아?”
그 말을 끝으로 이규한이 본격적으 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자,다 같이 한잔하시죠.”
이규한이 직원들의 잔을 차례로 채 워 준 후,앞에 놓여 있던 자신의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그동안 회사에 신경을 너무 못 써 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너그러이 이 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 로는 회사에 더 신경 쓰겠습니다.”
채앵.
건배를 한 후 잔을 비우고 채우기 를 반복하길 한참.
이규한이 술잔을 들며 황진호에게 물었다.
“형,촬영은 순조롭죠?”
“그래. 별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어. 양도윤 감독이 촬영 현장을 장악하 는 카리스마가 있더라고. 평소 때 모습과 촬영장에서의 모습이 전혀 달라.”
“그래요?”
은행원처럼 단정하게 정장을 입고 있던 양도윤 감독이 촬영 현장에서 는 어떤 모습일지 이규한이 상상하 고 있을 때였다.
“다음 주에는 촬영이 끝날 거야.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 다.”
이규한이 대답했을 때였다.
“어?”
황진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저기 김기현 대표 아냐?”
“김기현… 이요?”
이규한이 고개를 돌려서 황진호의 시선이 향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마침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김기현 과 이규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 서 일어선 김기현이 이규한 일행이 모여 있던 탁자 앞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다.”
“그래. 오랜만이네.”
이규한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대답 한 순간, 김기현이 블루문 엔터테인 먼트 직원들을 힐끗 살핀 후 물었 다.
“누구야?”
“우리 회사 직원들.”
이규한이 대답하자 김기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수상한 여자’가 흥행한 덕분이 지.”
이규한이 ‘수상한 여자’를 입에 올 린 순간,김기현의 표정이 슬쩍 일 그러 졌다.
‘수상한 여자’와 맞대결을 펼쳤던 ‘광안리’가 흥행 참패를 한 것이 떠 올랐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김기현은 애써 평온한 표 정을 지은 채 부탁했다.
“소개 좀 시켜 줘.”
“여기는 진호 형,얼마 전까지 제 작자로 일하다가……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의 직원들을 차례로 소개하는 것을 듣던 김기현 이 냉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이규한 은 그가 냉소를 머금은 이유를 짐작 할 수 있었다.
제작자로 망하고 난 후,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에 피디로 입사한 황진호,뜬구름만 잡는 무능한 피디 백진엽,단순 경 리 직원 김미주.
이렇게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회식이라도 하는가 보네?”
“맞아.”
“잘 만났네. 만난 김에 회사 주소
좀 알려 줘,
“회사 주소는 왜?”
“사사회 티켓 보내려고.”
“시사회 티켓?”
이규한이 의아한 시선을 던지자 김 기현이 설명했다.
“‘사랑이 운다’ 개봉이 얼마 안 남 았거든.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시사회를 열 텐데 초청장을 보내려 고.”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사랑이 운다’의 제작사는 김기현 이 이끌고 있는 스카이 엔터테인먼
트가 아니었다.
비록 눈속임이기는 해도 엄연히 사 거리 픽처스에서 제작한 작품이었 다.
그렇지만 김기현은 더 이상 ‘사랑 이 운다’의 제작에 본인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 들지도 않았 다.
“자신 있나 보지?”
“배정훈 감독이 신인 감독이긴 해 도 실력이 있더라고.”
“아직 멀었네.”
“뭐?”
평가와는 정반대란 뜻이야.”
“무슨 뜻이야?”
“만약 배정훈 감독이 그렇게 실력 이 뛰어난 감독이었다면,내가 그렇 게 쉽게 계약을 해지했을까?”
“렛기고 나니 속이 쓰려? 그래서 애써 배정훈 감독을 깎아내리려는 건가 보지?”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네 말대로 두고 보면 알겠지.”
눈싸음을 하듯 매섭게 노려보면서 김기현이 다시 물었다.
“당연히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줄 거지?” “아무래도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 아.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개봉 을 앞두고 있는 작품의 촬영이 막바 지 단계라서 바쁘거든.”
“그래? 아쉽네.”
“너무 아쉬워할 것 없어. 내가 주 시하고 있을 테니까.”
“ ‘……?"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에서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 ‘사관,왕을 만든 남 자’와 ‘사랑이 운다’의 개봉 시기가 비슷할 것 같더라고. 경쟁작인데 당 연히 주시해야지.”
“재밌겠네.”
“그러게.”
김기현의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 다.
그렇지만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 어 있었다.
억지웃음을 짓고 있다는 게 확연히 표가 날 정도였다.
잠시 후,김기현이 말했다.
“내가 딱히 해 줄 건 없고,여기 계산은 내가 해 줄게.”
“그럴 필요……
이규한이 거절의 말을 꺼내던 도중 에 입을 다물었다.
김미주가 옆구리를 손으로 찔렀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 그녀에게 이규한이 의아한 시 선을 던질 때 김미주가 고개를 흔들 었다.
김기현이 방금 한 제안을 거절하지 말라는 듯이.
그사이,김기현이 덧붙였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거절할 타이밍을 놓쳐 버린 이규한 이 김미주를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왜 말렸어?”
“싫어하잖아요.”
“응?”
“김기현 대표,싫어하시잖아요.”
“그건 어떻게 알았어?”
“저도 눈치라는 게 있거든요.” 김미주가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서 복수해 드리려고요.”
“복수… 라니?”
이규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을 짓고 있을 때,김미주는 설명하 는 대신 백진엽을 바라보았다.
“기회가 왔어요.”
“무슨 기회요?”
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중명할 기회요.”
“……?"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
“내 위대함을 보여 주란 뜻인가 요?”
“바로 그거예요.”
“그거라면 맡겨 두세요.”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 거 야?’
이규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을 짓고 있을 때,김미주가 벌떡 일 어섰다.
“갑자기 왜 일어나?” “준비 좀 하고 올게요.”
“준비… 라니?”
“복장이 불량해서요.”
그 말을 끝으로 김미주가 고기집을 빠져나갔다.
‘대체 뭐가 불량하다는 거지?’
이규한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김미주가 다시 고기집으로 돌아 왔다.
그런 그녀를 향해 고기집 안 손님 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원래 입고 있던 스커트를 벗어던진 김미주가 눈에 확 띄는 꽃무늬 몸빼 바지를 입고 고기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지고 있었지만,김미주는 전혀 개의치 않 았다.
보무도 당당하게 일행이 앉아 있던 탁자로 돌아왔다.
“미주 씨,그 바지는 뭐야?”
이규한이 화려한 꽃무늬 몸빼 바지 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질문했을 때,김미주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전투복이요.”
“전투… 복?”
김미주는 더 설명하는 대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백진엽을 향해 물었
“준비되셨죠?”
“아까부터요.”
“그럼 시작하죠.”
김미주가 번쩍 손을 들며 소리쳤 다.
“여기 등심 10인분 추가요.” 강남역 인근 포장마차에서 2차가 시작됐다.
“안주도 나왔으니 한 잔 받으시
백진엽이 소주병을 들어 올린 순 간,이규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며 물었다.
“아직 더 들어갈 배가 남았어?”
“원래 술배는 따로 있는 법이죠.”
“미주 씨는 괜찮아?”
“끄떡없습니다.”
여전히 전투복(?)을 고수하고 있던 김미주가 웃으며 물었다.
“아까 김기현 대표가 계산할 때 표 정 보셨죠?”
“봤어.”
“좀 통쾌하셨나요?” “그래. 아주 잘했다.”
이규한이 픽 하고 실소를 터트리면 서 아까 고기집에서의 기억을 떠올 렸다.
“방금 얼마라고 했습니까?”
계산을 하기 위해서 카운터 앞에 서 있던 김기현은 당황한 기색이 역 력 했다.
총 38인분.
이규한 일행이 먹어 치웠던 한우 등심의 양이었다.
최고급 한우집인 만큼 등심 1인분 의 가격은 4만 원에 가까웠다.
이규한 일행이 먹어 치운 등심의 가격만 150만 원에 육박했으니,김 기현도 계산하는 과정에서 당황한 것이었다.
‘후회란 항상 늦는 법이지.’
그 기억을 떠올리던 이규한의 입가 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짙어졌을 때,김미주가 잔을 들며 말했다.
“축하드려 요.”
“갑자기 뭘 축하한다는 거야?”
“능력 있는 직원들을 데리고 계신 걸요.”
김미주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참 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능력이 뛰어난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네.”
“뭐가 확실한데요?”
“위대한(?) 직원들이라는 것.”
이규한이 기분 좋게 소주잔을 비웠 을 때 황진호가 물었다.
“김기현 대표에게 한 방 먹이고 나 니까 속이 시원해?”
“아직 멀었습니다. 겨우 잽 한 방 날린 것에 불과하니까요.”
“이게 잽이다?”
“이제 회심의 카운터펀치를 날릴 차례입니다.”
“회심의 카운터펀치는 뭔데?”
이규한이 대답했다.
“영화 제작자들 간의 승부는 작품 으로 가려야죠.” 로터스 극장 강남점.
개봉을 앞둔 ‘사관,왕을 만든 남 자’의 시사회가 열리는 극장 내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수상한 여자’의 시사회가 열렸을 때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몰려 있는 시사회장을 이규한이 살피고 있을 때 권지영이 다가왔다.
“손님 많이 왔네요.”
“왜 이렇게 많이 찾아온 거지?” “이규한 대표님 때문이죠.”
“나 때문이라고?”
“‘과속 삼대 스캔들’부터 ‘청춘,우 리가 가장 빛났던 순간’,‘수상한 여 자’까지. 잇따라 흥행 작품을 제작 하거나 제작에 관여했던 이규한 대 표가 새로 내놓는 작품은 과연 어떤 작품일까? 이런 기대치가 높기 때문 에 시사회장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 온 겁니다.”
이규한이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판단하며 입을 뗐다.
“그 얘기 듣고 나니 부담이 팍 밀 려드네.”
“오늘도 떨리세요?”
권지영이 웃으며 물었다.
“응,떨려.”
“‘수상한 여자’의 시사회 때만큼이 요?”
“아니. 그때보다 더 떨려.”
“왜 더 떨리시는데요?”
“이번엔 흥행 여부를 정말 모르겠 거든.” “왜 이러세요? 저까지 불안해지잖 아요.”
권지영이 우려 섞인 표정을 지었 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엄살을 부린 것 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정말 작품의 홍행 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