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새로운 세입자 (2)
비로소 심수창 감독의 진짜 목적을 알게 된 장준경은 놀란 표정을 감추 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고개를 흔들었 다.
“아직 놀라긴 일러.”
“또 뭐가 남았다는 거야?”
“그래. 백기원 팀장도 마찬가지야.” “마찬가지라니?”
의아한 시선을 던지는 장준경에게 이규한이 그동안 조사한 것들을 간 략하게 요약해서 알려 주었다.
그 설명을 모두 들은 장준경의 얼 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진짜 나쁜 새끼들이네.”
“맞아. 진짜 나쁜 놈들이야.”
이규한이 동조한 순간 장준경이 고 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일까?”
“무슨 뜻이야?”
“왜 이렇게까지 하려는 건지 모르 겠다는 뜻이야.” 장준경이 의문을 표한 순간 이규한 이 이유를 알려 주었다.
“아까 얘기했둣이 작품이 좋으니 까. 그래서 다들 욕심을 부리는 거 야.”
“하지만……
장준경이 자신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확인한 이규한이 말했다.
“네 자식 같은 작품에 그렇게 자신 이 없어?”
“그런 게 아니라……
정말 확신이 없기 때문일까.
여전히 자신 없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는 장준경에게 이규한이 덧붙였
“천만 영화가 될 가능성이 높아.” 이규한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베 테랑들’.
천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빅 히 트작이었다
‘천백만 명이었나?’
‘베테랑들’의 정확한 관객수는 기 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천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 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물론 이규한의 기억대로 미래가 흘 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객을 동원했던 영화가 실제로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 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광안리’ 였다.
이규한이 알고 있는 기억 속 ‘광안 리’는 천만 관객을 돌파했었다. 그 렇지만 김기현이 제작해서 개봉한 ‘광안리’는 천만 관객을 돌파하기는 커녕 채 이백만 명의 관객도 극장으 로 불러들이지 못했다.
‘미래는 변한다!’
‘광안리’의 흥행 참패를 통해서 이 규한은 자신이 알고 있는 기억 속의 미래가 변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
달았다.
이것이 ‘베테랑들’이 천만 영화가 될 거라고 확언하지 못하고,천만 영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던 이유였다.
‘많이 달라.’
제작사,감독, 개봉 시기 등등.
이규한이 알고 있는 기억 속 ‘베테 랑들’과 장준경이 제작하고 있는 ‘베테랑들’은 다른 점이 많았다.
이런 변수들은 분명히 영화의 흥행 에 영향을 미칠 터였다.
“정말… 천만 영화가 될 수 있을 까?”
장준경의 질문을 받고서 이규한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확실한 건 없어. 그렇지만 가능성 은 충분해.”
“가능성이 충분하다?”
“심수창 감독과 백기원 팀장이 ‘베 테랑들’을 두고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것이 좋은 작품이라는 증거니까.”
심수창 감독과 백기원 팀장이 지금 하고 있는 짓은 무척 비열했다.
그렇지만 심수창은 흥행 감독으로 입지를 굳힌 감독이었고,백기원은 메이저 투자 배급사인 빅박스의 투 자팀장이었다.
그들이 이런 위치까지 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흥행할 작품을 알아보는 안목을 갖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이 동시에 ‘베테랑들’이 란 작품에 욕심을 내는 것이 흥행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라는 증거였 다.
“천만 영화라.”
상상만으로도 좋은 걸까.
장준경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 미소는 이내 흔적도 없 이 지워졌다.
칫 잘못하면 천만 영화가 될 수도 있는 ‘베테랑들’을 빼앗길 수도 있 는 상황이니까.”
현실을 직시한 장준경이 초조한 표 정으로 물었다.
“아까 네가 끼어들면 상황이 바1 수도 있다고 했잖아? 자세히 설명해 봐.”
“‘베테랑들’을 빼앗기지 않을 방법, 현재로써는 두 가지야. 첫 번째 방 법은 백기원 팀장의 제안을 받아들 이는 거지.”
“플래닛 엔터테인먼트와 공동 제작 을 해라?” ‘맞아. 그럼 ‘베테랑들’은 빅박스의
투자를 받아서 개봉하고,제작사 수 익의 절반은 건질 수 있으니까.”
이규한이 첫 번째 방법을 제시했 다.
그렇지만 장준경은 내키지 않는 둣 마뜩잖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이규한이 두 번 째 방법을 제시했다.
“또 하나의 방법은 투자 배급사를 새로 찾는 거야.”
“그건 힘들 것 같은데.”
이규한이 제시한 두 번째 방법을 들은 장준경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 다.
“왜 힘들다고 생각하는 거야?”
“초기 투자를 이미 받았거든.”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 이유는 빅박스에서 이미 초기 투자금을 지 급받아서 ‘베테랑들’의 기획 개발비 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규한도 이미 그 사실을 장준경에게서 전해 들어서 알고 있 는 상황이었다.
즉,그 사실을 모르고 이런 이야기 를 꺼낸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전액 투자가 아니었잖아?”
“그렇긴 하지만……
받았어?”
“초기 투자금으로 오억 정도 받았 어.”
“소문대로네.”
이규한이 말하자 장준경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소문대로라니?”
“무척 짜다는 뜻이야. 초기 투자금 으로 오억밖에 지급하지 않은 게 백 기원 팀장이 짜다는 증거이지.”
백기원 팀장의 성향.
좋게 말하면 신중한 것이었고,나 쁘게 말하면 소심한 것이었다.
그 말을 꺼낸 이규한의 표정이 밝
아졌다.
‘생각보다 적다!’
빅박스가 초기 투자한 금액이 적다 는 것.
장준경 입장에서는 희소식이었다.
“쉽게 말해 오억만 토해 내면 된다 는 뜻이지?”
“그렇긴 한데 오억이 적은 돈이 아 니잖아?”
장준경은 사무실 임대료도 내지 못 해 쩔쩔매고 있을 정도로 재정난에 처해 있었다.
그가 오억이란 거금을 토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초기 투자 받은 오억 중에 남은 건 몇 백도 안 될 텐데……
예상대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준경의 말을 이규한이 도중에 잘 랐다.
“다른 사람이 내게 해야지.”
“다른 사람? 누구?”
“새로운 투자 배급사.”
이규한이 대답했지만 장준경의 표 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장준경 역시 영화 제작자.
‘베테랑들’의 새로운 투자 배급사 를 찾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 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 “어떤 정신 나간 투자 배급사가 오 억을 선뜻 대신 내주면서까지 ‘베테 랑들’에 투자를 하겠어?”
그래서 장준경이 힘없는 목소리로 질문한 순간 이규한이 대답했다.
“네 말처럼 새 투자 배급사를 찾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만 시 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하지는 말자 고.”
“……?"
“정신 나간 투자 배급사를 한번 찾 아보자.” 로터스 엔터테인먼트 투자팀 사무 실.
이규한이 사무실로 들어선 순간 투 자팀 직원들이 인사를 건넸다.
그렇지만 권지영은 이규한이 찾아 왔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하고 골 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똑똑.
권지영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서 책 상을 두드린 후에야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규한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전에. 무슨 고민 있어?”
“왜요?”
“권 팀장 얼굴이 좀 상한 것 같아 서.”
이규한이 대답하자 권지영이 눈을 흘겼다.
“이 대표님이 그런 질문을 던지시 면 안 되죠.”
“왜 안 된다는 거야?”
“제게 고민거리를 던져 준 장본인 이시잖아요.”
권지영이 원망스런 시선을 던졌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당당하게 대꾸 했다.
“권 팀장,입은 삐뜰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자.”
“제가 뭐 틀린 말 했어요?”
권지영이 따지듯 질문한 순간 이규 한이 여전히 당당하게 대답했다.
“고민거리를 안겨 준 게 아니라 기 회를 준 거야.”
“무슨 기회를 줬단 말씀이세요?”
“좋은 작품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 이지.”
“네,참 감사하네요.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권지영이 벌떡 일어나 회의실로 들 어갔다. 그리고 이규한과 마주 앉자 마자 권지영이 한숨을 내쉬며 하소 연을 했다.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아요.”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이규한이 쓰 게 웃었다.
이규한이 권지영에게 안겨 준 고민 거리는 ‘베테랑들’이었다.
밤잠을 설쳐서일까.
며칠 사이 얼굴이 많이 상해 있는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이규한이 물었다.
“시나리오,읽어 봤지?”
“네,읽어 봤어요.”
“어땠어?”
“좋았어요. 빅박스에서 ‘베테랑들’ 이란 작품에 투자를 한 이유를 알겠 더군요.”
이규한이 권지영에게 보냈던 ‘베테 랑들’의 시나리오 책은 강민옹 작가 가 각색했던 작품이었다.
감정을 통해 확인했던 예상 관객수 는 5,261,113명.
권지영도 괜히 이른 나이에 로터스 엔터테인먼트 투자팀장 직책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목은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저희 측에서 ‘베테랑들’이란 작품 에 투자하기로 결정하려고 하니까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 거든요.”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데?”
“일단 빅박스와의 관계가 삐걱댈 거예요. 마치 우리가 빅박스에서 투 자하기로 했던 작품을 벳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요.”
“또 뭐가 마음에 걸려?”
“오억을 저희 측에서 떠안을 정도 로 ‘베테랑들’이 가치가 있는 작품
인가에 대한 확신도 서지 않아요.”
“그렇군.”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예상했던 요인들이었기 때 문이었다.
“권 팀장,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생각해.”
“어떻게요?”
“작품만 보라고.”
이규한의 충고가 일리가 있다고 판 단한 걸까.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권지영이 화제를 돌렸다.
면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만약 저희 측에서 ‘베테랑들’이라 는 작품에 투자를 하지 않으면,어 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다른 투자 배급사를 찾아가 봐야 지.”
“NEXT 엔터테인먼트요?”
“잘 아네.”
이규한의 대답을 들은 권지영이 눈 살을 찌푸렸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 는 어렵지 않다는 옛말이 틀리질 않 네요.” ‘무슨 뜻이야?”
“너무 당당하게 바람피우겠다고 선 언하는 것 아니예요?”
권지영이 눈을 흘기며 물은 순간 이규한이 재빨리 정정했다.
“권 팀장, 정확하게 하자. 이건 바 람이 아니다.”
“그럼요?”
“프로포즈를 먼저 했는데 거절당해 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상대를 찾아 가는 거지. 엄연히 달라.”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기 힘든 둣 말문이 막힌 권지영을 확인한 이규 한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테인먼트에서 받은 것.
권지영에게는 경각심을 심어 주기 에 충분했다.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의 이규한 대 표가 언제든지 다른 투자 배급사와 손을 잡을 수 있다.’
이런 경각심이 생겼기에 권지영의 고민이 더욱 깊어진 것이었다.
“빅스빅 픽처스 장준경 대표와는 어떤 사이세요?”
수세에 몰리자 권지영이 다시 화제 를 돌렸다.
“동료이자 친구야.”
“각별한 사이세요?” “친한 편이지.”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요? 장 준경 대표 일인데,이 대표님이 자 기 일처럼 나서시는 걸 보니 무척 각별한 사이인 것 아니세요?”
“친구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걸 모 른 척하기 어려웠던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 빅박스의 백기원 팀장이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거 든. 옳지 않은 걸 바로잡기 위해 나 선 셈이지.”
1억 관객 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