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블랙홀 엔터테인먼트입니다.”
‘블랙홀 엔터테인먼트?’
처음 들어 보는 제작사명이었다. 그래서 이규한이 고개를 갸웃할 때 우중완 감독이 덧붙였다.
“신생 제작사입니다. 아마 들어보 신 적이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블랙홀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는 누구입니까?”
“조성운 대표입니다.”
“조성운 대표는 뭐라고 하던가요?”
“네?”
“조성운 대표는 우 감독님이 쓰신 ‘생존의 법칙’의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 어떤 평가를 내렸는지가 궁금 해서 드린 질문입니다.”
이규한이 설명을 더하고 나서야 말 귀를 알아들은 우중완 감독이 대답 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니요? 아무런 평가도 해 주지 않았다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제가 쓴 ‘생존의 법칙’ 시나리오를 읽고 난 후에 이 런저런 평가를 꽤 길게 했습니다.”
“그런데 왜 모른다고 대답했습니
까?”
“안 들었거든요.”
? ??
“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 듣 는 척만 했습니다. 그래서 조성운 대표가 어떤 평가를 했는지 모르는 겁니다.”
우중완 감독이 당당하게 대꾸한 순 간 이규한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 다.
‘이래서 망하는구나.’
영화는 잘난 감독 혼자서 만들 수 있는 작업물이 아니었다.
팀워크가 필요한 작업물이 었다.
그런데 감독과 제작자부터 이렇게 삐걱대고 있으니,‘생존의 법칙’이 흥행에 성공할 리가 없었다.
여전히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중완 감독에게 이규한이 말했다.
“굳이 ‘생존의 법칙’ 시나리오를 볼 필요가 없겠네요.”
“왜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 ,? “제가 ‘생존의 법칙’ 시나리오를 읽고 난 후,평가를 해 드린다고 해 도 귀담아듣지 않으실 것 아닙니 까?”
이규한이 마음이 바뀐 이유를 밝히 자 우중완 감독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다릅니다.”
“뭐가 다르다는 겁니까?”
“이 대표님이 해 주시는 평가는 귀 담아들을 겁니다.”
“왜 조성운 대표의 평가를 귀담아 듣지 않았으면서,제가 드리는 평가 는 귀담아들으시려는 겁니까?” 이규한의 질문을 받은 우중완 감독 이 대답했다.
“이규한 대표님은 천재 제작자이시 니까요.”
‘나는 천재로 인정한다? 그래서 내 말은 듣겠다는 뜻인가?’
우중완 감독의 대답을 들은 이규한 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다른 사람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 는 우중완 감독이 자신의 말은 귀담 아들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렇 게 생각했을 때였다.
겨! 약하시죠 j
우중완 감독이 불쑥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 감독 님은 이미 ‘생존의 법칙’이란 작품 의 연출을 하기로 계약이 되어 있다 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한 작품 더 계약하면 되죠.”
“ (y,
“천재 제작자이신 이규한 대표님과 작품을 꼭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중완 감독이 선심 쓰듯 말한 순 간 이규한이 고개를 돌렸다.
절레절레.
확인한 이규한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우 감독님과 계약은 하지 않겠습 니다.”
“왜요?”
“아직은 적당한 때가 아닌 것 같습 니다.”
이규한의 대답을 들은 우중완 감독 이 말했다.
“후회하실 겁니다.”
“무슨 후회를 할 거란 말씀이십니 까?”
“저와 계약하지 않으신 것 말입니 다.”
우중완 감독이 커피를 한 모금 마 신 후,확신에 찬 목소리로 덧붙였 다.
“지금 준비 중인 ‘생존의 법칙’이 대박 나고 나면,제 몸값이 많이 오 를 겁니다. 그래서 후회할 거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생존의 법칙’이 홍행에 성공하지 못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반대가 될 거야.’
완 감독에게 알려 줄 생각이 없었 다.
‘우중완 감독의 신작이 흥행에 실 패하는 것,내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아!’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 다.
만약 ‘생존의 법칙’마저 흥행에 실 패한다면?
우중완 감독은 세 편 연속으로 손 익 분기점을 넘기지 못하는 셈이었 다. 그리고 우중완은 상업 영화감독 이었다.
상업 영화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것 은 작품의 흥행 성적.
우중완 감독의 몸값은 오를 리 없 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와 연출 계약을 맺으려는 제작사는 더 이상 나타나 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속된 말로 우중완 감독은 본의 아 니게 백수가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백수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우 중완 감독은 자연스레 깨닫게 될 것 이었다.
본인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또,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때가 되면 얼추 시기가 맞지 않 을까?’ 이렇게 판단한 이규한이 힘주어 말 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 니다.” 안도 반,우려 반.
우중완 감독이 미팅을 마치고 돌아 간 후,장준경이 짓고 있는 표정은 안도와 우려가 반씩 섞여 있었다.
그가 안도한 이유는 영 마뜩잖아 했던 우중완 감독과 ‘베테랑들’의 연출 계약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
동시에 우려 섞인 표정을 짓고 있 는 이유는 ‘베테랑들’의 감독 선임 작업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 기 때문이었다.
“심수창 감독과 우중완 감독이 연 달아 낙마했으니 다시 원점으로 돌 아온 셈이네. 누가 ‘베테랑들’ 연출 의 적임자일까?”
장준경이 답답한 표정으로 질문한 순간,이규한이 아이스커피를 한 모 금 마신 후 대답했다.
“원점이 아냐.”
“그게 무슨 소리야?” “‘베테랑들’ 연출을 맡을 적임자는 이미 정해졌어.”
“누구로 정해졌는데?”
“우중완 감독.”
이규한이 대답한 순간 장준경이 두 눈을 치켜떴다.
“아까 네 입으로 우중완 감독과 계 약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그새 잊 어버린 건 아니지?”
그런 그가 당황한 기색으로 질문한 순간 이규한이 수긍했다.
“맞아. 내가 그렇게 말했어.”
“그런데?”
“당장은 계약하지 않겠다는 뜻이었 “우중완 감독이 ‘생존의 법칙’으로 또 한 번 흥행 실패를 경험하고 난 후에 계약할 거야. 그때가 적기라고 판단했거든.”
이규한이 설명했지만 장준경은 여 전히 제대로 이해한 기색이 아니었 다.
“왜 그때가 적기라고 판단했는데?”
“자신감을 잃을 거거든.”
이규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데스매치,카운트다운’과 ‘죽어야 산다’.
두 편의 영화가 흥행 부진을 겪었 기에 이규한은 우중완 감독이 충분 히 반성을 했고,그 과정에서 느낀 것도 많았으리라 예상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의 예상은 빗나갔 다.
우중완 감독은 아직 정신을 못 차 리고 있었다.
‘진짜 백수가 되고 나면 정신을 차 리겠지!’
상업 영화 세 번째 연출작인 ‘생존 의 법칙’까지 흥행 부진을 겪으면, 우중완 감독은 본의 아니게 백수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더 이상 아무도 감독 우중완을 찾 지 않게 되면,그때는 그도 진짜 변 할 것이었다.
그리고 이규한이 그때가 적기라고 판단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베테랑들’의 개봉 시기였다.
이규한의 기억 속 ‘베테랑들’의 개 봉 시기는 2015년이었다. 그런데 지 금 바로 촬영에 들어간다면 ‘베테랑 들’은 이르면 2013년 말,늦어도 2014년 초에 개봉하게 될 것이었다.
‘너무 빨라!’
‘베테랑들’의 개봉 시기를 가늠했 던 이규한은 기억 속보다 더 빠른 개봉 시기로 인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안리’가 개봉 시기를 너무 빨리 가져갔다가 흥행 참패를 겪는 것을 이미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우중완 감독과 계약할 생각 이야?”
장준경이 재차 던진 질문을 받은 이규한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기왕 믿은 것,마지막까지 날 믿 어 줘.”
친구이자 동료로서 곤경에 처한 장
준경을 돕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 다. 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 다.
이규한 역시 ‘베테랑들’의 공동 제 작자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기왕이면 ‘베테랑들’을 성공시키고 싶었다.
선뜻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은 걸 까.
한참을 고민하던 장준경이 물었다. “자신 있어?” “응,자신 있어.”
‘싱크로율이 점점 맞춰지고 있거
드,
이규한이 속으로 대답한 순간 장준 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네.”
“ ‘……?"
“천재 제작자를 한번 믿어 볼 수밖 에.”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이규한이 들어섰지만 김미주는 인 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미주에게 이규한이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다.
“미주 씨,그래도 내가 명색이 대 표인데 인사는 해야 하는 것 아냐?”
“아,맞구나.”
“뭐가 맞다는 거야?”
“긴가민가했거든요.”
? ……?"
“하도 오래간만에 얼굴을 보는 거 라 내가 모시고 있는 이규한 대표님 이 맞는지 확신이 안 섰답니다. 그 래서 인사를 미루고 있었죠.”
김미주가 혀를 쏙 내밀며 덧붙인 이야기를 들은 이규한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빅스빅 픽처스에서 제작하던 ‘베테 랑들’이란 작품에 의도치 않게 갑자 기 공동 제작자로 합류하게 되면서, 이규한은 한동안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계속 빅스빅 픽처스에서 상주하다 시피 하면서 ‘베테랑들’이 가진 문 제들을 해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로 인해 블루문 엔터테인먼트로 출근한 것은 무척 오래간만이었고, 김미주는 이 점에 앙심을 품은 것이 었다.
“내가 없으니까 불안했어?”
“빚쟁이한테 쫓겨서 야반도주한 게
“설령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미리 알려 줄게.”
“참 고맙기도 하네요.”
김미주가 입술을 삐죽이는 것을 바 라보던 이규한이 황진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형,별일 없었죠?”
“별일 있었지.”
“무슨 일이요?”
“다들 걱정하고 있어.”
“……?"
“왜 우리 영화의 제작자이신 이규 한 대표님은 촬영 현장에 한 번도
나타나지를 않으시는 겁니까? 혹시 우리 작품에 애정이 없거나 기대가 없으신 것 아닙니까? 이 대표가 하 도 안 보이니까,‘사관,왕을 만든 남자’의 연출을 맡은 양도윤 감독 이하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불안해하 면서 걱정하고 있어.”
비로소 말뜻을 이해한 이규한이 미 안한 표정을 지었다.
충분히 서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 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시간 내서 촬영장에 한 번 들러.”
“알겠습니다.”
이규한이 순순히 대답한 후,백진 엽을 바라보았다.
“백 피디는 어땠어?”
“꼰대 같은 대표님이 안 보이니까 편하긴 했는데… 가끔,아주 가끔 보고 싶긴 하더라고요.”
백진엽에게서 돌아온 대답을 들은 이규한이 픽 웃었다.
그동안 너무 소홀했던 것이 사실. 자책하던 이규한이 제안했다.
“오늘 회식 한번 할까요?” 강남역 인근에 위치한 최고급 한우 집.
이규한이 불루문 엔터테인먼트 직 원들의 회식 장소로 예약한 곳이었 다.
눈처럼 하얀 마블링이 촘촘하게 박 혀 있는 한우 등심이 넓적한 접시에 담겨 도착한 순간,돌아온 반응은 각각 달랐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