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남이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 얹기 (2)
“너무 과해.”
그래서 이규한이 말했지만,장준경 은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전혀 과하지 않아.” “정 마음에 걸리면 사무실 보증금 이라고 생각해. 과연 보증금으로 충 분할 정도로 수익이 날지 모르겠지 만.”
장준경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이 규한의 생각이 바뀌었다.
‘일을 하자!’
사 대 육의 수익 배분을 얻는 것 에 계속 미안해하는 것보다는,파이 를 키우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 다.
백만 원을 사 대 육으로 나눠 가 지는 것과 천만 원을 사 대 육으로 나눠 가지는 것.
분명히 달랐다.
파이의 크기가 다른 만큼 장준경에 게도 오히려 이득이 될 터였다.
‘5,261,113명.’
이규한이 감정을 통해서 확인했던 ‘베테랑들’의 예상 관객수였다.
천만 관객을 돌파했던 이규한의 기 억 속 ‘베테랑들’의 스코어와 비교 하면 아직 절반 수준이었다.
‘천만 영화를 만들자!’
그렇게 된다면 자연히 장준경의 수 익도 늘어날 터.
이규한이 결심을 굳히고 입을 뗐 다.
기왕 이렇게 된 것,심수창 감독 과 백기원 팀장이 땅을 치고 후회하 도록 제대로 한번 해 보자.” 지이잉. 지이잉.
휴대 전화가 진동한 순간 심수창이 재빨리 손을 뻗었다.
기다리고 있던 전화가 있었기 때문 이었다.
그렇지만 발신자가 이지희 작가라 는 것을 확인한 심수창이 미간을 찌 푸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 “제가 수정했던 작품,읽어 보셨나 해서요.”
“미안. 아직 못 읽었어. 내가 요새 좀 바쁘다니까.”
“네,혹시나 해서 연락드려 봤어 요.”
“읽고 나서 내가 전화한다고 했잖 아. 좀 느긋하게 기다려.”
퉁명스레 말한 후 전화를 끊은 심 수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귀찮아 죽겠네.”
교육원 제자였던 이지희에게 ‘베테 랑들’의 시나리오 수정 작업을 맡겼 었다. 그렇지만 이지희의 실력이 뛰 어나서 수정 작업을 맡겼던 것이 아 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에 수정 작업 을 맡겼었다. 그러니 심수창이 이지 희가 수정한 ‘베테랑들’ 시나리오를 읽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심수창이 실력이 형편없는 아마추어 작가인 이지희에게 ‘베테랑들’ 시나리오의 수정 작업을 맡겼던 데는 이유가 있 었다.
빅스빅 픽처스와 맺었던 연출 계약 을 파기하기 위해서였다.
“연락이 을 때가 지났는데.”
지이잉. 지이잉.
심수창이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다시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그 리고 액정을 확인했던 심수창의 표 정이 밝아졌다.
내심 기다리고 있던 장준경에게서 걸려온 전화였기 때문이었다.
“큼. 크흠.”
헛기침을 한 후,심수창이 통화 버 튼을 눌렀다.
“장 대표님,결정하셨습니까?”
수화기 너머로 장준경의 대답이 돌 아왔다.
“지금 제 사무실에서 만나서 담판 을 지으시죠.”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장준경 이 일어섰다.
“감독님,어서 오십시오.”
“언제 사무실을 옮기셨습니까?” 심수창이 새로 옮긴 빅스빅 픽처스 의 사무실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얼마 전에 옮겼습니다.”
“훨씬 더 좋네요.”
“일단 넓으니까요.”
이규한이 장준경과 대화를 나누는 심수창 감독을 유심히 살폈다.
“더 좋은 곳으로 사무실을 이전하 신 것 축하드립니다.”
입으로는 빅스빅 픽처스의 사무실 이전을 축하한다고 말하고 있었지 만,심수창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계획과 다르게 상황이 흘러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그때 였다.
“저분은 누구십니까?”
이규한을 뒤늦게 발견한 심수창이 물었다.
“제 친구입니다.” “친구요?”
심수창이 아래위로 살피는 시선을 느끼며 이규한이 나섰다.
“영화 제작사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의 대표 이규한입니다.”
“아,이규한 대표님이시군요.”
심수창도 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
요즘 충무로에서 주가가 치솟고 있 는 영화 제작자 이규한의 이름을 들 어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영화감독 심수창입니다.”
반가운 표정으로 심수창이 오른손 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지만,이규한 은 그 손을 맞잡는 대신 바지 주머 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악수를 청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사 실을 알아챈 심수창이 표정을 굳혔 을 때 이규한이 입을 열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빅스빅 픽처 스 장준경 대표의 친구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 ……?"
“영화 ‘베테랑들’의 공동 제작자 자격으로 온 겁니다. 그래서 심 감 독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늘 수가 없 네요.”
“방금… 공동 제작자라고 했습니 까?” “그렇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전개이기 때문일까.
심수창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낸 순 간 이규한이 다시 입을 뗐다.
“감독님께 조금,아니 많이 실망했 습니다.”
“왜 실망했다는 겁니까?”
“욕심을 과하게 부리셨더군요.”
정곡을 찔린 심수창의 표정이 딱딱 하게 굳어진 순간,이규한이 덧붙였 다.
“‘베테랑들’이 흥행작이 될 거란 판단이 들자 탐이 나섰겠죠. 그래서 ‘베테랑들’이란 작품을 빼앗아 가려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베테랑들’을 좀 더 좋은 작품 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했 “그래서 교육원 제자였던 아마추어 작가 이지희에게 ‘베테랑들’ 시나리 오의 수정을 맡기셨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을 바 탕으로 추측해 본 것을 말씀드리겠 습니다. 처음 ‘베테랑들’의 연출을 제의받으셨을 때,감독님은 아마 작 품에 대한 욕심이 나셨을 겁니다. 이게 내 인생작이 될 수도 있겠다.
이렇게 판단하셨을 수도 있죠. 그런 데 막상 연출 계약을 맺고 나니 욕 심이 생기셨을 겁니다. 제작사 수익 의 5%를 받기로 한 지분 계약에 불 만도 품었을 거고요. 그래서 감독님 이 떠올린 것이 ‘베테랑들’이라는 작품을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순진 한 제작자 하나 등치는 것. 이 바닥 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감독님에 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을 테니 까요. 그래서 감독님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빅스빅 픽처스가 빅박스에서 초기 투자를 받았던 오 억의 자금이 거의 소진될 때를 기다 리셨던 거죠. 그때 계약 파기를 하 기 위해서.” 이규한이 심수창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틀린 부분이 없기 때문일까.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있는 심수창을 확인한 이규한이 잠시 멈 추었던 말을 다시 이어 나갔다.
“공동 제작자가 된 후에 계약서를 확인해 봤더니,감독님께서는 계약 금으로 1억을 받으셨더군요. 그리고 계약을 파기할 때는 계약금의 세 배 를 배상해야 한다는 조항도 적혀 있 더군요. 아마 감독님이 노리신 것은 이 부분이었을 겁니다.”
“내가 뭘 노렸다는 겁니까?” “연출 계약을 파기하기로 요구할 경우,장준경 대표는 이미 지불했던 계약금의 세 배인 삼억을 배상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준경 대표는 이미 빅박스에게서 받았던 초기 투자금을 모두 소진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삼 억을 배상할 자금의 여력이 없죠. 그때 감독님은 삼억 대신 ‘베테랑 들’이라는 작품을 달라고 요구하려 고 했을 겁니다. 그편이 더 큰 수익 을 거둘 수 있다고 판단했으니까 요.”
가타부타 말이 없이 자신을 노려보 고만 있는 심수창에게 이규한이 덧 붙였다.
심수창이 입을 떼서 반박하는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더럽군.’
강남 한복판에 발가벗겨진 채 서서 구경거리가 된 느낌이랄까.
자신의 속내를 완벽하게 들켜 버린 순간 심수창은 지독한 수치심을 느 꼈다. 그리고 반박하지 못한 이유는 이규한이 했던 추측이 정확했기 때 문이었다.
‘일이 왜 이렇게 꼬인 걸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착착 진행됐다. 그런
데 지금은 그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 져 버린 상태였다.
그 원인을 찾던 심수창의 시선이 이규한에게서 멈추었다.
‘저 자식 때문이야.’
아까 장준경은 이규한을 친구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이규한이 제작한 영화는 ‘수상한 여자’와 ‘청춘,우리 가 가장 빛났던 순간’ 두 편뿐이었 다.
즉,제작자로서는 초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규한 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또,그의 눈빛에는 노련함이 묻어 났다.
마치 영화판에서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경험한 노회한 영화 제작자와 마 주한 느낌이랄까.
그때 였다.
“반박하지 못하시는 걸 보니 제 추 측이 맞았나 보군요.”
이규한이 덧붙인 말을 들은 심수창 이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지금이라도 시치미를 뚝 떼고 반 박해 볼까?’
이런 고민을 하던 심수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치미를 땐다고 해서 이규한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였다.
‘전략을 수정하자.’
이미 자신의 수가 완벽하게 이규한 에게 읽힌 터라,미리 세웠던 계획 이 다 어그러진 상태였다.
여기서 더 밀어붙이는 것은 무모하 다고 판단을 내린 심수창은 재빨리 전략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 말입니까?”
“내가 고집을 꺾겠습니다.” “이지희 작가가 수정한 시나리오가 아니라 강민옹 작가가 수정했던 시 나리오로 촬영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베테랑들’이 최고의 작품이 될 수 있도록,감독으로서 제가 가 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겠습니다.”
이규한이 갑자기 공동 제작자로 끼 어들면서 ‘베테랑들’이라는 작품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해진 상황.
심수창은 계약대로 감독으로서 ‘베 테랑들’에 참여하기로 전략을 수정 한 것이었다.
‘베테랑들’이 그만큼 탐이 나는 작 품이었기 때문이었다.
‘날 빼지는 못할 거야.’ 심수창이 이렇게 판단하며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였다.
이규한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너무 늦었습니다. 새로운 감독을 구하겠습니다.”
이규한이 선언한 순간 심수창의 안 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표정이군.’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심수창 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지 만 허둥대는 그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과한 욕심을 부린 대가를 치르는 셈이었으니까.
앞으로 더 많은 대가를 치르게 될 터였다.
안절부절못하는 심수창 감독을 노 려보던 이규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이규한의 눈에 역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장준경 이 보였다. 그리고 이규한은 그가 당황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심수창 감독이 잘못을 인정하고 ’ 베테랑들‘ 연출에 최선을 다해 임하 겠다고 말했을 때, 못 이긴 척 받아 줬어야 하지 않느냐?’
심수창은 눈빛으로 이렇게 말하고 그렇지만 이규한은 그럴 생각이 전 혀 없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는 동물이 아니었 다.
지금이야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 심 수창이 이렇게 나오고 있었지만,시 간이 지나면 또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몰랐다.
심수창이 유능한 감독인 것은 틀림 없었지만,‘베테랑들’의 제작을 하는 과정에서는 불안 요소였다.
굳이 불안 요소를 안고 갈 필요는 없다고 이규한은 판단한 것이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