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1,787,689.
한강준 작가가 집필한 ‘베테랑들’ 의 시나리오 초고를 들고 확인한 예 상 관객수는 약 180만 명이었다.
“손익 분기점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야.”
다음으로 이규한이 가운데에 놓인 시나리오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장준경이 만족감을 표했던 강민웅 작가가 각색한 시나리오 책을 집어 든 순간,새로운 숫자가 떠올랐다.
-5,261,113.
이규한의 눈앞에 떠오른 숫자는 확 늘어 있었다.
“잘 고친 것 맞네.”
오백만 명이 넘는 예상 관객수를 확인한 이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준경의 말대로라면 강민웅 작가 가 각색한 시나리오 책을 보고 심수 창 감독이 연출을 맡고 싶다는 의사
를 드러냈다고 했다.
“보는 눈은 있네.”
심수창 감독이 괜히 흥행 감독이 된 것이 아니었다.
흥행할 작품을 알아보는 안목은 분 명히 갖고 있었다.
잠시 후,이규한이 오른쪽에 놓인 시나리오 책을 들어 올렸다.
심수창 작가가 데려온 이지희 작가 가 윤색한 시나리오 책을 집어 들었 던 이규한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1,563,358.
예상 관객수가 확 줄었기 때문이었 다.
“잘못 고쳤네!”
그냥 잘못 고친 것이 아니었다.
이 정도로 확 줄어든 예상 관객수 가 의미하는 것.
작정하고 작품을 망치기로 의도했 거나,시나리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아마추어 작가가 작업을 했을 가능 성이 높았다.
“후우.”
손에 들고 있던 시나리오 책을 내 려놓으며 이규한이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이규한이 세 권의 시나리오 책을 감정했던 이유.
장준경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 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가 여부 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감 정이 끝난 지금은 장준경의 상황 판 단과 작품을 보는 안목이 틀리지 않 았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잠시 후, 이규한이 고개를 갸웃하 며 혼잣말을 꺼냈다.
“심수창 감독과 백기원 팀장은… 과연 몰랐을까?”
다음 날 아침.
사무실로 출근한 김미주가 이규한 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 다.
“왜 벌써 출근하셨어요?”
“미주 씨,내가 이렇게 일찍 출근 하는 것,봤어?”
“한 번도 못 봤죠. 그럼 퇴근을 안 하신 거군요?”
“맞아.”
“커피 한 잔 타 드려요?”
“잘 마실게.”
이규한이 기지개를 쭉 펼 때,황진 호도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 대표가 이 시간에 왜 여기 있 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굴 기다려? 설마,나?”
“맞습니다.”
“왜 날 기다렸어?”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규한이 황진호와 함께 소파에 앉 았다.
“무슨 일인데?”
“혹시 플래닛 엔터테인먼트라는 제 작사를 아세요?”
“플래닛 엔터테인먼트?”
“홈페이지를 찾아보니까 윤학길이 란 분이 대표로 등재되어 있던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서요. 혹시 윤학길이란 사람에 대해 알고 계세 요?”
“그건 왜 묻는 건데?”
“확인할 게 좀 있어서요.”
“잠시만 기다려 봐.”
황진호가 휴대 전화를 꺼내서 어디 론가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그의 휴대 전화로 문자가 도착했다.
그 문자를 확인한 황진호가 입을 뗐다.
“바지 사장이래.”
“네?”
“아까 이 대표가 말했던 플래닛 엔 터테인먼트의 윤학길 대표 말이야. 대표로 이름만 올려놓은 바지 사장 이라는군.”
굳이 정보의 출처는 묻지 않았다.
황진호가 이렇게 자신 있는 목소리 로 대답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한 정 보라는 증거였으니까.
“그럼 진짜 대표는 누구입니까?”
“서병길이라는군.”
“서병길이요?”
“서병길,몰라? 예전에 빅박스 투 자팀에서 근무했었는데. 빅박스에서 퇴사한 후에 지금은 플래닛 엔터테 인먼트에서 피디로 일하고 있다는 군.”
“왜 바지 사장을 앉혀 놓은……?” 재차 질문을 던지려던 이규한이 도 중에 입을 다물었다.
짚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거리 픽처스와 비슷한 건가?’ 블루문 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파
기했던 배정훈 감독과 계약을 맺고 ‘사랑이 운다’라는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 사거리 픽처스.
법망을 교묘히 피해서,직접 제작 에 뛰어들기 위해서 씨제스 엔터테 인먼트가 세운 자회사 개념이었다.
그리고 플래닛 엔터테인먼트도 사 거리 픽처스와 같은 자회사란 생각 이 퍼뜩 들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플래닛 엔터테인 먼트는 빅박스가 법망을 피해서 세 운 제작사라는 것뿐이었다.
“이제야 어떤 수작을 부리려는지 알겠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이규 한의 머릿속에 비로소 그림이 그려 지기 시작했다.
빅박스의 투자팀장 백기원.
그는 장준경이 준비하고 있는 ‘베 테랑들’의 시나리오 책을 읽고 난 후,대박이 날 것을 단숨에 알아봤 을 것이었다.
빅박스에서 지체 없이 투자 의향을 드러냈던 것이 증거였다.
그렇지만 백기원은 투자를 해서 수 익을 거두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대박 흥행작이 될 가능성이 높은 ‘베테랑들’을 통해서 더 많은 수익 을 거두고 싶다는 욕심을 품었다.
그런 그가 꾸민 계획이 바로 플래 닛 엔터테인먼트를 끼워 넣어서 공 동 제작을 시키는 것이었다.
“수익 배분 비율을 오 대 오로 하 자더군. 어때? 진짜 나쁜 새끼들이 지?”
제작사 수익의 50%.
‘적은 돈이 아니니까.’
잠시 후,이규한이 두 눈을 빛냈 다.
천만 영화인 ‘수상한 여자’를 제작 한 경험이 있었기에,이규한은 제작 사 수익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베테랑들’이 천만 영화가 되 거나, 천만 영화에 근접할 정도로 홍행할 경우,장준경이 대표로 있는 빅스빅 픽처스가 거둘 수익은 적지 않을 터였다.
그 수익의 절반을 노리고 백기원은 이런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였다.
“어떤 수작을 부리려는지 알겠다 니? 그게 무슨 뜻이야?”
황진호가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이 규한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황진호에게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설명을 모두 들은 황진호가 미 간을 잔뜩 찌푸렸다.
“나쁜 놈들. 이젠 벼룩의 간까지 빼 먹을 심산이네.”
“가슴이 답답하네요.”
“장준경 대표와 많이 친해?”
만,같은 영화 제작자로서 지금의 상황이 화가 나는 겁니다.”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자, 황진호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며 입을 뗐다.
“그런데 작정하고 나선 것 같으니 상황이 쉽지 않네.”
“네,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황진호가 답답한 표정으로 질문한 순간 이규한이 대답했다.
“방법을 찾아봐야죠.” 빅스빅 픽처스는 상암동에 위치해 있었다.
원래는 강남에 사무실이 있었지만, 약 1년 전에 상암동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정부에서 영세한 영화인들을 지원 하기 위해 세운 DMC 파크 내에 위치한 사무실을 사용하면 임대료가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DMC 파크까지 가면 제작자 인 생 막바지에 몰린 거다.”
빅스빅 픽처스가 입주해 있는 DMC 파크는 교통이 불편한 편이
또,주변에 메이저 투자 배급사들 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악조건들에도 불구하고 DMC 파크 내에 위치한 사무실을 임대료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이용한 다는 것은 그만큼 재정 상황이 열악 하다는 뜻이었고,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던 것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택시비를 계산하고 내린 이규한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삼 층으로 올라 간 이규한이 빅스빅 엔터테인먼트가 입주해 있는 307호 앞으로 다가갔 다.
딩 동.
이규한이 벨을 누른 후 기다리고 있자,잠시 후 문이 열렸다.
어제 과음했기 때문일까.
초췌한 기색이 역력한 장준경이 이 규한을 발견하고 두 눈을 치켜떴다.
“이규한.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사무실 구경하고 싶어서 찾아왔 어.” 이규한이 대답하자 장준경이 얼굴 을 붉혔다.
“야,볼 것도 없어.”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문전 박대할 생각이야?”
“???일단 들어와.”
장준경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옆으 로 비켜섰다.
약 세 평 남짓 될까.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던 이규한은 아까 장준경이 얼굴을 붉혔던 이유 를 곧 알 수 있었다.
책상과 간이 소파만 놓여 있음에도 꽉 찬 느낌이 들 정도로 사무실 내
부는 좁았다.
또,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탓에 홀아비 냄새가 코끝을 찌르고 있었 다.
“보여 주기도 부끄럽다.”
장준경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것을 들은 이규한이 물었다.
“여기 한 달 임대료가 얼마야?”
“삼십만 원 정도 돼.”
“아주 싼 편은 아니네.”
“그래도 따로 사무실을 임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싼 편이지. 게다가 정부에서 전기료와 관리비를 지원해 주기도 해서 여기 들어오는 것도 경
쟁이 치열한 편이야.”
“용케 경쟁을 뚫었네.”
“운이 따랐어. 그런데 이제 여기서 지낼 시간도 얼마 안 남았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여기서 머물 수 있는 기간,1년뿐 이거든. 그러니까 한 달 뒤에는 사 무실 빼야 해. 아무래도 내 운이 다 한 것 같아.”
장준경이 씁쓸한 표정으로 꺼낸 말 을 들은 이규한이 물었다.
“여기서 나가게 되면 어떻게 할 거 야?” 기원 팀장의 말대로 하거나. 그럼 사무실 임대료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규한이 한숨을 내쉬며 장준경을 바라볼 때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머리 에 쥐가 날 정도로 계속 고민해 봤 으니까. 그런데 다른 답은 없었어.”
장준경이 이규한의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그렇지만 이규한은 고개를 흔들며 입을 뗐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을까?”
“응. 다른 방법은 없어.”
장준경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많이 지치고 힘들어서일까.
반쯤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 는 장준경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이 규한이 입을 열었다.
“아니,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야.”
“대체 무슨 방법이 있다는 거야?”
“일단 하나씩 해결하자.”
" ……?"
“급한 것부터 해결하자고. 가장 급 한 건 사무실이지?” 빅스빅 픽처스가 DMC 파크에 입 주했다는 것이 장준경이 재정적으로 궁지에 몰렸다는 증거였다.
세 평 남짓한 사무실을 사용하는데 지불해야 하는 임대료는 약 삼십만 원.
장준경은 그 임대료를 내는 것조차 힘들어 하고 있었다.
“내가 사무실을 마련해 줄게.”
이규한이 꺼낸 말을 들은 장준경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사무실을 하나 마련 해 주겠다고.”
이규한이 호의를 베풀었지만,장준 경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대료를 낼 수 있는 형편이 안 된다 고.”
잠시 후,장준경이 꺼낸 말을 들은 이규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알아.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
“안다고? 그런데 왜 그런 소릴 한 거야?”
“답답하다.”
“응?”
“환기가 안 돼서 머리가 아플 지경 이야. 그러니까 밖으로 나가자.”
“갑자기 어딜 가자는 거야?”
장준경이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이규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 했다.
“가 보면 알아.”
1억 관객 제작자