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남이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 얹기 (1) “의협심 때문이다?”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네.”
이규한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한 순 간 권지영이 말했다.
“이 대표님의 의협심에 감동받았어 요.”
“뭘 감동씩이나.”
“그래서 ‘베테랑들’에 투자하기로 방금 결정했어요.”
‘거짓말!’
이규한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권지영은 방금 ‘베테랑들’에 투자 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권지영에게는 그 정도 권 한이 없었다.
이규한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갑자 기 생각이 바뀌어서 ‘베테랑들’에 투자 결정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했 다.
‘이미 투자 결정이 났었던 거야!’
아마 로터스 엔터테인먼트 윗선에 서 이미 ‘베테랑들’에 투자하기로 결정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지영은 계속 앓는 소리를 했다.
거기에는 이유가 존재할 터였다.
“당연히 조건이 있겠지?”
“어떻게 알았어요?”
“‘베테랑들’에 투자하는 것,절대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리 고 권 팀장이 앓는 소리를 계속하는 걸 보고 눈치챘어.”
“이 대표님은 역시 못 속이겠네 요.”
권지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 이규한이 물었다.
“조건이 뭐야?”
“첫 번째 조건은 오억을 저희 측에 서 부담하지 않는 거예요.”
“제작사에서 부담하라?”
“쉽게 말해 거치 형식으로 빌려주 는 거죠.”
빅스빅 픽처스의 장준경 대표가 빅 박스에 되돌려 줘야 할 오억이 없으 니 일단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빌려주겠다.
나중에 ‘베테랑들’이 흥행에 성공 해서 제작사가 수익을 거두고 정산 을 받으면 그때 오억을 돌려 달라.
즉,‘베테랑들’이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해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의 리스 크를 최대한 줄이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하지.”
이규한이 대답하자 권지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그 표정을 확인한 이규한이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너무 쉽게 저희 측 조건을 받아들 이셔서요.”
“만에 하나 ‘베테랑들’이 흥행에 실패해서 제작사가 수익을 거두지 못할 경우 오억을 반납하지 않는다. 이런 요구를 할 줄 알았나 보지?”
“정확해요.”
“굳이 그런 요구를 할 필요가 없다 고 판단했어.”
“왜요?”
“분명히 흥행에 성공할 테니까.” 이규한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 하자,권지영이 두 눈을 빛냈다.
‘베테랑들’이란 작품에 더욱 욕심 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다음 조건은 뭐야?”
이규한이 묻자,권지영이 대답했다. “두 번째 조건은 심수창 감독이에 요. 심수창 감독이 ‘베테랑들’의 연 출을 맡는 경우에만 투자를 할 겁니 다.”
권지영이 이런 조건을 내세운 이유 도 짐작이 갔다.
빅스빅 픽처스는 신생 제작사인 만 큼,이미 흥행 감독으로 검증이 끝 난 심수창 감독이 연출을 맡아야 안 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역시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기 위한 선택.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조건들이었다. 그렇 지만 이규한은 표정을 굳혔다.
심수창 감독 역시 꿍꿍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인 만큼,그 에게 ‘베테랑들’의 연출을 맡길 수 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받아들일 수 없어.”
“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건데요?”
“자세한 이유까지는 밝힐 순 없지 만,심수창 감독에게 연출을 맡기지 않기로 이미 결정한 상태야.”
이규한이 대답하자 권지영이 난감 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럼 곤란한데.”
“어려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요.”
이규한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 섰다.
그 모습을 발견한 권지영이 물었 다.
“왜 일어나세요?”
“시간이 별로 없어.”
" ……?"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투자를 못 받았으니,다른 투자사를 찾아가 봐야지. 어쩔 수 없잖아.”
이규한이 어깨를 으쓱한 후 회의실 을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다시 앉아 보세요.”
“왜? 얘기 끝난 거 아냐?” “좀 더 대화를 하다 보면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잖아요.”
“심수창 감독은 무조건 안 돼.”
이규한이 선전 포고 하듯 딱 잘라 말한 후,마지못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권지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녀가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모습 을 바라보던 이규한이 희미한 웃음 을 지었다.
권지영은 화장실을 간 것이 아니었 다.
자신과의 협상 상황을 윗선에 보고 하기 위해 회의실을 빠져나간 것이 었다. 그리고 NEXT 엔터테인먼트 로 찾아가겠다는 이규한을 붙잡아 두고,윗선에 협상 상황을 보고하는 것이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베 테랑들’에 대한 투자 의지가 강하다 는 증거였다.
“어쩌면 잘 풀릴 수도 있을 것 같 은데.”
이규한이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권지영이 회의실로 돌아왔 다.
그 모습을 확인한 이규한이 서둘러 미소를 지우고 정색한 채 입을 됐 “괜한 시간 낭비를 하는 것 같은 데.”
“아직 모르죠. 저희 측에서 대안을 제시할 거거든요.”
“대안? 어떤 대안이지?”
권지영이 대답했다.
“이 대표님이 ‘베테랑들’ 제작에 합류해 주세요.”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베테랑 들’에 투자하는 조건으로 새롭게 내 세운 것.
이규한이 ‘베테랑들’ 제작에 참여 하는 것이었다.
즉,블루문 엔터테인먼트와 빅스빅 픽처스가 ‘베테랑들’이란 작품을 공 동 제작 하라는 뜻이었다.
“왜 그런 조건을 내거는 거야?”
이규한이 묻자 권지영이 시선을 피 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빅스빅 픽처스의 장준경 대표를 못 믿으니까요.”
“준경이를 못 믿겠다?”
“저희 측에서는 투자에 대한 리스 크를 줄일 안전장치가 필요해요. 그 안전장치를 심수창 감독으로 생각하 고 있었는데,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그래서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다른
안전장치가 필요한 거죠.”
“그게… 나다?”
“제가 이 대표님을 많이 믿거든 요.”
이규한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뗐 다.
“곤란한데.”
“곤란하신 이유가 뭔데요?”
“그게……
“‘베테랑들’이란 작품에 자신이 없 기 때문인가요?”
권지영이 추궁하듯 던진 질문을 받 은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의 상황.
장기로 비유하면 꼭 외통수에 걸린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공동 제작에 참여하지 않으면 어쩔 거야?”
“포기합니다.”
“ (,?
“저희도 더 양보할 수는 없으니까 요.”
귄지영이 대답하는 어투는 단호했 다. 그리고 이규한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양보했어.’
이 정도면 로터스 엔터테인먼트 측 에서도 많이 양보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일이 묘하게 흘러가네.’
이규한의 원래 계획.
친구이자 동료로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던 장준경을 도우려던 것이었 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베테랑들’의 제작에 직접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 에 처해 있었다.
‘난감하네.’
재차 한숨을 내쉰 이규한이 말했 다.
“권 팀장,일단 준경이와 상의하고 난 후에 결과를 알려 줄게.” 커피 전문점의 문이 열리고 장준경 이 들어섰다.
이규한을 발견한 장준경은 마치 화 난 사람처럼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 왔다.
“어떻게 됐어?”
장준경은 인사도 건너뛰고 다짜고 짜 질문부터 던졌다.
그만큼 마음이 급하다는 증거.
“일단 앉아. 앉아서 얘기해.”
이규한이 권하고 나서야 장준경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잘 안됐구나. 하긴 이미 빅박스에 서 초기 투자를 받았는데,‘베테랑 들’에 투자하려는 곳을 찾을 수 있 을 리가 없지.”
한숨을 푹 내쉬는 장준경에게 이규 한이 말했다.
“잘 안됐다고 말한 적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네 표현대로라면 정신 나간 투자 배급사를 찾았다는 뜻이야.”
“정말이야? 어딘데?”
“로터스 엔터테인먼트.”
로터스 엔터테인먼트 역시 메이저 투자 배급사 가운데 하나.
그래서 장준경의 표정이 밝아진 순 간 이규한이 다시 말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어.”
“어떤 조건인데?”
“빅박스랑 같아. 공동 제작을 원 해.”
“공동 제작을 원한다고?”
장준경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장준경이 잠시 후 물었다.
“어디와 공동 제작을 하길 원하는 데?”
“블루문 엔터테인먼트.”
이규한이 대답하자 장준경의 눈이 커졌다.
“너와 같이 공동 제작을 하길 원한 다고?”
“맞아.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략하 게 설명해 줄게.”
이규한이 로터스 엔터테인먼트의 투자팀장인 권지영과 만나서 나누었 던 대화를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일이 그렇게 됐구나.”
목이 탄 듯 냉수를 들이켰다.
“선택은 네 몫이야.”
이규한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장준경을 위해서 이규한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어떤 선택을 내리는가는 장준경의 몫이었고,이규한은 그의 선택을 강 요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때였 다.
“같이하자.”
이규한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 리 장준경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이규한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규한의 표정이 밝지 않다 는 것을 알아챈 장준경이 물었다.
“설마… 같이 안 하려는 건 아니 지?”
‘남이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만 얹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규한이 미안한 감정을 느낀 이유 였다.
그렇지만 정작 장준경은 전혀 개의 치 않는 표정이었다.
“이규한,내게 미안해할 필요 없
“하지만……
“많이 다르니까.”
‘뭐가 다르다는 거지?’
이규한이 의아한 시선을 던진 순간 장준경이 웃으며 입을 뗐다.
“내가 백기원 팀장에게서 플래닛 엔터테인먼트와 공동 제작을 하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분하고 억울해 했던 이유가 뭔지 알아? 무임승차를 하려는 것 같아서였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
“아냐. 넌 달라. 분명히 ‘베테랑들’ 에 도움이 됐으니까.”
하마터면 작품을 통째로 빼앗길 뻔 했던 위기에서 다른 투자사를 찾을 수 있게 도와준 것만으로도 넌 이미 공동 제작자로서 역할을 했다.
방금 장준경이 한 말에 담긴 숨은 의미였다.
그때 장준경이 덧붙였다.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야. 앞으로 많이 괴롭힐 테니까.”
무임승차는 용납하지 않는다.
‘베테랑들’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역할을 맡길 것이라고 엄포를 늘어 놓는 장준경에게 이규한이 말했다.
“일 대 구로 하자.” 이규한이 공동 제작의 수익 배분 비율에 대해 말했다.
“일 대 구? 너무 양심이 없는 것 아냐?”
장준경이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낸 순간 이규한이 물었다.
“너무 많아?”
“아니,너무 적어.”
“ (?,
“일 안 하려고 벌써 얕은수 쓰는 거냐?”
장준경이 웃으며 덧붙였다.
“수익 배분은 사 대 육으로 하자. 블루문 엔터테인먼트가 사,빅스빅 픽처스가 육. 어때? 불만 없지?” 당연히 불만이 있었다.
장준경은 지난 삼 년간 ‘베테랑들’ 의 기획 개발을 혼자서 도맡아 해 왔다.
이규한은 다 차려져 있는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입장인데,수익 배분 을 사 대 육으로 하는 것은 양심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